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폼을 잡다 주차된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어 창피했던 적이 있는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요란한 소리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여고생 한 무리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어 창피했던 적이 있는가? 그런 독자를 위해 이번호 '풋볼위클리'에서는 축구선수 굴욕 시리즈를 준비했다. 이 글을 보고 위안을 삼도록.
10. 네아가, '초딩의 굴욕'
'루마니아 특급' 네아가가 K-리그에 입성했을 당시 한국은 물론이고 루마니아에서도 그의 'K-리그행'은 큰 이슈가 됐다.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그는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 파파라치가 없어 너무 편하다 " 고 할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K-리그에 입성한 후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즐기던 네아가였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바로 성남의 '초딩부대'였다. 성남 시절 엔트리에서 제외돼 한가롭게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네아가는 초등학생 3명에게 사인 공세를 받는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인기를 실감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사인을 해주는 네아가를 앞에 두고 초등학생 세 명이 주고받았던 대화는 네아가를 굴욕에 빠뜨렸다. 그 초등학생 세 명이 주고받던 이야기는 이랬다. " 야, 누군지 몰라도 외국 사람이니깐 사인 받자. " 물론 한국말을 모르는 네아가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른다.
9. K-리그, '알 이티하드의 굴욕'
K-리그 구단과 알 이티하드의 악연은 2004년 시작됐다. AFC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전북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 알 이티하드는 당시 K-리그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성남과 결승에서 만났다. 결승 1차전을 3-1로 제압한 성남은 안방에서 열린 2차전에서 대패하지 않는 이상 우승을 확정짓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 이티하드는 2차전에서 성남에 0-5의 참패를 안기며 우승컵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알 이티하드는 이듬해 부산의 만원 관중 앞에서 성남의 복수를 위해 출격한 홈팀 부산에게도 0-5의 치욕을 선물했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던 K-리그는 알 이티하드만 만나면 작아진다.
8. 이범학, '초대가수의 굴욕'
1991년 '이별 아닌 이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가수 이범학.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에게도 잊고 싶은 굴욕 사건이 있었다. 지난 2005년 부산아이파크의 홈경기에 초대가수로 나선 그는 자신의 최대 히트곡 '이별 아닌 이별'을 부르며 관중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이날 부산아시아드는 텅텅 비어 있었고 이범학이 마이크를 관중석으로 돌리며 " 함께 하자 " 고 외치자 중계를 하고 있던 아나운서만이 그의 노래에 화답했다. 그가 부르는 " 내 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마음 " 이라는 가사는 이날따라 더욱 서글프게 들렸다.
7. 독일, '부산의 굴욕'
야구 도시 부산에서는 미카엘 발락도 소용없었다. 2004년 12월 한국 대표팀과의 친선전을 위해 내한했던 독일 대표팀은 경기가 열리는 부산에 숙소를 정하면서 내심 팬들의 소란을 의식했다. 하지만 이는 안 해도 될 걱정이었다. 해운대에서 유유히 러닝을 해도 독일 대표팀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팀 보로프스키, 케빈 쿠라니, 티모 힐데브란트, 아르네 프리드리히, 루카스 포돌스키 등 독일의 스타 플레이어들은 마치 해운대를 통째로 빌린 듯한 화보성 사진으로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알렸지만 이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해변을 거니는 모습이 측은하기까지 했다. 리옹 역시 2007년 피스컵 출전차 부산에 왔다 굴욕만 당하고 갔다.
6. 루니, '뉴욕의 굴욕'
본 잡지 49호를 봤던 독자라면 고개를 끄떡일만한 사건이다. 2006년 12월 나이키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들른 웨인 루니는 '꼬마 취급'을 당했다. 덩치 큰 미국의 힙합 뮤지션과 농구선수들 사이에서 친구 한 명과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던 루니를 알아봐준 사람은 한국 대표로 참석한 가수 다이나믹 듀오와 지누션의 멤버 션 뿐이었다. 당시 루니를 만난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는 " 루니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시무룩하게 서 있는 모습이 웃겼다 " 고 회상했다. 아무리 축구에 대한 인기가 시들한 미국이라지만 루니의 충격은 어지간했겠는가.
5. 콘세이상, '작업의 굴욕'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미드필더 세르지오 콘세이상은 2002 월드컵을 맞아 한국의 최고급 호텔에 묵었다가 그 호텔의 미용사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그 한국 여성이 일하는 호텔 미용실에 매일 들러 길지도 않은 머리를 깎고, 또 깎았다. 수줍은 많고 외모도 평범한 그 여성은 결국 콘세이상의 프러포즈에 대해 " 관심 없다 " 며 거절했고 콘세이상은 집요하게 작업을 걸다 결국 팀의 조별예선 탈락과 함께 짐을 싸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98/99시즌을 앞두고 1,000만 달러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라치오로 이적한 세계적인 스타치고는 너무 큰 굴욕이었다. 당시 한국 여성의 눈에는 '김남일'만 축구선수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4. 지단, 'CF의 굴욕'
아디다스 광고 모델로 100억 원이나 받았던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부산의 한 병원 광고에 등장했다. 지단은 2002 월드컵 직전, 한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차 부산의 한 병원에 들렀다. 이 병원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축구 스타에 놀란 것은 당연지사. 결국 병원 측에서는 " 치료를 받기 전 기념사진을 한 장 찍자 " 고 제안했고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부터 고등학생까지 이 기념사진에 동참했다. 물론 여기에서 일이 끝났다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일이었지만 병원 측은 이 사진을 자신들의 병원 광고에 넣어버렸다. '정기점진을 받자'는 문구와는 무관한 700억 원 몸값의 지단은 사진 속에서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웃고 있었다.
3. 파디가, '금은방의 굴욕'
2002 월드컵을 위해 한국에 입국한 세네갈 국가대표 파디가는 발 대신 손을 잘못 놀려 굴욕을 당했다. 동료선수 5명과 함께 목걸이를 산다며 대구의 한 금은방에 들어간 파디가가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진열대에 있던 시가 30만 원짜리 18K 목걸이 1개를 훔쳤고 이튿날 도난 사실을 발견한 주인의 신고로 CCTV 판독 끝에 경찰에 검거된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보였어야 할 운동신경을 대구의 한 금은방에서 선보인 파디가는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지만 " 피해 정도가 경미하고 본인이 반성을 하고 있다 " 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또한 절도를 당했던 금은방의 주인은 " 세네갈의 16강 진출을 기원한다 " 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순금 1돈짜리 복돼지가 달린 핸드폰 줄을 파디가에게 선물해 훈훈한 감동을 전했다. 한국인의 정이란 이런 거다!
2. 우루과이, '조기축구의 굴욕'
남미의 전통적인 축구 강호 우루과이 축구대표팀이 한국의 조기축구에 망신을 당했다. 2002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천안연수원에서 컨디션을 점검하고 있던 우루과이는 삼성SDI 천안공장 축구동호회를 초청해 가볍게 몸을 풀 요량이었다. 하지만 '한국 조기축구의 힘'은 무서웠다. 알바로 레코바, 다리오 실바, 파올로 몬테로 등 스타플레이어가 총출동한 우루과이를 상대로 2골이나 뽑아낸 것이다. 비록 이 조기축구팀은 우루과이에 2-5로 패했지만 우루과이 기자들은 골을 넣은 직원의 이름과 나이를 묻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대리의 드리블과 최과장의 슈팅은 우루과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1. 케즈만, '용산의 굴욕'
인터넷 상에서는 이미 전설이 된 사건이다. 2005년 11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선수단이 한국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르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케즈만은 PSV 에인트호벤 시절 박지성과 이영표의 팀 동료로 국내에서도 인기 상종가를 달리고 있어 국내 축구계는 시끌시끌했다. 그가 입국한다는 소식에 국내의 언론과 팬은 인천국제공항에 진을 칠 정도였다. 하지만 용산 전자상가는 냉정했다. 훈련도중 짬을 내 선수단 일행과 용산을 찾은 케즈만은 구름같은 인파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용산의 '삐끼'만이 그들을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a 박찬호, '논산의 굴욕'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그해 10월 4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박찬호. 당시 최고의 스포츠 스타답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부대 내에서도 관심사였고 수요일 벌어지는 '전투체육'을 이용해 훈련소 내에서도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장병 간의 야구시합이 바로 그것. 박찬호는 이날 '깍두기'로 양 팀 18명의 타자를 모두 상대했고 이를 보기 위해 부대 내의 '높으신 분'들도 모두 총출동했다. 그런데 이때 차마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한 훈련병이 박찬호의 공을 강타해 홈런을 쳐버린 것이다. 비록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를 상대하던 때의 힘을 100% 발휘한 것은 아니지만 타자를 비롯한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술자리에서 박찬호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고 주장하는 당신의 직장 선배가 있거든 무조건 거짓말로 몰지 마라. 진짜일 수도 있다.
[풋볼위클리 52호 (08/05/19-08/06/01)에 게재된 글입니다.]
풋볼위클리 김현회 기자 90minutes@football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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