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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습니다.
두 팔에 완충비닐로 감싼 스피커 궤짝 두 덩어리를 안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
내 자리엔 지난주 초부터 이미 준비해 둔 전원선과 스피커선, 케이블들,
집에서 가져다 놓은 인티 앰프와, 지난 주말 구입한 CDP가 대강 자리를 잡고 놓여 있습니다.
팔을 겉어붙이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낑낑 대며 전원선을 잇고
앰프와 CDP를 인터커넥터선으로 연결하고
스피커선의 피복을 벗기고, 손으로 공들여 정교하고 구리선을 꼬아 단단하게 만들고
앰프의 단자에 넣은 후 덮개나사를 적당한 체결감이 들 때까지 돌립니다.
스피커의 자리를 잡고, 꼬아놓은 스피커선의 양 끝을 역시 극성에 맞춰 꽂은 후 고정시킵니다.
스피커의 보호 그릴을 벗겨 장 속에 넣어두고 한 두 걸음 물러나 숨을 크게 쉬며 바라봅니다.
CDP와 앰프의 전원 버튼을 누를 때는 왠지 경건한 마음(과 비슷한 어떤 마음?)이 듭니다.
앰프에 연두색 작은 불이 들어옵니다.
이 작은 시스템으로 들을 첫 곡으로는 듀크조던의 '플라잇 투 덴마크' 앨범 중 Glad I Met Pat 을 골랐습니다. take 4.
밀페형 스피커 특유의 중심이 낮게 잡힌, 가느다랗지만 풍윤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고등학교 입학 후 아버지가 사주신 첫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첫 소리를 들을 때처럼
가슴이 막 막 뜁니다.
어제 오후, 원하던 스피커를 거짓말처럼 운좋게 극상 상태의 것으로 구하게 된 것도
돈사정 때문에 친구에게 넘겼던 제 첫 앰프를 친구의 온정으로 다시 돌려받게 된 것도
깨끗한 CDP를 좋은 가격에 거래할 수 있었던 것도
음악과 책을 한없이 좋아해온 저를 어린날부터 지켜봐온 누군가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깊이 아껴주셨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닐까, 엉뚱하지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어제, 내방역 근처에서 스피커를 차에 실을 때부터 이 첫 음의 감흥을 즐겁게 상상했습니다.
번쩍거리는 은색이 칠해진 매끈매끈한 플라스틱 스피커나
최신형 미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요즘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마도 이상한 놈, 구닥다리-라는 소리가 어울릴 사람인 나는
진짜 나무- 베니어로 만들어진 인크로져와 주물 가공된 쇠로 만들어진 배플에 역시 쇠 나사가 달린
이런 스피커가 아니고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로시니의 'Une Larme'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구닥다리 남자의 행복을 이해해주고 늘 따뜻하게 도와주는
아내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