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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대때 우리나라의 정세와 국력비교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8-08-06 12:49:11
추천수 0
조회수   8,311

제목

삼국지 시대때 우리나라의 정세와 국력비교

글쓴이

권혁훈 [가입일자 : ]
내용
ohdaihan 님 글



이때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입니다.



서기 221년 유비가 촉나라를 세우고황제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264년 촉이 망합니다.이시기의 우리나라는 고구려 제10대왕 산상왕(재위 197∼227).과 11대왕 동천왕 (재위 227∼248) 특히 동천왕때인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조조의 위나라에 보냅니다.또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위나라의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까지 갔습니다. 12대중천왕(재위 248∼270)때인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신라는 제11대 왕. 조분왕(?~247)과 12대왕 첨해왕(?~261) 재위기간이며

백제는 5대 초고왕(166~214) 6대구수왕(214~234) 7대 사반왕(234) 8대 고이왕(234~286)재위기간이엿습니다.



또한 이때 조조의 위나라의 역사서인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마한.진한.변한.왜인등의 전(傳)이 있어, 동방 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유일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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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hanjr 님 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중국대륙을 삼분했던 위, 오, 촉 세나라의 국력은 어느정도 됐을까? 그리고 인접했던 국가들과 비교한다면 과연 그정도는?

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을 한 가운데 놓고, 그 주변 여러 민족의 역사는 마치 중국사의 부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는 국가 경제력의 근본을 거의 대부분 농업에 의존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농업력과 전쟁수행 능력으로 국력의 정도를 비교해 볼 수 있을 텐데, 이 두가지 척도를 충족시키는 것이 인구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의 많고 적음은 국력을 재는 중요한 척도이지만, 기술발달이 미약했던 그 당시에는 더더욱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이하 정사로 표기)를 주해한 배송지는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어, 당시 삼국의 국력을 비교해볼 수 있게 한다. 먼저 정사 촉서 후주전에서는, 왕은의 촉기를 인용하여 촉이 멸망할때의 국력을 밝혀 놓았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구수 28만 호, 남녀 인구 94만 명, 갑옷입은 병사 10만 2천명, 관리 4만 명에, 쌀이 40여만 휘, 금은 각기 2천근 비단과 명주가 각기 20만 필 등 남은 재물이 이와 같았다.





또한 정사 오서 손호전에서는 진양추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나라가 망할 당시의 국력을 기록해 놓았다.





왕준은 지도와 호적을 접수했는데, 4주 43군 313현에 호구수 52만 3천 호 관리 3만 2천명, 병사 23만명 남녀 인구 230만 쌀 280만 휘 병선 5천여척 후궁 5천여 명이었다.





그렇다면 삼국 중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는 위나라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정사와 연의에서는 위나라의 국력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중국중세사에서 위 오 촉 세나라의 국력을 6:3:1 정도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필자가 접하게 된것은 삼국회요였다. 이책은 청나라때 양신이란 사람이 쓴것으로 삼국시대의 예법과 관직 군사제도 역법 궁중의 전각에 대한 내용등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서정 상편의 기록을보자.





위나라의 호구수는 66만 2423호였고, 인구는 443만 2881명이었는데, 촉을 평정하고 난 뒤 28만 호를 얻었고, 인구 94만 명 장사 10만 2천명 관리 4만명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모두 합하여 호구수 94만 2423호 인구 537만 2881명이 되었다.





삼국중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었다는 위나라 역시 인구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것이다.

배송지의 주해를 근거로 보면 인구는 촉나라가 가구당 3.36명정도, 오나라는 4.4명, 위나라는 6.7명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과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기록들이 나와있다.

고구려본기 보장왕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5부 176성 69만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을 만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라고 하여 고구려가 망할 당시에 호구수가 69만호였음을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다.

또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기에는





본래 나라에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다.





라고하여,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호구수도 명시해 놓았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 역시 3.36~ 4.4명 정도였다고 계산한다면 고구려의 인구는 231만~303만정도 백제는 255~334만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나라처럼 6.7명으로 계산하면 고구려는 462만 백제의 인구는 509만명이나 되는것이다.

결국 우리의 고구려, 백제는 중국의 삼국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던것이다.





벽화에는 더 놀라운것이 남아있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이 광개토대왕에게 8개지역 태수에게 하례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지금의 북경 일대인 유주, 태원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때 고구려는 이미 북경쪽까지 진격해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의 송서 양서의 백제전 기록은 사마염이 세운 서진때 백제가 이미 요서 진평의 2개군을 차지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 남제서 에서는 백제가 대방군 낙랑군 광양군 청주군 성양군 광릉군 등 중국 동부해안 전체를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위상은 최치원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일때는 강병이 100만이었는데 남으로는 오와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어지럽혀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의 실패도 요동정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글은 최치원이 당나라의 대사시중이라는 고관에게 보낸 것으로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실려 있는 상대사시중장 이란 문집의 내용 중 일부이다. 최치원은 이 글에서 철저히 우리를 낯추고 중국을 높이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결코 고구려와 백제의 위상을 과장되게 표현할수 없는 처지에서 쓴 문장인 것이다.

이런 최치원의 글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백제가 어느정도인지 알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400여년의 시차가 있다고 인구증가율을 반영하지 않았다 할 수 있지만 그당시 인구증가율을 감안한다면 그런 반론은 별 의미가 없다. 실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된것은 근세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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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요즘 재밌게 보고 있어서 그 시대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하고 있었나 검색해 봤는데



위와 같은 얘기가 나오더군요...



위 글이 사실이라면 그 시대가 정말 궁금해지네요...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역사가 있는게 아닌지 늘 궁금합니다...



고구려, 백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연구를 해야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



허긴 100년전 역사도 아직 정리를 못하고 있으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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