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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딱서니 없는 번역쟁이의 똥고집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1-12 21:32:13
추천수 2
조회수   2,308

제목

철딱서니 없는 번역쟁이의 똥고집

글쓴이

황보석 [가입일자 : ]
내용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기에 번역에서의 제 지론(씩이나?)도 하나 올립니다.

이 글은 원래 2007년 3월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한국번역학회 창립총회에서 영미문학 번역자 대표로 했던 모두연설문인데, 문학번역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아 일부 수정하고 첨삭한 글입니다.

번역문학작품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문학 번역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목은 거창하게 <문학 번역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잡아 두었지만 정작 글의 내용은 우리의 번역 현실을 헤집고 들추어 고쳐야 할 점들을 지적하고 번역자들이 더 나은 번역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침들을 몇 가지 제시하는 쪽으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의 질이라는 문제는 거시적으로 본다면 어느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들과 출판사가 힘을 합쳐야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힘을 합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출판시장에서 번역물 부문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198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에 뛰어들어 25년 넘게 거의 전적으로 번역, 그것도 대부분은 문학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오는 동안 나는 몇몇 뛰어난 분들의 번역을 제외하고는 번역서라면 여간해서 읽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인지, 아니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좀팽이 성격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서를 읽어가다 보면 원문이 무엇인지 안 봐도 뻔한 생경스러운 번역이나 심지어는 분명한 오역까지도 눈에 띄고 그럴 때마다 혈압이 오르기 때문이다. 또 번역자가 외국어 해득 능력과 언어 구사력은 충분히 갖추었으면서도 성의를 보이지 않고 그저 대충대충, 초역 수준의 번역을 한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런 경우에는 다른 동업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물론, 나 역시 그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번역이건 다른 사람들의 번역이건, 번역에서 이런 점은 시정되어야겠다고 수시로 느껴 온 문제점들은 단순히 번역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출판시스템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출판시스템과 연관된 몇 가지 문제점을 간단히 짚고 넘어간 뒤 번역자의 문제점들로 넘어가고자 한다.



우리의 문학 번역에서 양질의 번역을 저해하는 문제점들 중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점은 그저 뜻만 통하는 치졸한 번역이나 우리말답지 못한 성의 없는 번역에 오역까지도 상당수 눈에 띄는 날림 번역서들이 버젓이 출간되어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번역서들이 난무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물론 번역자 개개인의 역량이 부족한 데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의외로 많은 출판사들이 번역자에게 평균치의 삶을 살아갈만한 보수조차도 지급하지 않거나 못하고, 그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여간해서 번역 일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문학작품의 번역에서는 번역자가 원문의 느낌과 뉘앙스를 우리나라 말과 번역자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단어 대 단어, 문장 대 문장의 해석만으로는 원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가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을 해나가기 전에 먼저 원서를 정독하면서 내용과 문체를 미리 파악하고, 행간에 숨은 뜻을 읽고, 원문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는 구조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시간과 돈에 쫓겨 그럴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출판사 측에서도 저렴한 원고료로 대강 번역시킨 원고들을 대충 훑어보고 출판하는 예가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번역서라면 아예 안 읽는다는 독자들도 적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 번역문학 작품이 고급 독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주된 이유는 단어 대 단어 식의 치졸한 번역, 운을 맞추지 못한 데서 오는 초등학교 작문 같은 벽돌쌓기 식 문장, 동일한 주어와 술어의 반복, 격에 맞지 않는 어색하고 생경스러운 말투, 그리고 심지어는 누가 보아도 오역임이 분명한 책임도 성의도 없는 번역들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몫 단단히 하는 것이 일부 출판사들의 한탕주의와 출판기일을 맞추려는 데 쫒긴 졸속번역일 것이다.



감식안이 있는 독자들을 번역문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번역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이 모자라거나 성의가 부족한 번역자들은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 어쩌면 나의 이런 생각이 좀 과격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능력 없으면 퇴출당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이고 그래야만 엉터리, 날림 번역이 하루라도 더 빨리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당장 돈벌이가 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은 여간해서 출판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근시안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출판계 스스로 출판계의 목을 죄는 행위일 것인데, 번역물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현재 몇몇 메이저 출판사에서 한 작가의 작품 전집을 순차적으로 간행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지만, 70년대 중반 고려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영혼의 고백록>등의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꾸준히 소개하고 90년대 이후에는 열린책들에서 <공중곡예사>, <달의 궁전> 등의 작가인 폴 오스터를 꾸준히 소개함으로써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을 거둔 예를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출판사에도 상당히 보람찬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거시적으로 작품성이 뛰어나서 소개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가를 선정해야 한다는 선결조건은 충족시켜야 하겠지만.



아울러 출판사들에서 꼭 지켜주어야 할 한 가지는 번역자에게 작품 번역 의뢰를 하기에 앞서 그 작품의 개요를 요약해 달라고 함으로써 번역자의 능력을 미리 제고해보시라는 것이다. 요약한 내용의 문장구성만 보더라도 그 번역자의 번역능력과 가용어휘가 어느 정도인지 대부분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알음알음으로, 인지도로, 혹은 원고료가 싸다는 이유로 번역자를 선정해서 능력이 따르지 못하거나 성의 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의 시장 점유율이 커질수록 유능한 인재를 번역계로 끌어들이기가 더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고급독자들은 번역 작품에 등을 돌리고, 번역 문학작품 시장은 더 위축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번역자의 문제점으로 넘어가서 필자가 번역 작품들을 접했을 때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들의 예를 몇 가지 들고 아울러 옳다고 생각하는 번역이 어떤 것인지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번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프로이고 프로라면 자기의 번역으로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백만 명에게 원작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도 있고 잘못 전달될 수도 있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또 번역은 전문적인 일이기도 한 만큼 번역자는 그 일에 미쳐볼 필요도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적인 일이라면 거기에 미쳐보지 않고서는 보람 있는 결실을 거두기란 지난한 일이다.



번역자들이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작품 전체를 구조적인 견지에서 보고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도록 그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I did my best.” 라는 아주 간단한 문장을 들어 보자. 이 문장만 나오면 거의 예외 없이 옮긴 글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무지한 하녀라고 한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 때의 번역은 마땅히 “나는 하는 껏 했는데요.” 라든가 “죽을 똥 다 쌌는데요.”가 옳을 것이다. 또 화자가 깡패나 부랑자일 경우 “조뺑이 칠만큼 쳤어!”라고 해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일까? “Go to hell!”을 “지옥으로나 꺼져버려!”라고 하는 것도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치졸한 번역의 일례다. 우리말에 “지옥으로나 꺼져버려!”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진정한 번역은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Go to hell!”은 마땅히 “천벌을 받을 놈!”, “벼락이나 맞아 뒈져라!”가 맞는 표현일 것이며, 때에 따라 “저런 육시를 할 놈!”이나 “주리를 틀 놈”이라고 해도 안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번역문학 작품이 치졸해지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번역자들이 say와 tell의 번역에 유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이 단어들을 그저 “말하다”로 옮기는데, 우리말에는 “말하다”와 의미는 같되 뉘앙스가 다른 말이 수십 가지는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화자가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 수도 있고, 못마땅해서 구시렁거릴 수도 있고, 시뻘겋게 달아서 닦아세울 수도 있고, 은근슬쩍 꼬드길 수도 있는 거니까. 다양한 우리말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활용한다면 글맛이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번역에서 요구되는 또 한 가지는 두 개 이상의 수식어를 하나의 수식어로 축약하거나 공감각적인 사고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She said very coquettish voice that ~ 이라는 원문이 있다고 치자. 이 예문을 “그 여자가 매우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고등학교 수준의 번역이고 제대로 된 번역자라면 적어도 “간드러진” 목소리 정도로는 옮겨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란” 목소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고. 오역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의미와 느낌을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하지, 사전에 풀이된 대로의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가? 우리말은 서양인들의 말보다 어감의 표현에 있어서 훨씬 더 발달된, 훨씬 더 정교한 말이다. 따라서 원문에 여러 개의 수식어들이 늘어놓여 있더라도 그 의미를 곰곰이 헤아려보면 한 마디로 뭉뚱그리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말은 서양 말보다 훨씬 더 우수하고 어감이 풍부한 말이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다 흔히 범하게 되는 실수 중 하나는 문법에 얽매여 맥을 놓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관계대명사 절이 들어 있는 복문의 경우에 그러한데, 하지만 외국어와 우리말의 구조와 언어습관이 다를진대 굳이 문법이라는 틀에 매일 필요가 무엇일까? 그보다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번역해 내려가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문장의 전반부에 나온 글과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아귀가 맞지 않아 생경스러운 문장이 되기 일쑤다. 그처럼 문법을 무시하는 것은 반칙 아니냐고? 물론 반칙일 수도 있고 엿장수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뒤바뀌지 않는 한 반칙을 썼건 엿장수 마음대로이건 우리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 편히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자는 때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면서 딜레마에 빠져야 한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 놈은 잡고 한 놈은 도망치게 놓아주어야 하는데, 문제는 두 놈 중에서 어느 놈이 더 실하냐는 것이다. 놓친 고기 커 보인다고 이 놈을 잡으려면 저 놈이 더 커 보이고, 저 놈을 잡으려면 이 놈이 더 커 보이고.



이 문제는 결국 직역이나 의역이냐, 즉 단어 대 단어, 문장 대 문장의 번역이냐, 아니면 뉘앙스 대 뉘앙스의 번역이냐 하는 문제로 귀착될 경우가 많다. 원문의 뜻을 곧이곧대로 살리려다 보면 유치하거나 생경스러운 문장이 되기 일쑤고, 엿장수 마음대로 의역을 하려다 보면 이렇게까지 잡아 틀어도 될까 해서 속으로 켕기는 구석이 없지 않다. 그래서 직역이냐 의역이냐를 놓고 따지는 문제는 말은 쉬워도 직접 번역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번역 이론가인 앙투안 베르망이 직역 예찬을 한 이후, 직역과 의역은 해묵은 논쟁이 되어왔지만, 번역은 단순히 직역과 의역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고르고 시제와 어투를 고르는 일이기 때문에 기준이나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번역이란 뉘앙스 대 뉘앙스의 번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원문의 뜻을 사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원문이라는 소재와 틀을 가지고 우리말 번역이라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믿는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구조적 접근법이 필요한 이유는 번역문이 우리에게, 우리의 언어와 정서에 와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처럼 의역을 하다 보면 번역자로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특히 실생활에서는 흔히 쓰이면서도 막상 번역을 할 때는 원문이라는 틀에 매여 잘 떠오르지 않는 어구를 찾아냈을 때 그러한데, 예를 들어 원문에 “After my first novel ended in failure~ ” 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이때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내 첫 번째 소설이 실패로 돌아간 뒤로” 이다. 그러나 “실패로”와 “뒤로”에서 “로”가 겹쳐 영 개운치가 못하다. 그렇다고 “실패한 뒤로”라고 쓰자면 왠지 이빨 빠진 문장인 듯한 느낌이 들고. 하지만 이 문장을 붙들고 얼마쯤 머리를 짜내다 보면 “내 첫 번째 소설이 죽을 쑨 뒤로”라는 정도의 표현이 떠오를 것이고 그럴 때마다 번역자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기왕 하는 일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맛볼수록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자주 맛보려면 번역자들이 독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소설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읽어보고 그 작품들에서 새겨야 할 문장이나 표현 기교를 흡수 동화해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자면 취미로 하는 독서와는 다르게 책을 “쪼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들에는 밑줄을 긋고 다시 익히는 “공부”로서의 독서를 해야 한다. 또 그러는 동안 자신은 왜 그처럼 멋지고 적확한 표현을 하지 못할까 하는 자괴감도 느껴야 한다. 그런 건전한 자괴감을 많이 느끼고 어떻게든 쫓아가보려고 더 많은 노력을 들일수록 번역자 자신의 글도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 어떤 글이 격조 있고 어떤 글이 유치한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제아무리 기를 써보았자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요는, 기초부터 탄탄히 쌓으라는 것이다.



때로는 똑같은 번역이 오역일 수도 있고 오역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도 생긴다. 예를 들어 “We made upstairs.” 라는 문장을 단어 뜻 그대로 “우리는 2층을 만들었다.” 라고 번역한다면 당연히 틀린 번역일 것이다. 원문의 뜻은 “우리는 배꼽 맞추었다(번역이 너무 난했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동님의 <만다라> 끝부분에서, 병 속의 새를 찾던 스님이 마침내 파계하는 모습을 그린 “우리는 2층을 만들었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퍽 와 닿아서 “우리는 2층을 만들었다.”라고 번역했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번역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영한사전들을 보면 미흡한 구석이 상당히 많다. 이것은 영영사전의 풀이를 대부분 단어 식의 풀이로 한정해서 옮기다 보니 영영사전에 실린 미묘한 의미를 적당히 살릴 단어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데, 적어도 번역을 하는 사람은 번역해놓은 문장의 뜻이 원문과 잘 들어맞지 않을 때 영영사전을 뒤져보고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단어를 찾아내려는 노력 정도는 들여야 한다. 특히 추상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져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문장의 경우에는 영영사전을 참조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일 수도 있다.



또 하나, 번역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 중 하나는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어휘력이다. 타고나기를 언어에 지극히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천재가 아닌 한 가용할 수 있는 어휘력은 대부분 들인 노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을 가장 적게 들여 가장 크게 효과를 보는 방법은 국어사전을 통독하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 심심풀이 삼아 국어사전을 통독해 보라. 모르는 단어만 체크하면서 보면 전체를 다 훑어보는 데 몇 달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 노력의 결실은 어휘력의 획기적인 증가라는 보답으로 나타난다.



개개인의 언어력으로 전 세계의 문학을 감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독자들은 번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번역자라면 그 자신의 특유한 문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원저자의 문체까지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란 지난한 일이다. 다만, 번역자가 원서를 여러 번 읽으면 읽을수록 원저자의 문체를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문체도 더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번역자들을 몹시 곤혹스럽게 하는 작가들도 있다. 스토리 텔링은 쓸만하되 문장은 엉망이어서, 심하면 열 번도 넘게 계속 동일 주어와 술어가 반복되기도 한다. 그런 문장들을 곧이곧대로 번역하려면 아무리 잘 하려고 애를 써도 결과는 치졸한 문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번역자의 역할이 한 가지 더 생겨난다. 원저자가 일부러 의도적으로 어눌하고 생경스러운 문체를 쓰려 한 것이 아닌 한, 원문의 듯이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장을 다듬어 독자들이 더 편히 읽고 제대로 된 글에서 더 많은 공감과 감동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원작의 뜻을 잘 포착하고 전달한 번역은 원작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문학성을 발휘하는데, 그런 작품들로 A.슐레겔이 독일어로 번역한 셰익스피어 희곡집이나, G.네르발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괴테의 파우스트나 스콧 먼크리프가 영역한 마르셀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외국 번역 작품들뿐 아니라 국내에도 이윤기 선생의 <장미의 이름>, <그리이스인 조르바>, 이세욱군의 <개미>, <타나타노트>, 그리고 필자가 번역한 <셀프>,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같은 번역은 원작을 능가하거나 결코 뒤지지 않는 번역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번역, 그 중에서도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은 아무나 손댈 만한 일이 결코 아니다. 번역을 하기에 앞서 완벽에 가까운 외국어 해득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우리말을 구사하는 능력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필자의 경우는 번역을 할 때 네 번의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는 독자로서 책을 읽으며 내용을 파악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좀더 꼼꼼히 읽으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백에 적어 넣고, 세 번째는 초역을 하고, 네 번째는 한 차례 더 교정을 보며 우리말에 더 잘 들어맞는 표현을 찾고 말끝 정리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단어를 잘못 보아 엉뚱한 해석을 하는 일이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어떤 단어를 처음에 잘못 보았으면 그 다음에도 계속 잘못 보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입견이란 게 그래서 무서운 것이겠지만. 번역론의 대가이자 번역가이도 한 에핌 에트킨드가 ‘오역 없는 번역은 없다’고 극단적인 말을 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물론 <번역자는 곧 반역자>라는 이탈리아의 옛 속담처럼 번역이 원작과 완전히 같은 것일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날림 번역, 엉터리 번역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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