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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윤양진님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1-11 19:24:15
추천수 0
조회수   2,280

제목

어제 윤양진님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글쓴이

이경인 [가입일자 : 2004-10-27]
내용
좋은 하루 되셨는지요.

어제 올린 글이 파장을 일으킨듯 하여,

먼저 올린 글에 대한 배후설명을 좀 드리고자 합니다..

(글이 뒤로 밀려서 끌어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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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격 하락으로 미치는 나라는 이란을 비롯한 산유국들이 맞습니다. 말씀하신 정보는 아마도 30여년 전, 호메이니 집권 이전에 가능했던 수치입니다. 이전에는 서방의 메이저 오일 컴퍼니들이 아랍의 석유 채굴권과, 또한 그 채굴능력을 담보로 한 사업권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의 발흥 이후, 아랍 국가들은 점차로 석유 채굴권과 그에 따른 사업권을 국유화하기 시작합니다. 사업권이라는 것이 일종의 리스 형식이어서, 무한정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후 갱신을 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아랍 국가들은 기존의 계약보다는 국유화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현재 아랍 석유의 95% 가량은 아랍국가들에 의해 국유화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5% 정도를 다국적 석유기업들이 점유하고 있지요. 석유 메이저들이 오일머니를 컨트롤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습니다. 물론 아직도 판매망을 통해서 엄청난 수익을 얻고는 있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부시를 비롯한 역대 미국정부들이, 민주당, 공화당을 막론하고 석유메이저들의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아랍국가들은 대부분 채굴 능력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재의 딜렘마가 있습니다. 채굴이란 것이 상당한 기술을 요구하는데, 아랍 국가들 자체의 기술력은 채굴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석유 부족 상태에서 채굴을 하긴 해야 하는데, 서방 오일 메이저들이 보기에는 아랍 국가들이 너무나 일방적인 계약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고, 아랍국가들은 서방 오일 메이저들이 지나친 수익을 보장 받기를 원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자신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고 믿기에, 고자세를 견지합니다. 석유값이 고공행진을 하게 되는 데에는 이러한 채굴의 기술적인,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일 머니의 상승은 아랍 국가들의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푸틴의 러시아가 오늘날의 위상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단 두 단어면 족합니다. ‘오일, ‘가스’. 이 둘입니다. 푸틴의 러시아가 향후 지탱할 수 있는 힘도 역시 이 두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아랍국가들만큼이나 ‘오일머니’에 민감합니다.



사족으로 하나 더하면, 이란이 “경제봉쇄 상태에서 석유 안 팔고도 잘 살았던 나라”라는 것은 어떠한 기준인지 궁금합니다. 이란은 호메이니 시절이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 아주 핍절한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페르시아 이후, 보편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란이 “잘 살았던” 때가 있었느냐는 상당히 의구스러운 판단입니다. 제 이집트 친구는 그러한 경우가 없었다고 단언하는군요.



집권당은 하마스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마스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은 가자 지구뿐입니다. 가자지구는 아주 협소한 곳이죠. 길이가 삼십마일 정도, 폭이 십마일이 안 되는 곳에 150만 정도의 인구가 몰려 살고 있습니다. 그네들이 대부분이 살고 있고 영토도 훨씬 넓은 웨스트 뱅크는 하마스의 영향권 하에 있지 않습니다. 팔레스틴의 현 대통령은 아바스인데, 그가 파타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바스를 팔레스틴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죠. 어떤 지도자, 혹은 당이 어떤 나라를 대표하느냐 하는 것은, 국내적이고 국제적입니다. 국내적으로 볼 때, 하마스는 집권당이지만, 국제적으로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마스가 원내 다수당이라는 사실은, ‘기술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팔레스틴 국내 영향력의 범위와, 국제적인 대표성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받아 들여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팔레스틴의 국민들이 뽑은 다수당을 ‘집권당’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의 오만일 수도, 편견일 수도 있으나, ‘실제적’으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실제적’인 역학관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휴전, 혹은 평화 협정을 고착, 퇴행시키는 주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파타와 하마스의 내전이 이스라엘의 시나리오라는 것이 정설”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기가 어렵습니다. “정설”의 기준이 먼저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한데, 만약 그 “정설”이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유력한 언론기관, 또는 연구기관의 일반적인 해석이라면 동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윤양진님께서, 이스라엘이 파타와 하마스의 내전에서 이익을 보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내전을 촉발한 간접요인이라고 한다면, 수긍할만합니다.



파타나 하마스나 이스라엘이 주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전략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이죠. 파타는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인정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이 1967년 이전의 국경선으로 복귀하여, 이전 팔레스틴의 땅과 그 자치권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하마스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 나라를 땅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랍 국가 중에서 이 정도로 이스라엘에 과격한 입장을 취하는 나라는, 하마스나 헤즈볼라와 같은 단체를 넘어서는, 이란이 유일할 겁니다. (시리아는 때로 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파타는 PLO의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의 맥을 있습니다. 아라파트도 처음에는 강경입장이었으나, 결국에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1967년 이전의 국경선 복귀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하마스가 보기에, 아라파트나 파타의 이러한 태도는 비굴한 타협이라는 것이죠. 하마스는 아라파트와 파타를 매국노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타가 보기에는, 이미 국제사회가 모두 승인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한 어떤 국제적인 동의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의 고민에서, 결국 수정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극렬 반대하는 하마스의 존재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장애물이 된다고 판단합니다. 이스라엘과 서방세력으로서도, 이스라엘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파타는 중동문제에 있어서 화약고와도 같은 것이기에, 하마스와 대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기존에 협의된 내용을 하마스가 부정하기에, 파타를 도와주는 게 전략적으로 이익이 됩니다. 그래서 님께서 직시한대로, 가자지구를 봉쇄하면서, 파타에게는 어느정도 유연하게 물자공급을 허용한 것이죠.



그러나, 파타와 하마스의 내전이 이스라엘의 시나리오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내전이 시작된 원인은 아바스가 하마스에게 1967년 국경선 회복이라는 목표를 받아들이길 요구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마스는 이에 불복하고, 아바스는 하마스에서 선출한 수상 이스마일 하니예를 해임합니다. 이때부터 내전이 시작됩니다 (2007년 6월). 귀하의 ‘이스라엘 음모설’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는 파타와 하마스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꼭둑각시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본인들의 전략목표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유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파타와 하마스가 이스라엘로부터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자주적인 단체라는 사실 자체가 부정됩니다. 아마 귀하도 파타와 하마스에게 그런 조롱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나라의 정부요인을 암살하고, 폭격하고 내전을 일으키는 나라로는 구소련, 현 러시아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물론,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본국의 존립자체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세력이라면, 어느 나라나 자신이 허용하는 힘의 범위 안에서 모든 수단을 취할 것입니다. 자국의 존립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는 없으니까요. 슬프지만 인간의 현실입니다. 단지, 하마스의 존재가 이스라엘의 존립에 어느정도까지 심각한 위협을 주느냐는 논의의 대상입니다.

이 부분은 아주 사실과 다릅니다. 팔레스틴이 수니이고 이란이 시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수니와 시아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괴멸이라는 더 큰 목표에 비할 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이란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무기를 대줄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란이 중동지역에서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너무나 많은 저널에 너무나 많은 글이 게재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이슬람이 보는 이 세상은 두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House of Islam이고 또 하나는 ‘House of War’입니다. 전자는 이미 이슬람의 신정통치(Theocracy)가 이루어지는 나라고, 후자는 아직 이슬람 신정체제에 복속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슬람은 후자에 속한 나라를 전쟁상태로 규정합니다. 무력을 써서라도, 그 영토는 ‘House of Islam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지하드는 바로 이러한 분류에서 정당성을 얻습니다. 이란은 이러한 신정체제가 아마도 가장 강력하게 시행되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네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 바로 이 이슬람근본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네들이 보기에 아랍의 많은 나라들이 서방에 물들었고, 특히 이스라엘은 서방의 악의 첨병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대의 적이요, (실제로 the evil, or Satan이라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죠), 걸림돌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보다 자신의 더 좋은 대의명분은 없습니다. 실제로, 이란의 민중들이 지금 아주 핍절한 시대를 견디는 힘이 바로 이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에 대한 증오심입니다. 한 마디 더하면, 이슬람근본주의 (Islamism)의 신조는, 아랍의 몰락은 바로 사탄의 도구인 서방세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네들의 어떠한 내적 동인도 아니고, 오직 서방세계의 침략 (정신적, 물질적)이기 때문에, 서방세계 그리고 그의 주구인 이스라엘을 제거하지 않고는 아랍의 부흥이란 없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이집트의 Sayyid Qutub가 있고, 그의 제자들이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고, 알 카에다입니다)



하마스의 무기는 어디서 났을까요? 먼저 가깝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그리고 이집트입니다. 이 중에 레바논은 헤즈볼라가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네들의 군사장비는 이란이 대준 것입니다. 두 말할 나위없는 ‘정설’입니다. 그러나, 그네들이 하마스를 대줄 능력은 없습니다. 자신도 이란에 빌붙어 사는데, 남을 도와줄 여력은 없습니다. 간접적인 도움은 가능하겠죠. 시리아는 하마스 망명지도자들을 받아 들여준 정도에서 하마스와의 선을 그었습니다. 시리아는 미국의 위협 때문에, 대 놓고 하마스를 도와 줄 여력이 없습니다. 그네들이 원하는 것은, 골란 고원의 반환입니다. 남의 일에 신경 쓸 여력도, 능력도 없는 나라입니다. 요르단은 이 나라들 중에 그래도 가장 온건한 축에 속합니다. 그네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과 빨리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원하기에, 기존의 협상을 깰 어떤 행위도 지원할 의사도, 그리고 사실 능력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집트는 작년 12월에 끝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특히 하마스와의 휴전협상을 이끌어낸 장본인입니다. 하마스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이유가 없고, 실제로 그 동안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또한 무바라크 정부는 이슬람근본주의가 가장 큰 적입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나라들 중에, 사우디는 그럴 의사가 없고, 이라크 물론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결국, 이란밖에 없고, 이란이 하마스에 군수물자를 대준다는 것은, ‘정설’에 속합니다. 이를 부인하는 나라는 ‘이란’밖에 없습니다. 아랍의 다른 나라들도 이란이 군수물자를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대주는 것에 반감을 표시합니다. 이 경우는 시아파인 이란의 세력확장을 경계하는 것이고, 또한 그들의 극단적인 이슬람 체제에 대한 두려움이죠. 만약, 이란도 아니면, 그 좁은, 봉쇄된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스스로 로켓을 생산해낸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겠죠.



이스라엘이 건국이후로 학살을 자행해왔다는 건, 그네들의 정황을 고려한다면 국외자로서의 일방적인 판단입니다. 이스라엘은 적국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괴멸되어야 할 나라였죠. 최근에야, 현실을 감안하여 이스라엘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정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겪는 공포감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네들의 대응은 국가 존망에 대한 위기감에서 나온 자구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주위가 한국의 멸망을 원하는 나라들로 둘러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네들이 도발을 할 때, 그것을 묵과하면 곧 한국의 무능함으로 표출 될 것이고, 도발은 점점 거세어 질 것이고, 종국에는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적인 전쟁이론에 의하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신의 영토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전쟁물자’와 ‘전쟁의지’의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성한 도구를 가지고 있어도, 전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없는 나라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자신들이 ‘전쟁의지’가 있음을 매번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헤즈볼라 학습효과도 있지요. 헤즈볼라와의 전쟁 때, 자신의 ‘전쟁의지’를 명백히 하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는 패전국이 되버렸다는 반성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수상이 곧 물러나게되지요.



우리로서는 국외자의 입장에서, 학살이라는 현상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자신들의 국가가 사라지고, 자신들이 대량 학살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 가운데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보복행위가 과연 자신들이 당한 것이 비례하는 것이냐,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전쟁에는 룰이 있습니다. 그 룰 중에 하나가, 자기가 당한 것 만큼만 보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스라엘의 보복행위는 비례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또 다른 룰이 있습니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민간인을 방패로 삼거나, 민간인을 공격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마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150만이 밀집해 있는 그 도시에, 이스라엘의 보복행위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대량 민간인 학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걸 잘 알 겁니다. 그런데도, ‘휴전협정이 끝나기 전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습니다. 작년 한 해에만 대략 17,000 개 정도의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건 제가 보기에 하마스가 민간인을 담보로 한 도발을 한 것으로 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왜 도발이라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헤즈볼라와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전쟁의지’가 과거와 달리 약해졌다는 판단을 하고, 시험해 본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설령 이스라엘이 보복을 한다해도, 그 보복 과정 중에 반드시 민간인이 학살 당하게 되어 있기에, 국제사회의 여론은 자신들의 편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판단이 섰을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마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삼차대전, 이건 이 사이트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묵시록에 대한 해석인데, 다른 장에서 토론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던 아이들을 방패삼고, 유엔이 금지한 폭탄을 사용하고, 건물에

사람들을 몰아놓고 죽이는 것을 비판하는데” 이 문장은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단체에 한 말인지, 이스라엘에 한 말인지 모호합니다. 아마 둘 다 적용이 될 듯합니다.



“무슬림, 크리스챤,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 아브라함, 다윗, 이삭, 모세,

성모마리아, 예수가 다른 사람이던가요?

왜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신이라고 우기면서

신이 해야할 심판을 서로 신의 이름을 빌어 남을 심판하고 죽이고 있나요?”

이 부분, 역시 이 공간에서 이야기 될 부분이 아닌듯 싶습니다. 간단히 짚고 넘어가면, 무슬림, 크리스챤,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는 다른 신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다윗, 이삭, 모세, 성모 마리아는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위에 말한 세 종교는 모두 ‘계시종교’라고 자신을 정의합니다. ‘계시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 혹은 경험 이전에 ‘신의 계시’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 혹은 경험의 한계 안에 있지 않은 신의 뜻을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서 알려주었고, 그 내용이 바로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그 계시가 ‘토라’를 통해서 이루어졌닫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슬람은 ‘마호멧’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은 서로를 배타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해서 신이 자신을 나타냈다고 믿는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계시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마호멧을 계시의 연속선 상에서 인정하지 않고, 그가 받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시가 계시인 한, 이것은 이성적으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negotiable에 속하지 않습니다. 각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로서, nonnegotiable입니다. 만약 이러한 핵심교리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 종교자체의 존립 근거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러한 대립 가운데 대화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겁니다. 결론만 얘기하겠습니다. 가능합니다. 그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 각자가 진지하게 자신의 종교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대화가 꼭 합의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평화적인 공존이 가능할 겁니다.



“사람 위에 있는 신을 이야기하기 전에 스스로 사람이 먼저 되어야 신을 똑바로 볼수 있지 않을까요?”

위에 열거한 세 계시종교의 입장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먼저 되고, 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anthropomorphism 입니다. 기술적인 용어라서 죄송합니다. 풀이를 한다면,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재단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이백여년 전 Feuerbach가 말한, 종교는 인간의 투사라는 인간중심적 사유방식에 부합합니다. 즉, 실제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이 자신의 사유 가운데, 신을 재단해 낸다는 것이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은 인간의 wishful thought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만약 절대적인 신을 가정한다면, 이러한 사유방식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존재론’이 ‘인식론’에 우선합니다. 즉,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신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신을 드러낸 모습이 나의 인식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 말할 공간 역시 아닌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진지한 유대교 랍비, 기독교 신학자, 이슬람 이맘 에게 세 종교가 동일한 신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공히 No라고 말할 것입니다.

귀하의 결론에 해당하는, “신만 이야기하고 사람이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바로 그 점이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일겁니다. 적어도 서구세계는 계몽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의 일방적인 독주를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작금의 유혈사태에 대해 통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없이는 지금의 사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동료인간이 죽어가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현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후에야, 그 해결책이 보일 것입니다. 작금의 이스라엘, 팔레스틴 문제는 1967년 국경선의 회복으로 양측이 합의를 해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것인가는 추후의 문제이고, 지금으로서는 ‘현실’을 고려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마스와 이란이 이스라엘 자체를 부정하는 한,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의 국경선을 고집하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피만 쌓여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학살’에는 이스라엘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유도한 하마스에게도 동일한 윤리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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