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자국
아마도 이 HR 트리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두봉 엔터프라이즈라는 워낙 생소한 기획사에서 발매된 데다가 한 장의 앨범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87년 벽두에 발매된 본 앨범은 탄탄한 연주 실력에 비해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다. 평범한 보컬과 대단치 않은 작사곡 능력 탓이다. HR/HM에선 무언가 강렬하게 청중에게 어필해야 할 부분이 필요하다. 겸손이나 절제는 락 음악에선 미덕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페인팅, 샤우팅, 저속하든 철학적이든 다소 상궤를 벗어난 가사, 또라이 기질 그게 아니라면 아주 잘 생겼거나. 뭐가 되었든 이슈가 될 만한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밴드에게 부족한 점은 바로 그런 점이 아니었을까. 앨범 자켓 전면에 나온 세 멤버의 생김새나 옷차림에선 프로 뮤지션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심하게 말하면 엠티 가서 비싼 기타 메고 개폼 잡고 있는 분위기랄까.
라인업은 김병호(G), 김병일(B), 손경호(D)의 트리오 구성이다. 김병호와 김병일은 친형제 간이다. 손경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데. 그렇다. 손경호는 이후 ‘외인부대’, ‘뜨거운 감자’, ‘원더버드’, ‘3호선 버터플라이’ 등을 거치며 내공을 쌓은, 최근엔 ‘문 샤이너스’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바로 그 친구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마운틴 류의 하드락인 듯 보인다. 연주 스타일은 담백한 아메리칸 락 사운드 자체다. 복잡한 화음이나 멜로디보다는 리듬, 리프 위주의 연주를 보여주는데, 셋이서 뽑을 수 있는 사운드는 모두 뽑아내고 있다. 들어보면 자극적이진 않지만 계속 손이 가는 음식과 같다. A면 3번 트랙 ‘내 마음 네 마음’과 5번 ‘한번만 더’는 실로 대단한 연주를 보여주는데, 마치 벡, 보커트, 아피스를 보는 듯하다.
B면 2번 트랙 ‘잊을 수 없다고 말해줘’는 헤비 블루스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당시 22세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원숙한 기타연주를 들려준다. 역시 보컬의 다소 평범한 음색만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는 명곡이다.
앞서 기술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음에도 이 음반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연주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현란한 손장난이 아닌 말 그대로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Rock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호는 이후 ‘에이-텐’A-10이란 밴드를 조직해서 두 장의 앨범을 남겼다. 현재는 악기 판매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안다. 이들에 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블랙 신드롬의 드러머였던 김욱이 최근 펴낸 사진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