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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음반소개들을 해주셔서 저도 한장 소개하려합니다.
제 블로그에 올리고 다시 올리는것이라 존댓말이 아니란점 먼저 양해바랍니다.(__)
lp를 처분하고 다시 시작하면서 지금은 음반이 몇장 없습니다만 요즘 구한 음반하나 소개합니다.
구하기 어려운 음반이라 올릴까 말까하다 음반보다 숨은 우리 포크이야기다 생각하시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포크에 관심을 갖으면서 우리 70년대 포크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된 새로운 뮤지션들이 많다.
대부분 이런분들은지금은 활동을 안하고 계시고 있어
안타갑고그러인해 음반은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요즘 다시 cd로 복각이 유행하여 많은 옛 포크음반을 접할수 있어 그나마 행복하다 하겠다.
그중 기념비적인 음반있다는 음반마다 해설로 설명되어있던것이 있는데 "아..그런앨범이 있었구나 구하기 힘들겠지"하며 포기하던중 모음반 쇼핑물에 나와있어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가격이 10만원정도로 고가였지만 요즘 lp복각으로 발매되는 음반가격도 만만치가 안는지라 과감히 구입해 내손에 들어왔다.
이 음반의 리스트중 각별히 듣고싶었던 뮤지션은 양병집,김광희,방의경님이시다.
아..이분들의 20대 대학생시절 목소리를 듣는구나..감동이었다.
양병집님의 "타복네",김광희님의 "나돌아가리라",방의경님의 "불나무"
이 곡들이 훌륭한것은 모두 자신들의 자자곡들이란점이다.
그중 양볍집님은 지금도 신인 포크 뮤지션 발굴과 음반작업에 활동하고 계시다.
당시 서울대 작곡과시절 양희은님이 불러 먼저 알려진곡 세노야(이곡이 당시 대 히트곡이었다한다)
"가난한 마음"을 김광희님이 작곡한것이다.또 김민기의 데뷔앨범에 피아노연주로 참여한바있다.
당시 엄한 가풍과 서울대작곡과에서도 대중가요활동 금지방침때문에 드러내고 활동을 못했다한다.
양병집님의 데뷔는 서라벌예대 작곡과입학했으나 부모님반대로 가업을 잇고자 증권회사에 취직을했고 포크 콘테스트에 세살 타울의 동생 양경집으로 참가한다.
(고)김광석님이 불러 더 유면한 "역"(두바뀌로 가는 자동차)이라는곡이다.사회 풍자적 가사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에너지가 내면에 충분히 잠복해있는 가객이었다.지금도 그를 3대저항가수로 불리고 있다.
콘테스트에서 1위는 "내님의 사랑은" "한사람"의 작곡가겸 가수 이주원이,그리고 2위는 김민기와김준세(두비두),입상자발표때 양준집을 양병집으로 잘못호명되는 해프닝을 겪게되며서 이름도 아예 양병집으로 바꾼다.
포크팬들의 전설로 불리우는 1세대 포크 싱어송라이터.
솔직히 이분의 음반은 사재복각cd만 소장하고있다.
이분의 불나무를 듣는 순간 충격이었다.양희은 김민기가 최고다라고 알았으니 말이다.
천재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양희은님의 아쉬운 점은 그 당시 자작곡이 거의 없다는것이었다.
과거 YWCA회관내 청개구리라는 청년문화 공간을 이끌었고 그를 빼면 자기 곡으로 음반을 채운 사람은 70년대 없었다고 한다 .
(다음은 퍼온글입니다)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1970년대 명동에는 전설적인 남녀 포크가수가 있었다. 서울 미대의 김민기와 이름도 생소한 이화여대 미대의 방의경이 주인공이다. 방의경이 김민기와 더불어 70년대 청년 문화를 주도했던 주역임을 아는 대중은 별로 없다.
당시 그녀는 한대수, 김민기, 김의철과 같은 저항적인 창작 포크 곡을 불렀던 여대생 포크가수였다. 양희은이 부른 70년대의 대표적인 포크 곡 ‘아름다운 것들’과 김인순, 김세화가 부른 ‘하양나비’ 그리고 ‘불나무’는 대중이 기억하는 그녀의 작품들. 하지만 “데모하는 학생들이 즐겨 부른다”는 이유로 그녀의 노래들은 대부분 방송금지의 멍에를 썼다. 상업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방의경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녀는 서울 서대문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9년 9월 15일생. 부친은 서울 피스톤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한국 최초의 불자동차를 만든 발명가 방응준씨. 어머니는 고아원 아이들의 엄마로 불린 사회사업가 이정순씨다.
서너살 때부터 유행가를 앙증맞게 불렀던 방의경은 아버지 회사에서 최고 스타였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자연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보인 별난 아이였다.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한참 듣다가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비를 맞으며 노는 막내 딸의 기이한 모습에 놀란 어머니는 서울대병원 정신클리닉에 데려가기도 했다.
미동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보다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이상한 아이였지만 합창단에 뽑혀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능을 보였다. 이대부중에 진학해서는 자연과의 대화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이대부고 1학년부터 악보도 없이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대포를 만들라”는 군사 정권의 제안을 거부해 탄압 받는 부친의 고통을 보면서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접한 존 바에즈, 밥 딜런의 저항적인 포크 가락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고 2때 오빠의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만졌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기타를 배웠다.
무대에 오른 것은 1968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하면서부터. 교내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방의경은 정미조와 더불어 이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쌍두마차’로 꼽혔고 학생대표로 월남 위문공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이백천과 작곡가 길옥윤이 OB맥주광고 CM송을 제의해 왔다. 이장희, 김도향과 함께 방의경은 장난삼아 1분 짜리 CM송 시험 녹음에 응했다.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축제때, 작곡가 이봉조가 반주를 맡고 조영남이 심사위원을 했던 문리대 노래자랑대회. 대중적인 노래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 때 딸의 노래를 듣고 감격해 값비싼 야마하 기타 선물로 미안함을 씻었다고 한다. 반주를 맡았던 이봉조는 2옥타브를 넘나들며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방의경의 바이브레이션에 감탄하며 ‘하늘에서 내려준 맑은 음성’이라고 극찬했다.
이화여대 메이데이 때의 일이다. 이봉조는 과 대표로 노래를 한 방의경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웠다. 도중에 “잠깐 들렸다 가자”고 해 따라간 곳은 나이트클럽. 그 곳에는 이봉조 악단의 전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은 방의경은 정중하게 집요한 이봉조의 픽업 제의를 거절했다. 곡가 길옥윤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역시 곡을 쓸 때마다 “이 노래는 방의경 것”이라며 ‘제2의 패티 김’탄생을 꿈꿨지만 실패했다. 길옥윤이 그녀의 대타로 찾은 여가수가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혜은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9년 말 YWCA 멤버였던 방의경은 이백천이 주도한 청개구리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이 시절 김민기는 가깝게 지냈던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는 김민기의 ‘귀하’라는 창작곡을 듣고 음악적 갈등을 겪었다. “김민기의 어둡고 슬픈 스타일보다는 밝고 맑게 세상을 보게 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었다”는 방의경은 1970년 첫 창작곡 ‘겨울’을 시작으로 30여 곡이 넘는 곡을 창작했다. “곡을 만들게 될 때 가슴이 벌렁벌렁 뛰면서 전깃줄에 감전되듯 저절로 가사와 곡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녀는 하루에 몇 곡을 쓸 만큼 창작의 물꼬가 트였다. 1970년 초 이백천과 길옥윤이 주도한 ‘음악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학생들’이라는 캠퍼스 쿠르세이더(학생 십자군)에 참여한 방의경은 김민기, 송창식 등 모든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KBS TV에 나가 한차례 합동공연을 했다.
그 해 가을, 선데이서울 심근수 기자의 요청으로 10여명의 대학가 노래 친구들이 대연각 호텔 옆에 새롭게 문을 연 음악 감상실 ‘내쉬빌’에 모여 단체 인터뷰를 했다. 내쉬빌 주인은 경기고 출신으로 정보국장의 아들이었던 이수일, 기업체 사장 아들 김무영(작고), 가난했지만 음악적 기둥이었던 김유복 등 3명이었다. 최고의 음향시설로 한국 포크의 메카를 꿈꿨던 이들은 상업적인 가수들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창작곡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을 우대했던 한국 포크음악의 숨겨진 개척자들이다. 내쉬빌의 역사는 이들 3인방의 요청을 받아들인 방의경의 개인 리사이틀 무대로 시작되었다.
내쉬빌은 전국에서 무작정 상경 팀들이 모여들며 대학가 포크 싱어 송라이터들의 둥지로 자리잡았다. 어느 날 인기가수 조영남이 무대에 서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내쉬빌은 인기를 위해 활동한 대중 가수들을 거부했던 자존심이 있었다. 방의경은 이곳의 '두목'으로 불리었고 '방의경 아워'가 있는 날이면 관객을 선별해 입장시킬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평론가 이백천은 내쉬빌에 대적하기 위해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를 열었다. 그녀는 "배고픈 음악후배들을 위해 가끔 르시랑스에서 개런티를 받고 노래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방의경은 청개구리 첫 공연과 김민기의 첫 개인 연주회에 찬조 출연하며 활발한 노래 활동을 펼쳤다. 1971년 말 기독교 방송 PD 김진성과 평론가 최경식이 제작한 김민기의 독집음반을 접한 내쉬빌 세 주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자극을 받은 이들은 내쉬빌의 음악을 남기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자고 했다.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각각 녹음을 했다. 당시 방의경은 기타 세션을 자청한 미8군 기타리스트 그레그와 함께 '불나무'를 녹음했다. 내쉬빌 주인들은 수원 시민회관에서 '우리들'이라는 3일간의 역사적인 포크 공연을 기획했다. 방의경은 첫날 공연에 참여했다.
500장 한정 본으로 발매된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노래-유니버샬,1972'은 이때의 음원이 담겨진 소중한 음반이다. 두 차례에 걸쳐 재발매된 이 음반은 김민기의 독집 음반과 더불어 한국 포크 사에 중요한 명반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방의경은 72년 4월 청개구리에서 개인 리사이틀을 필두로 맷돌공연에도 특별게스트로 몇 차례 참여했다. 이후 김진성 PD의 6개월 간 설득 끝에 기독교방송 '세븐틴'의 DJ로 나섰다. 이때 게스트로 나온 보성고 3학년 김의철과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이후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어 인생과 음악적 인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4개월 남짓 짧았던 DJ생활을 그만두고 머리를 식힐 겸 시골로 여행을 다녀오자 성음제작소 나현구 사장이 음반 제작을 청해왔다.
그녀의 유일한 독집음반 <방의경 내노래 모음-유니버샬,1972년>은 포크 팬이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음반이다. 어두운 사회현실을 너무도 맑고 아름다운 은유적인 노랫말로 표현한 11곡은 피끓는 젊은 영혼들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단 한번일지라도 노래를 듣고 나면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이 당시 미8군 가수 장미리는 그녀의 노래에 매료된 동생 장은아를 데리고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가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녀의 노래 '불나무'는 암에 걸린 줄 알았던 환자에게 생명의 불씨를 지펴준 사연으로 포크 팬들 사이엔 유명하다.
박정철 회현동 R레코드 사장은 "방의경 독집 음반은 6년 전 음반 애호가들 사이에 존재유무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귀한 음반"이라고 전한다. 이 음반은 현재 200만원을 호가하며 가요 음반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방의경은 "독집은 녹음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재킷 사진도 레코드사에서 일방적으로 선정해 큰 애착이 없다"고 밝힌다. 독집 음반은 발매 즉시 방송과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시중 음반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그녀의 모든 음반은 칼로 그어져 폐기되었다. " '아름다운 것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노래가 금지됐어요. 데모하다 죽은 학생들의 삶이 슬퍼 지은 '하양나비'도 그렇고 '불나무'도 사전에 없는 말이라며 금지 곡이 되었어요" 어느 날 그녀의 이대 선배인 KBS 라디오 PD가 "펑크 낸 가수의 대타로 노래를 불러달라"며 연락이 왔다. 성질이 난 그녀는 남산의 ‘그곳’을 은유한 '검은 산'을 불러, 그 여파로 프로그램이 통째로 심의에 걸려 취소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감시의 눈길을 받았던 그녀는 홍보협회에 취직해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헬로 코리아'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다.
1974년엔 TBC '5?쳄? 다이얼'의 DJ를 다시 맡았지만 억울한 이유로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DJ를 그만둔 어느 날, 이대부고 동창의 형이었던 장충동 스튜디오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2집 녹음에 들어갔다. 자정을 넘어 통금이 되자 문을 잠그고 비밀리에 밤샘 녹음을 했다. 이때 녹음한 ‘하양나비’, ‘마른 풀’, ‘검은 산’등 30여 곡은 시대의 아픔에 분노하고 슬픔을 어루만진 방의경 음악의 진수였지만 마스터 음원이 분실되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귀한 우리 문화를 경시하고 미국화 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가 싫어 1976년 결혼 후 이민을 떠났다. "미국 땅에서 문화대결을 해보자"는 의욕으로 떠났지만 이민 초기 뉴욕에서 액세서리 물품 보따리 장사를 하며 숱한 고생과 좌절을 겪었다. 1980년 초에는 LA로 건너갔다. 세계적인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그녀가 만든 벨트를 차고 TV에 출연할 정도로 성공을 했지만 84년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1994년 장신구 사업관계로 18년 만에 귀국해 후배 양희은과 함께 KBS 2TV '심야에의 초대'에 출연했다.
방의경은 2002년 초 인터넷 사이트 '윈드버드'에 자신의 게시판이 생겼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그해 11월 다시 귀국한 것은 잊어버렸던 노래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많은 팬들을 확인하곤 감동했다.
그녀는 꽃피우기도 전에 가슴속에 묻어둔 자기 음악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군사정권에 의해 생매장되고 거세된 그녀의 모든 노래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환생하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끝으로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는 최고의 명반중 하나를 소장하고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