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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30년 전의 추억 ...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8-12-06 17:38:34
추천수 0
조회수   1,331

제목

[펌] 30년 전의 추억 ...

글쓴이

김창욱 [가입일자 : 2000-06-04]
내용
30년 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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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 일이 있은 지 거의 3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버렸습니다. 1970년대 말 즈음의 일이니 말입니다.



그 당시 저는 독일의 한 대학교에서 언어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라 물론 늘 돈이 부족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학생 아르바이트 일거리 중에 제일 보수가 좋은 게 병원에서 밤번 간호 보조원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밤번 간호보조원 자리는 원래 독일의 대학교에서 의대나 간호대를 다니는 학생들이 하도록 되어 있어 정식으로는 자격이 안 되는 처지였지만 저는 약간의 편법(?)을 동원하여 어렵사리 프랑크푸르트 인근 오펜바흐라는 소도시의 한 병원에서 방학 동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간호원을 한다는 게 우리로서는 드문 일이지만 외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제가 속했던 병동은 비뇨기과였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를 못 했습니다. 결국 플라스틱 오줌주머니를 수시로 갈아 주는 일이 제 주임무였습니다. 이 주머니가 가득차게 되면 방광에 압력이 가해져 통증이 온다고 하니 늘 주기적으로 병동을 순회해야만 했습니다. 한번 순회가 끝나면 한 열개 정도의 오줌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어깨에 지고 화장실로 가서 버리곤 했습니다.





남의 대소변을 처리해 주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간호원들이 성심성의껏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저도 어느 정도는 적응을 하게 되었고 또 나름대로의 보람을 느낄 정도도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 탓에 저는 지금도 하얀 제복을 입은 간호원들을 보면 정말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보수도 괜찮고 일도 그럭저럭 할만 했는 데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야간조 담당의사였습니다. 같은 독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이 사람은 심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거였습니다. 물론 저는 그 젊은 의사의 동네북이었습니다.



때때로 이 사람이 치료를 하다가 제게 뭘 가져 오라고 시키곤 했는 데 아직 독일어가 짧았던 저로서는 난감할 때가 왕왕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위나 칼을 가져 오라고 하는 거 같기는 한 데 독일 병원이라는 데가 칼이나 가위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보니 저로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통째로 서랍을 빼들고 뛰어가는 촌극을 벌이곤 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저를 보고는 "너는 아무리 봐도 가짜 학생같다." 등등 제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환자들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 은근히 즐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그 의사만 나타나면 바쁜 척을 하면서 일부러 안보이는 데로 피하고는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간호원들이나 환자들이 따듯하게 대해줘서 그나마 하루하루를 넘길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아마 중도에서 포기를 했을 겁니다.





그렇게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응급환자가 하나 밤중에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파키스탄 사람이었는 데 독일어를 전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영어는 아주 유창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환자가 아마도 Cambridge나 Oxford 같은 데서 유학을 한 듯 보였습니다.) 문제는 그 야간조 의사가 영어를 거의 못 해서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를 않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다른 간호원들도 다 모여서 어떻게 할 지를 고민하게 되었는 데 간호원들 중에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날따라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럽 사람들 중에서 독일 사람들은 생각보다 영어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제가 할 수 없이 나서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환자가 워낙 영어를 잘 하는 덕에 그럭저럭 제 영어가 먹혀서 응급처치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해서 저는 간호원들 사이에서 엄청 똑똑한 학생 대접을 받게 되었고 야간조 의사의 차별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 데 얼마 뒤 더 엄청난 사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밤번 간호원은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일을 하고는 기숙사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침대에 쓰러지는 올빼미 생활이라 사실 좋은 보수가 아니면 사람이 할만한 일은 아닙니다.



어느 날 오전 10시나 11시 쯤 되었으니 한참 잠에 빠져 있을 때였는 데, 갑자기 제 기숙사 방의 전화벨이 계속 울려 할 수 없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졸음에 한참 빠진 채로 전화를 받다보니 병원의 수간호원이었습니다.







"지금 빨리 좀 응급실로 내려 와야겠다. 아주 빨리!"







"무슨 일인데요."







"독일어도 영어도 전혀 안되는 중국인 응급환자가 하나 들어 왔는 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근데 전 중국어 못 하는 데요!"







"중국어랑 한국어 대강 그게 그거 아니냐?"







"아닌데요!"







"여하튼 빨리 옷입고 내려와!!!"







"알았습니다."







응급실로 향하는 제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졸음도 졸음이지만 중국어라고는 전혀 못하는 처지라서 드디어 엄청 똑똑한 학생의 본색이 망신과 함께 드러나는 게 두렵기도 했습니다.







가보니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독일은 교수라는 신분이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일례로 대학병원의 한 과에는 교수가 한사람 밖에 없다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독재자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내과 교수님을 위시해서 의사들이 여러명 모여 있었고 또 간호원들도 한 떼가 운집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병실로부터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중국인 할아버지는 여행 중에 병이 났는 데 다음날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정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노교수님께 저는 한국사람이고 중국어를 전혀 못하니 대사관에 연락을 하거나 다른 중국사람을 빨리 찾아 보는 게 좋을 거라고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의사들과 간호원들 모두 다시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병실에서는 계속 통곡 소리가 이어지고 저는 계속 식은 땀을 흘리고만 있었습니다.







"아, 중국어를 조금만 배워 두었으면 이 순간 정말 대한 남아의 기개를 독일 땅에 떨칠 수 있었는 데..." 참으로 아쉽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 "에라 모르겠다. 죽을 때 죽더라고 한번 시도는 해 보자."라는 오기가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수간호원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 섰습니다. (제 뒤로 수십개의 눈망울들이 병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게 느껴 졌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 때까지 제게 알고 있던 단 두마디 중국어 표현 중 하나를 써 먹었습니다.







"니 하오마!" (이 것 말고는 "워 아이 니"가 제가 알던 중국어의 전부였습니다.)







그 한마디에 그 중국 할아버지는 곶감 먹은 호랑이 마냥 울음을 딱 멈추었습니다. 그러더니 중국어가 속사포처럼 발사되었습니다.







"*&)*&!@#$!(*&8^&^*&$#^$@%$%^%(&(&^)&^%$#@%(%(&^&^)^)))*!!!"







저는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제 등 뒤의 사람들이 저보다 더 긴장을 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 때 저는 펜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큰 글씨를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先生 來日 要手術"







"今日 不可食 不可飮"







제가 쓰는 걸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제 손에 있던 펜을 빼앗고는 來日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더니 明天이라고 쓰면서







"밍티엔?"이라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직감적으로 밍티엔이 중국어로 내일을 뜻하나 보다 생각해서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하오! 하오! 하오!"라고 하시면서 안도의 미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밥도 안주고 물도 안주다보니 자신이 곧 죽는 걸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쯤에서 사태를 마무리짓는 게 상책일 것 같아 병실을 서둘러 빠져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안에 들어 오지 못하고 밖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간호원들이 포옹을 하질 않나 박수를 치질 않나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뭔가 해낸 듯 한 기분에 좋아하고 있었는 데 뒤에서 노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학생, 아까 자네 중국어 못한다고 했지 않은가?"







"아, 예. 저 진짜 중국어를 못합니다."







"그런데 아까 쓴 건 뭔가? 그거 중국 한자 아닌가?"







"예.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자는 좀 쓸 줄을 알아도 중국어는 전혀 못합니다."







"........................."







"교수님, 그게 말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중세에 독일 학자랑 불란서 학자가 만났는 데 의사소통을 라틴어 手記로 했다고 가정하시면 비슷할 겁니다."







"그럼 한자가 아시아의 라틴어란 말이지?"







"예, 거의 그런 셈입니다."







"흠......"







이윽고 교수님이 제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 그 순간 독일의 한 병원에서 정말 영웅됐습니다. (그때 저는 중학교 시절 성질이 곱지 못하셨던 한문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나마 정말 감사 많이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수간호원이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당신 앞으로 방학 때마다 일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만 해. 교수님이 특별지시하셨어!"







그 일이 있고 한학기 쯤 뒤에 저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만 결혼하기 전까지 여름 방학 때마다 다시 돌아와 2년을 더 그 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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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래전 일이라 오갔던 대화에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을 겁니다만 기억이 나는대로 한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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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글들은 제가 자주가는 사이트에 올라온 글인데 재미있어서 퍼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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