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에, 이 공연이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안나 볼레나”는 도니제티 르네상스를 가져온 마리아 칼라스의 1957년, 1958년 공연 이후로 “제대로” 공연할 사람이 없어 라 스칼라 관중은 물론 경영진에서도 애타게 고대하고 있었다. 당시 라 스칼라 이사장이었던 카를로 마리아 바디니와 예술 감독이었던 프란체스코 시칠리아니는 칼라스가 1962년에 두 번의 메데아를 끝으로 라 스칼라와 이별하고, 1965년에 은퇴한 이후, 1977년에 타계하고 5년이 지난 1982년임에도 아직도 칼라스에 목을 매던 칼라스 팬들에게, 비록 루키노 비스콘티의 낡은 프로덕션이기는 하지만 몬세라 까바예라는 새로운 스페셜리스트에게 새로운 해석이나마 맡길 때가 되었다고 결단하였음을 “칼라스 홀아비들”에게 알렸다. 물론 까바예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벨칸토 레퍼토리인 노르마와 루크레찌아 보르자 등을 이미 라 스칼라에서 70년대에 성공적으로 공연했었다.
까탈루냐의 디바가 이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세계에서 표를 구하기 위한 행렬이 몰려들고, 뜨거운 성원에 금새 매진된 매표소 입구에는 티켓을 구한다는 피켓이 줄을 섰다. 그런데…공연 5분 전, 저녁 7시 55분에 누군가의 목소리로, 까바예가 몸이 좋지 않아 대역인 루스 팔콘Ruth Falcon으로 교체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말로 표현이 불가한 소동과 고함이 터지고, 언제나 불같은 갤러리(갈레리아=꼭대기 좌석)의 로조니스티들 뿐 아니라 극장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 분 후 지휘자 파타네가 오케스트라 피트를 빠져나가고 객석에 앉아 있던, 1957-58년 시즌에 칼라스와 함께 시무어 역을 맡아 공연 했던 시묘나토가 무대로 나와서 좌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러고도 반 시간 이상 고성이 빗발치던 장내에 “청중들 때문에”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방송이 나왔다.
며칠 동안 온 일간지에 떠들썩하게 주요 기사로 실리고, 경영진을 탓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무엇보다도 그럴거면 왜 공연 시간 임박해서 그 사실을 알렸느냐는 둥 칼라스의 1958년 새해 벽두의 로마 사건이 겹쳐지는 순간 이상이었다. 칼라스는 1막이라도 했었는데…바디니와 시칠리아니는 그 날 오후에 까바예가 머무르고 있던 호텔로 찾아가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알려지기로는 까바예가 극심한 위염이었고, 바디니와 시칠리아니는 첫 공연이 취소되면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이 두려워 그래도 참고 해주면 어떻겠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한 편에서는 25년만의 비스콘티 프로덕션에 칼라스의 망령이 씌였다고 기사와 루머가 돌기까지 했다. 게다가 까바예는 몇 년 전에 투란도트 때도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던 터였다. 그러나 까바예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했고 언론에서는 3일 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까레라스와 공연해 놓고 지금와서 뭐가 문제냐고 떠들어댔다. 물론 계약 상에는 불가피하게 공연을 못하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다 명시되어 있긴 했었지만 이 공연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라 스칼라에서 25년만에 올리는 칼라스와 비스콘티의 프로덕션이었고, 칼라스가 스튜디오에서 전곡 녹음을 남기지 않은 탓에,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은 아직도 그 공연의 해적음반을 눈에 씨뻘건 불을 켜고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두 번째 공연 날짜가 되어서도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고 두 번째 공연도 캔슬하였다. 루스 팔콘은 토리노에서 이미 안나 볼레나를 부른 적이 있었지만, 지휘자 파타네는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세 번째 공연은 막이 올랐고, 이 녹음이 그날의 기록인데, 청중들이 박수치는 중간에 쉿-쉿 거리는 소리와 중간중간의 야유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쉿-쉿 거리는 소리는 조용히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입장에서는 뭐 잘했냐고 박수를 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좀 조용히 극에 몰입하자고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라 스칼라의 관객은 파르마-볼로냐와 더불어 오페라 관중들의 수준이 높아서 아무리 잘나가는 가수라도 언제나 긴장하는 대상이고, 19세기에는 삑사리난 테너의 고음도 대신 불러주었다는 유별난 관객들이기도 하다. 칼라스나 디 스테파노, 델 모나코, 테발디, 파바로티 등 전설의 명 가수들에게도 가차없이 굴었고 씁쓸히 무대를 등지는 경우가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아이다 시작하자마자 알라냐가 그 어려운 “celeste Aida”를 잘 불렀음에도 관객의 이유없는 야유에 무대를 내려가버린 적도 있었다. 까바예는 이 공연만 부르고 나머지 공연은 체칠리아 가스디아가 대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