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na Bachauer (1913-1976)
지나 박아우어는 5살 때 아버지에 이끌려 리스트의 제자인 에밀 사우어(Emil Sauer)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보게 되었고 공연이 끝난 후 박아우어는 아버지에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박아우어의 아버지는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결국 박아우어는 아테네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8세에 첫 리사이틀을 열었으며 16세에 졸업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박아우어는 파리에서 계속 피아노 수업을 받았는데 그때 알프레드 코르토와 함께 배웠습니다. 프랑스의 거장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으나 그녀에게 더욱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습니다. 지나 박아우어는 흔치 않은 라흐마니노프의 공식적인 제자입니다.
그녀의 연주 커리어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을 위한 620회 위문공연에서 시작했는데, 독일군이 그녀의 고향 그리스를 점령할 무렵 친계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 박아우어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뉴 런던 오케스트라로의 협연 제의를 받고 1946년 극적으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게 됩니다.
이때 알렉 셔먼(Alec Sherman)이 지휘를 했는데, 당시 박아우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먼저 오디션을 보기로 했는데 알렉 셔먼은 지나 박아우어의 연주에 크게 놀라게 되었고, 결국 박아우어는 공연이 끝나고 기립박수를 받게 되고 미디어로부터 호평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박아우어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알렉 셔먼은 박아우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박아우어는 활동에 비해 많은 녹음을 남기진 않았는데, 이무렵 알렉 셔먼과의 협연과 약간의 독주곡들이 모노 녹음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때 HMV에서 남긴 녹음들이 일부 시디로도 발매가 되어있습니다.
런던에서의 성공을 기점으로 1950년 미국에서도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깐깐한 뉴욕 비평가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을 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이당시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베토벤 협주곡같은 대곡들을 연주하면서 많은 호평을 이끌어 냈습니다.
머큐리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해롤드 로렌스가 지나 박아우어에게 어떻게 침착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녹화 경험을 얘기해주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연주를 영상으로 녹화할 때 연주가 끝나고 프로듀서가 다시 한 번 연주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 이유를 물었더니 프로듀서가 하는 말이 연주하면서 미소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어려운 곡을 연주하면서 어떻게 웃으면서 할 수 있냐고 따지자 프로듀서가 친절하게 그러면 선율을 생략하고 연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박아우어는 머큐리의 거의 막바지 무렵에 녹음을 남겼습니다. 쇼팽, 베토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과 라벨, 드뷔시의 독주곡 등을 남겼는데 그녀가 머큐리에서 남긴 녹음들은 모두 시디로도 발매가 되었습니다. 다만 머큐리 리빙 프레즌스 시리즈가 거의 대부분 90년대 중반에 찍어내고 그 이후로 더 찍어내지 않은 탓에 지금 구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고 LP 구하는 것이나 CD 구하는 것이나 비슷비슷합니다.
머큐리 특유의 인위적인 손을 대지 않은 녹음탓에 피아노의 여린 연주에서부터 빵빵 터지는 오케스트라의 총주까지 다이나믹이 상당하기 때문에 좋은 오디오에서 들을 수록 (더불어 주변 소음이 적으면) 감동이 증대됩니다. 전반적으로 아주 여리고 둥글둥글하고 예쁜 소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흡사 하스킬의 모짜르트 연주를 연상시킵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박아우어는 피아노 콩쿨로도 유명합니다. 국내에서도 몇 명의 입상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여기에서 수상하면 군대 면제 혜택이 주어지는 국제 대회이며, 대회 우승자에게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부상으로 주기도 하고 또한 데뷔 기회도 주어집니다. 현재는 미국 유타 솔트 레이크(salt lake)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