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쯤 전 이곳에 ‘덜어내는 감각으로 구성한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일본 오디오 평론가 스가노의 ‘오디오 연주가론'을 신봉하던 저에게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글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금전적으로 너무 고가의 오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 소유물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글쓴 이의 선택은 ‘덜어내는 감각’으로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들 ‘다운 그레이드'라고 부르는 과정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승화시킨 글쓴 이의 시스템을 보면서 저는 부끄러워졌습니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행동으로 옮기질 못해서 그렇지 가치관 하나 만큼은 저 역시 글쓴 이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글쓴 이를 사적으로도 알고 지내면서 그분의 언행을 곁에서 지켜 본 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시스템 자랑은 고사하고, 소개기라고 하기도 뭣합니다. 덜어내기는 커녕 더 채우고야만 사람의 부끄러운 자기 고백이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당한 평가일 것 같습니다. 그 점 염두에 두시고 부족한 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덜어내는 감각'으로 시스템을 재구축하신 한 와싸다 회원분의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그 글은 제 마음을 ‘움직였’고, 저 또한 잠시나마 스스로 시스템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순전한 착각이었음을 알게 해준 이는 제 손으로 만들어준 이전의 시스템을 완전히 갈아 엎고 지금의 판을 다시 짜준 최성근씨였습니다. 예, 이곳에서 여러 모로 이름 높은 바로 그 친구죠.
마니아. 물 건너 온 이 말의 뜻을 알기 위해선 사전을 찾아보기 보다는 이 친구가 오디오를 위해서 벌이는 이런 저런 짓들을 보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 정도로, 오디오에 빠져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만큼 최성근씨는 오디오를 덜어내고 싶어하는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지금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최성근이라는 사람은 오디오 마니아니까요.
또 스가노의 이야기를 해야 하겠군요. 스가노를 비롯해서 일본의 오디오 평론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교적 색채가 짙은 나라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계율 때문에 오랫동안 육식이 금기시 되어 왔던 터라 서구화와 근대화를 동일시했던 메이지 유신이 단행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한 사무라이가 황궁에 뛰어들어 격렬하게 정부를 규탄했습니다. 정권을 쥔 자들이 서양 오랑캐들의 습속을 본받는답시고 황송하옵게도 천황에게 고기를 바쳤다는 것이 이유였죠.
불교는 육식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욕망에 대한 생각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모든 욕망이란 부질 없다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지만 출가한 이들조차 알면서도 이르지 못하는 그 경지를 하물며 속세에서 굴러야 하는 우리네가 넘볼 순 없겠지요. 그래서 일본인들은 욕망을 긍정한다기 보다는 ‘굴복'합니다. 무언가를 탐내고, 소유하고, 싫증 내고,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허무'라는 말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인 모양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에 끊임없이 빚지는 것을 뜻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스가노처럼 ‘하이엔드 오디오'를 평하는 일본의 오디오 평론가들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가치관입니다. 그들은 오디오를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존경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존경이란 그들이 오디오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덜어내거나, 또는 거기에 쏟는 에너지를 남들을 위해 돌릴 때에야 비로소 바쳐질 수 있습니다.
스가노가 스테레오 사운드에 연재하는 레코드 연주가 탐방에서 거의 매번 이런 이야기들이 화제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대체로 넓고 호화로운 리스닝 룸에 값비싼 오디오를 들여놓고 소리에 대한 고담준론을 늘어놓는 레코드 연주가와 스가노가 속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이런 가치관에 동의하고서 취미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가노와 그가 방문한 레코드 연주가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열심히 일한 당연한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에도 빚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오디오 마니아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제 주위로 범위를 한정하면 한국 오디오 마니아들의 가치관은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의 무한한 추구 역시 정당시하는,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발전시켜 온 그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한 최성근씨는 소누스 파베르의 크레모나를 중심으로 해서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바로 그 시점부터 저에게 더 높고, 그래서 더 넓은 시야를 보장하는 웅장한 산봉우리가 있노라고 충동질해댔습니다. 그를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홀딱 넘어가 놓고서 자기 꼬신 놈 나쁜 놈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비겁한 변명'이니까요.
자, 여기에 덜어내기는 고사하고 결국 더 채워넣고야 만 제 시스템이 있습니다.
최성근씨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화근은 바로 영국 굴지의 하이엔드 오디오 회사 린이 지금까지도 ‘이것보다 더 좋은 CDP를 만들 자신이 없어서’라고 후속기의 제작을 채근하는 이들에게 대답하는 CD 12였으니까요.
‘무거운 놈일수록 소리가 좋을 확률이 높다’와 함께 가장 적중률이 높은 오디오 속설 가운데 하나가 ‘덩어리가 많을 수록 소리가 좋다’일 겁니다. 파워 앰프는 모노 블럭일 수록, 프리 앰프와 소스 기기는 전원부가 별도일 수록 소리가 좋은 경험을 많이들 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속설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몇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이 CD 12입니다. 이 일체형 CDP는 여러 가지로 보고, 듣는 사람의 예상을 비웃는데 두 개의 알루미늄 덩어리를 이어붙인 섀시 역시 그렇습니다. 날렵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이 CDP는 대단히 묵직합니다. 눈으로 보았을 때의 날렵함과 손으로 그것을 들어 보았을 때의 묵직함. 이 감각은 그대로 이 기계가 들려주는 소리에 적용해도 무방합니다.
소리의 선이 얇다든지, 저역의 펀치감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평가는 완전한 오해이거나 세팅이나 매칭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CD 12는 매끄러운 소릿결과 권위감 있지만 산뜻하기까지 한 ‘기묘한' 매력을 지닌 저역을 들려주는 CDP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트랜스포트와 DAC으로 이루어진 마크에 비해서 아무래도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해상도 역시 더 높은 점수를 주면 주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이 CDP를 시험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더군요. 제가 할 일은 오디오 디자인에 구현된 가장 인상적인 미니멀리즘의 하나인 CD12의 조작 스위치 하나 없는 전면을 지그시 눌러 트레이를 끄집어내 거기에 CD를 얹고 스피커의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리모컨의 플레이 스위치를 누르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CD12를 들이고 음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제게 최성근씨가 이 게시판에서 잘 쓰이는 용어를 빌자면 틈만 나면 ‘뽐뿌’를 해댔습니다. 제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글을 읽어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최성근씨의 뽐뿌 신공을 비껴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혹이란 기본적으로 유혹당하는 이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것이지, 애초에 그 사람의 마음에는 있지도 않은 욕심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CD12로 소스 기기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제 리스닝 룸에는 늘씬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크레모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크레모나가 놓여 있던 두께 5cm의 대리석 위에는 피크 컨설트의 인코그니토 X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이엔드 오디오계에서 요즘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의 하나인 피크 컨설트는 스피커 유닛 제조사인 스카닝과 밀접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카닝이라는 유닛에 대해서 저는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쪽이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겁니다. 매우 뛰어난 물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음악성에서는 고개가 갸우뚱 거려진다는 것이 이 유닛을 채택한 스피커들을 들을 때마다 제가 내렸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지 제 리스닝 룸에서 제가 애지중지하는 크레모나를 몰아내고 싶어하는 최성근씨는 ‘지금껏 들은 스카닝 유닛을 채택한 스피커가 어떤 것이었든 피크 컨설트는 그 이상을 들려준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추천사를 확신에 가득 차서 되뇌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피크 컨설트를 수입사의 쇼룸에서 듣게 되었죠. 최성근씨의 열정에 감복되어서라기 보다는, 적어도 오디오에 관한한 이 사람이 이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경우에 사실과 어긋나는 경우는 별로 없더라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배신당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제가 들은 건 ‘그 이상의 그 이상'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저를 흥분시킨 것은 이 스피커를 제 리스닝 룸으로 가지고 가면 수입사의 쇼룸에서보다 훨씬 더 좋은 소리를 뽑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80kg이 넘는(페어가 아닌 한 짝의 무게가 이렇습니다) 거구를 겨우겨우 세팅해 놓고 스윗 스팟에 앉아 소리를 듣기 시작하자마자 그 믿음은 이루어졌습니다. 제 시청공간으로 무대를 한정한다면, 단언컨대 저는 인코그니토 X가 첫 음을 토해내는 그 순간보다 더 황홀한 소리를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정보량, 하지만 그것을 감당케 해주는 유연한 소릿결, 투 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깊고 힘있게 떨어지는 저역을 가진 이 스피커는 불이라도 끌라치면 심지어 제 존재를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은신술까지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율과 희열에 사로잡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의 임자인 최성근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프리 앰프를 바꾸면 더 나은 소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저를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죠. 크레모나와 함께라면 계속 가고 싶은 단짝인 첼로 프리였지만, 피크 컨설트에게는 더 걸맞는 녀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리스닝 룸의 불을 켤 때면 저 역시 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파워는 고정. 설혹 제가 또 다시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 있더라도, 소닉 크래프트의 오퍼스 파워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랙의 자리가 다른 기기로 채워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스피커를 울린다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소스와 프리를 거친 신호를 잡티 하나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미션 임파서블을 해내는 이 파워에 붙일 스피커가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면 오퍼스를 한 대 더 사서 멀티로 구동하는 일은 생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첼로의 대체자로 일찌감치 낙점되었지만 상태 좋은 중고를 구하지 못해 애먹었던 프리, 제프 롤랜드의 코히어런스입니다.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제프의 프리 앰프 군에서 플래그 쉽이었던 코히어런스는 배터리 구동이라는, 지금까지도 전원에 관한한 리제너레이터 방식과 함께 궁극의 기술로 손꼽히는 방식을 채택하는 바람에 찬사와 불평을 동시에 받은 앰프입니다.
제프 특유의 잡티 하나 없는 정숙성을 극한에 가깝게 구현하면서도 전혀 인공적이지 않은 세련된 음을 들려주지만 배터리로 구동되다 보니 다루기가 까다로운 것이 흠이죠. 잘 알려진 것처럼 배터리란 물건은 천수가 정해져 있는데, 이렇게 값비싼 프리 앰프 안에 든 배터리가 운명하셨을 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용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프리 앰프를 코히어런스로 교체하고 나서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됐을 때에 인코그니토 X가 들려준 소리는 그간의 모든 고생, 특히 ‘대출도 쇼핑처럼 쉽고 빠르게'라는 노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정신상태로 저를 몰고 간 처참한 통장 잔고를 잠시나마 잊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감탄한 것은 여기에서 하나라도 바꾸면 이 대단한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게 만드는, 안정감과 조화였죠.
마침내 대단원의 막이? 글쎄요. 오디오 취미란 것이 저 혼자 설 수 있는 하나의 세계라면 대단원이란 그렇게 쉽게 찾아오기 힘들겠지요.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디오 악세사리 제조업체로 시작해서 지금은 스피커도 만들고 있는 타옥의 스파이크 슈즈와 받침대가 그것입니다.
타옥은 토요타의 세계 전략에 일익을 담당하는 종합 주물 메이커로 강성이 높고 제진성이 뛰어난 주철을 이용한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주철이라는 소재의 기능과 특징을 오디오에 접목시킨다는 발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일본 기업문화의 저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오디오 악세서리들을 경험해 본 제가 이런 용도의 물건들을 선택할 때 적용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소리를 ‘격변'시키는 물건은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넘치는 저역을 허리띠로 졸라매듯 한다든가, 고역의 개방성을 극대화시킨다든가, 받쳐보니까(또는 올려 놓으니까) 해상도가 확 올라갔다든가 하는 악세사리들을 저는 좀 위험한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부족한 부분을, 불만스런 부분을 이런 물건들로 튜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변화된 소리가 과연 기기 자체의 순수한 소리를 얼마만큼 살려주었을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늘 정해진 수순이었거든요.
그런데 타옥의 악세사리들은 기존 시스템의 소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개성과 미덕을 더 깊고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더군요. 소리가 개선되었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서 어리둥절해 있다가 나중에야 ‘아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깨달았던 것은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악세사리들을 기기에서 빼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기기를 이 악세사리들에 올려놓는 순간 이것들은 더 이상 악세사리가 아니게 되니까요.
자, 이쯤에서 해괴하다면 해괴한(재미는 없고 길기만 하다는 점에서 특히) 이 글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마무리를 해볼까 합니다.
정격음악 운동의 개척자이자 저명한 지휘자인 아르농쿠르는 우리 말로도 번역된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즉, 장식으로서의 음악은 우선 첫째로 ‘아름다워'야만 한다. 음악은 결코 껄끄러워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현대의 음악은 보다시피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음악은 여타 예술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정신적 상황에 대한 진지하고 가차 없는 비판이 단지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아바도가 빈 필을 지휘한 쇤베르크의 <바르샤바로부터의 생존자> 만큼 아르농쿠르의 말을 뒷받침하는 음악적 증거물은 찾기 힘들 겁니다.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군상과 합창, 이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수용소 관리의 외마디 소리들이 소름 끼치는 오케스트라의 울부짖음과 뒤엉키는 이 음악은 분명 지옥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악단이 빈 필인 것을 감안하면 이건 정말 믿기 힘든 일입니다. 그전까지 아바도를 재주 있는 음악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저는 이 음반을 듣고 나서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가 이미 70년대 후반에 프로코피에프의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통해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오디오는 과학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또 한 편에는 오디오는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그래서 과학적 이론의 틀로는 완전히 포획할 수 없다고 믿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오디오는 과학이지만 동시에 예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수공업 전통과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 되는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션에서 뿐만 아니라 오디오에서도 힘센 나라의 대열에 서 있는 이탈리아의 공업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2차 세계 대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공업, 특히 군수공업은 현대의 싸움터에서 이루어지는 가차없는 대량소비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공업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탈리아제 항공기 엔진은 예술품이었지만, 몰타와 벵가지의 상공에서 소모된 항공기와 맞먹는 비율로 교체 항공기가 생산 라인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에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멋과 품격을 따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군대의 전통은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쟁터에는 걸맞지 않은 것이어서, 화려하고 그래서 눈에 띄는 군복을 빼입은 프랑스의 장교들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저격수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멋과 품격을 따지는 수공업 전통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오디오 제품들은 저 같은 마니아의 좋은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시장을 염두에 둔 ‘가전제품'에 비하면 터무니 없는 값이지만 거기에는 대량 생산품에서는 찾기 힘든 개성과 멋이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소유'하고 있는 기기들은 그렇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해도 오디오란 물건은 음악을 들을 때 비로소 가전기기 이상의 그 무엇이 됩니다. 음악이란 모든 위대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 그렇듯이 듣는 이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일깨우고,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과연 계속해서 씌어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에 많은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통해 온 인류가 사랑과 평화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노라고 화답해 온 것처럼요. 아바도의 <바르샤바로부터의 생존자>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답지 않은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아르농쿠르의 말처럼 20세기에 씌어진 이 현대음악은 아름답지 않은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음악은 아름답습니다.
CD12가 읽어들인 쇤베르크의 음악이 코히어런스와 오퍼스 파워를 거쳐 인코그니토 X의 투웨이 유닛을 사정없이 쥐고 흔들기 시작합니다. 소름이 끼칩니다. 언제나처럼. 이 오디오 기기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소유'한 이 ‘기계'들이 기계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것들은 제게는 레코드 연주기이고, 소리만이 아닌 작곡가와 그것을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음악가들의 뜻과 감성을 전달해 줍니다.
그것을 듣는 저는 비록 지금은 덜어내지 못하고 채우려고만 들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음악의 힘을 빌어 남을 위해 덜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희망을 심어줍니다.
CD12와 코히이런스 프리, 오퍼스 파워, 인코그니토 X가 들려주는 음악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레코드 연주기들이 들려주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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