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줌마 생각이 나 글을 씁니다.
아내는 제가 대학재수할 때 만났습니다.
만난지 7년만에 결혼했는데 양가 집안에서 무척이나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의 집에서는 특히 누님의 반대가 심했고,
아내의 집에서는 처형의 반대가 심했지요.
처형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라 외출 자체를 막았습니다.
제가 당시 무직이라서 동생 고생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아내될 사람이 효성이 지극하니
다른 부족한 점은 접어 두고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결국 승낙을 받았습니다.
선친은 효도라고 하면 깜박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이다고 평소 생각하신 까닭입니다.
실제로 결혼 후 선친은 딸보다 며느리를 더 챙기셨고,
모든 일을 며느리와 상의하셨습니다.
아내도 이런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잘 따르고 성심껏 모셨습니다.
결혼 후 아이만 둘 만들어 놓고 저는 군에 입대하고,
아내는 저 없는 집에서 마음 고생 몸 고생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큰 딸이 뇌성마비여서 그 먼길을 매일같이 업고 물리치료를 다닌 게지요.
한 놈은 앞에 안고, 딸 쌍둥이였습니다.
한 놈이 울면 다른 놈도 잘 놀다가도 같이 웁니다.
정신없는 시간들이 지나 갑니다.
남편이 군대가고 없으니 시부모님에게서 생활비를 받아 쓰는데
그 심정이 어떨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같이 편지로 위로하는 것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고,
아내라는 존재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보다 편하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깝습니다.
있어도 있는지 모르는 그러나 없으면 아무도 없는 것같은
그래서인지 몰라도 마음에도 없는 상처주고
그러다 어릿광대놀음으로 겨우 달래고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 옵니다.
아내라는 존재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그래서 알지 못하는 사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생명과도 같은 그런 존재로 그렇게 그렇게 되어 가나 봅니다.
젊은 시절의 푸풋함은 오간데 없고 이젠 완전 중년 아줌마가 되었으니
오랜 세월을 같이 한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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