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취미가 아닌 '일'로 음악을 듣다보니 점점 더 계측기화되어가는 시스템을 갈아엎는 가운데 파워 앰프를 사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내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저 파워 앰프를 내놓으신걸 보고 전화 드립니다’ 보다는 ‘이 불쌍한 소년’쪽이 훨씬 어울릴 대사일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시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당신 고수지?”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강호물을 먹어 본 저는 전음(傳音)을 통해서까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공력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알게 된 최성근이라는 고수와 함께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구축한 것이 이제부터 소개할 시스템입니다. 시스템 소개에 앞서 이 시스템의 설계자인 최성근씨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한마디로 고수는 고수인데 정파도 사파도 아닌 독야행(獨夜行) 근성의 인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전하는 무공은 독고구검이나 규화보전 같은 폼나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추석 특선 영화로 ‘쿵후허슬’을 보신 분이라면 가장 눈에 띄는 무술이 하나 있으셨을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함마신공 -_- 최성근씨가 구사하는 무공은 위력은 무시무시하되 비주얼적으로는 영 보기에 착잡한 그런 성격의 것들입니다.
허나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효과는 확실한데, 그가 시전하는 무공의 가장 큰 특징은 흡혈귀 뺨치는 수준의 달콤한 유혹입니다. 최성근씨는 시스템의 소유자보다 그 시스템의 장점과 단점을 꿰고 있다가 자신이 뽐뿌하기로 점찍은 장소로 유인한 다음 상대방의 오디오에 대한 욕정에 불을 당깁니다. 만일 그가 음악이 아닌 오디오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 넘어갈 도리가 없게끔.
그래도 언제나 오디오를 음악을 듣기 위한 기계로 생각해 온 저는 지금도 자신이 설계해준 시스템을 이쯤 해서 갈아 엎으라는 최성근씨의 전음에 이렇게 대응합니다.
“아니, 스승님. 왜 아직도 바닥을 기어 다니세요? 기혈이 뒤틀리기라도 하셨나요?”
자, 시스템의 구축자이자 파괴자를 자처하는 기연(奇緣)의 소개는 이쯤으로 하고 본격적으로 시스템 소개를 하겠습니다.
시스템 전경입니다
일본인들이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구입한 이래 오늘까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아가고 느끼고 있는 스피커, 소너스 파베르의 크레모나입니다
대개 스피커 그릴은 더스트 커버라는 기능 외에는 음질적으로 오히려 해가 되는 데 비해 그점까지 감안해 튜닝의 일부로 기획된 크레모나의 그릴은 디자인적으로도 화룡점정의 역할을 합니다.
크레모나의 스피커 단자부입니다. 소너스 파베르의 스피커들이 통울림을 사용한 '악기' 개념의 스피커라는 속설이 지금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크레모나에 한정시켜 말씀 드리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클로저도 그렇고 보시고 있는 스피커 터미널 부위조차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스피커가 들려주는 잡티 하나 없는, 오로지 음악만이 들리는 소리의 원동력입니다.
단순히 크레모나를 울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스템의 중추인 오퍼스 파워입니다.
이 파워의 가장 큰 미덕은 중립성입니다. 그러나 그 중립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같은 무책임한, 기계적인 중립이 아닌 다른 컴포넌트들이 제 색깔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순백의 무대를 만들어 주는 적극적인 중립입니다.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이만한 성능의 파워가 언뜻이 아니라 아예 떠오르지 않는 탁월한 가격대 성능비를 자랑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파워앰프의 진가를 논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까지 할 것입니다.
오퍼스 보다 훨씬 고가의 외국 하이엔드 업체의 파워가 몇 종인가 리스닝 룸을 들락거리는 와중에도 여전히 오퍼스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가격대 성능비 때문이 아닙니다. 오퍼스는 가격대 성능비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소리를 이 파워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에 '선택된' 것입니다.
지금껏 써 본 '국산' 오디오가 아닌 '오디오 제품' 전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마음에 드는(물론 이쯤에서 성능에 비해 가격이 헐하다는 사실이 아주아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제품의 하나입니다.
오퍼스가 제공하는 순백의 무대에 색을 입히는 존재, 첼로의 1메가 옴 프리 앰프 입니다.
즐겨 듣는 피아노 음악의 재생이 오디오 단품 구입과 시스템 구축에서 언제나 최우선의 과제인 제게 1메가 옴은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금고 손잡이 같은 볼륨의 감촉은 사용자로 하여금 음악의 문을 여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데, 실지로 명기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이 프리 앰프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음 하나하나에 서려 있는 영롱한 광채는 성인의 후광처럼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기는 커녕 되려 풍경을 좀 더 또렷하게,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소스부는 마크 37L과 360SL, 37L에는 심포지움의 롤러 블록을 붙였습니다. 음이 한층 더 첨예해지면서 더 부드러워진다고 하면 말 그대로 모순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바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취미의 세계에서 반드시 벌어져야만 하는 일일 것입니다.
SACD를 듣기 위해서 들인(서브 CDP가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SACDP, 소니의 SCD-1 입니다.
SACD라는 포맷 자체가 멀티채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된 데다, 듀얼 픽업 시스템을 채택하는 바람에 최초의 SACDP인 SCD-1은 멀티 채널 신호가 들어간 SACD를 읽지 못하고 소스를 읽어들이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어렵사리 구한 최신 버전의 롬이 박힌 칩으로 무장한 제 SCD-1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
멀티 채널을 지원하는 최신 하이브리드 SACD들을 아무 문제 없이 읽어 들이고, 로딩 속도도 제가 지금껏 봐온 어떤 SCD-1 보다도 빠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기념비적인 SACDP는 SACD 소스에 관한한 아직까지 레퍼런스급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음반입니다.
제목에도 썼다시피 오디오는 바로 이 음반들을 들을 때에 비로소 가전기기 이상의 물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오디오 평론계의 천황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스가노가 실연과 재생음악을 각각 별개의 세계로 파악하고, 오디오 파일이 아닌 오디오 연주가 탐방을 기획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오디오는 음악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오디오에 얽매여 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이 다가오더군요.
그 때 스가노의 오디오 연주가론이 제게는 어떤 돌파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기야 취미의 세계에서 '합리성'을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겠지요. 취미란 언제나 불합리의 비옥한 토양에서만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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