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를 부채모양으로 싸감고 있는 부용산은 동학운동의 최후 격적지로 봄이 되면 진달래 철쭉 등이 화사한 꽃빛으로 불태우는데 아직 등산로가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찾는 이가 드문 산이다. 전란의 시달림에서 안전한 보호막이 돼 주었던 부용산의 덕성은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오른다. 당시 이맹(李孟)이란 장수가 골목 어귀에 서 있다가 들어오는 왜적을 모조리 쏘아 죽여서 피란민들의 안전을 지켜주었던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장구목재다. 부용산은 부처가 솟은 산이라는 `불용산(佛聳山)', 산삼 등 약초가 많다고 해서 `약다산(藥多山), 돌이 많아 '석다산(石多山)등으로 불린다.
`장흥군지'에 따르면 부용사는 고려 중기 때 세워진 사찰로 임진왜란이나 갑오년 농민군 소탕 과정에서 불타고 지금은 허술한 여염집 분위기를 내고 있다. 부용산에는 용샘이 있는데 이곳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곳으로 용산면 사람들이 기우제를 올리는 신성한 샘이다.
정상에 서면 천관산이 도드라져 보이고 멀리 만덕산의 암봉이 너머다 보인다. 하산길에 거치게 되는 수리봉의 작은 암봉을 건너는 재미도 부용산 등반의 또 다른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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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윤필립 < 在호주 시인 > phillipsyd@hanmail.net
요절한 누이를 그리며 쓴 시 ‘부용산(芙蓉山)’이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평생을 쫓기고 매맞고 천대받다 끝내 혈혈단신 이역만리 땅으로 떠나야 했던 시인 박기동. 번번이 원고를 압수당해 아직껏 단 한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이 불행한 시인은 오늘도 묵묵히 시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이 슬픈 사랑의 얘기를….” 젊은 나이에 죽은 아내를 회상하는 영화 ‘러브 스토리’ 주제가의 시작 부분이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면서 쓴 시 ‘부용산(芙蓉山)’에 월북음악가 안성현이 곡을 붙이고, 그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불러서 일명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한평생을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다가 끝내 이역만리 호주로 떠나와야 했던 박기동(朴璣東·84) 시인을 소개하기 위해서 필자 또한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이 슬픈 노(老)시인의 얘기를….”
상처없이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필시 그에게도 곡절이 있으리라. 먼 길 떠나와서 ‘시드니 박씨’, ‘멜버른 김씨’의 시조(始祖)가 되어 살아가는 숱한 호주 한인동포들처럼. 더구나 그가 모국을 떠나올 때가 76세의 고령이었으니 곡절도 이만저만한 곡절이 아니리라.
시드니의 겨울은 얼음조차 얼지 않는 아열대성 겨울이다. 더구나 금년 겨울은 80년 만의 이상 난동(暖冬)으로 따뜻하기 그지없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나온 상처받은 사람들에겐 삭풍보다도 더 시린 고독감이 뼛속까지 저미는 겨울이었을지도 모른다.
겨울나기를 한 박기동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드니 서부의 리버우드를 찾아간 날은 봄볕이 아주 좋은 금요일이었다. 지구 반대쪽에 위치한 시드니에선 9월에 봄이 시작된다. 그가 사는 정부 임대 아파트 2층 계단에 1년생 화초가 심어진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봄볕을 쬐고 있는 화초들 옆에 앉아 함께 봄볕을 쬐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필자가 도착한 것도 모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는 노인. 봄볕 아래서 화초들과 함께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꽃과 노인, 노인과 꽃, 이미 한 몸 되어 사는 그의 얘기가 궁금했다.
적막강산이었다. 필자가 1년여 만에 찾아온 손님이라고 했다. 시집을 내기 위해서 하루빨리 시를 생산하고 싶지만 너무 적막해서 그런지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서 그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이 아파트지 박시인을 위한 공간은 화장실만 분리된 6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낡은 침대와 책상 하나, 조그만 책장이 있을 뿐 손님을 위한 의자도 없었다. “손님은 1년에 한 명 올까 말까 합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떠올랐다.
- 정부 임대 아파트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옹색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나 혼자 살기엔 충분한 공간입니다. 난 이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합니다. 먹고, 자고, 원고 쓰고, 요가도 하고….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면 물질의 노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나같은 노인에겐 인간의 향기가 필요하지 물질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물질을 적게 가져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물신숭배사상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입니다.”
- 1917년생이니 우리 연세로 여든다섯이신데, 제겐 60대 중반쯤으로 보입니다. 건강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3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2시간씩 계속해온 요가와 17년째 계속하는 생식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요가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6000년 동안 행법(行法)으로만 전수되고 있는 요가는 일종의 실천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31년 요가를 해온 나도 아직 문턱에다 발 한쪽을 들여놓고 ‘요게 요가인가’ 하고 느끼는 정도입니다. 특히 물구나무서기를 좋아하는데, 한 시간 정도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억력이 좋아집니다.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이지요. 정신이 흐려지면 백약이 무효니까요.”
시집 한 권 내는 게 평생 소원
- 요가는 인도의 6개 정통철학 가운데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요가는 만물이 평등하다는 평등철학에서 시작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나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아부를 하지도 않고 아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혼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정신을 똑바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짜증도 없어집니다.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건강해질 수 있지요.”
- 생식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두 끼만 드신다고 하더군요.
“생식은 1985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내가 자연식 모임인 ‘한마음회’ 회장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생식을 하기 위해 경주에 있는 생식마을 ‘초근목피연구원’에 들어가 4년을 지냈습니다. 그후로 단 한번도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습니다. 주식으로 현미 등 13가지 정도의 분말에 꿀과 물을 적당히 배합해 개떡처럼 만들어 한 끼에 60g 가량씩, 하루 두 끼를 먹습니다. 부식으로는 감자, 당근 같은 뿌리 야채와 시금치, 미나리 등 푸른빛을 띤 야채를 강판에 갈아서 먹고 물은 생수만 마십니다. 호주의 수돗물은 거의 생수 수준이라서 하루쯤 둔 다음 그냥 마시지요. 오전 10시와 오후 6시에 식사를 하고 간식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생식을 하더라도 과식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건강에 집착하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시 ‘부용산’ 중에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조금 애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스물네살에 죽은 누이의 운명을 쓴 것입니다만, 돌아보니 내 자신의 운명이 돼버렸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늘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았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왔는데 내 평생의 소망인 시집 한 권을 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세 차례 정도 시집을 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가택수색 등으로 시작(詩作) 노트를 빼앗겼어요. 한국에선 더 이상 시를 쓸 수도, 시집을 낼 수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호주로 떠나왔어요. 한평생을 시에 기대 살아왔는데 건강하지 못하면 시를 쓸 수도, 시집을 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요가를 하고 생식을 하는 겁니다.”
첫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나서면서 보니 벽에 써붙인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 건강하게/마음은 깨끗하게/생활은 검소하게’,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자. 그건 너 스스로를 인간 쓰레기로 만드는 노예근성이니라. 또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탓하지 말자. 모든 건 오로지 내 탓이어라’라는 글귀다. ‘3대 생활수칙’이란 것도 크게 써서 붙여놓았는데, ‘1.서두르지 말자. 2.욕심을 버려라. 3.매사에 감사하라’다.
그중에서도 ‘욕심을 버려라’는 대목이 목젖에 걸려왔다. 저 노시인에게도 스스로를 추스려야 할 욕심 같은 게 남아 있을까. 무소유의 전형 같은 시인의 집을 나오면서 문득 미당 서정주 시인의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구가 떠오른 건 또 무슨 연유일까. 그가 물질 대신 큰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엿보았기 때문이리라
제망매가의 운명
1947년, 전남 벌교에 살던 박기동 시인의 하나뿐인 여동생 박영애(당시 24)씨가 결혼 2년 만에 폐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놓고 말았다. 슬하에 자식 하나 없었다. 친정 부모는 먼저 간 여식의 장례를 차마 지켜볼 수 없었고, 시가 쪽에서도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한 생명을 영영 떠나보내는 장례식치고는 너무나 쓸쓸했다.
연꽃 형상을 하고 있는 벌교 뒷산, 부용산 산자락에 여동생을 묻고 유난히 하늘색이 푸른 부용산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박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에 허청거리며 다음과 같은 제망매가(祭亡妹歌) 한 편을 썼다.
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부용산’ 1절 전문)
두번째 인터뷰를 위해서 한인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스트라스필드 광장에서 만난 박시인에게 1947년 얘기를 청했다.
“누이동생 영애는 주위에서 천사같다고 했을 만큼 착하고 예쁜 처자였습니다. 내가 순천사범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마땅히 병간을 해줄 사람도 없어 내가 자주 병원에 들렀지요. 여린 손으로 그 짧은 삶의 끝자락을 쥐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해 가을에 영애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시의 초안을 잡아놓고 나중에 좀더 손질해서 발표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는 딱히 나 개인의 누이가 세상을 떠난 허무감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내 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 이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든 사연도 자세하게 기억이 나세요?
“그럼요. 이 노래 때문에 좌경시인으로 몰려 한평생을 떠돌아야 했는데…. 1948년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 당시는 6년제였다) 국어교사로 있을 때 학생 중에 김정희라는 영특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늘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도 잘 했고, 문학에도 소질을 타고난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폐결핵에 걸려 열여섯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학교에 안성현이라는 음악선생이 있었는데 아끼는 제자를 잃은 슬픔을 노래로 만들고 싶어서 내 시 ‘부용산’에다 곡을 붙였어요.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해서 당시의 시대상하고 맞아떨어졌는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 것 같습니다.”
- 그런 사연을 가진 노래가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데요.
“나도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빨치산들은 이데올로기가 담긴 노래만 부르는 줄 알았는데….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산으로 간 빨치산들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을 것’이라고요. 실제로 남부군의 일원이었던 어떤 분은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는 노래를 불렀다고 증언했습니다.”
- 그렇다면 당국에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해서 오해를 풀 수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 사정을 얘기하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지요. 그러나 너무나 가혹한 시절의 연속이어서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노래가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면서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시인의 눈빛이 갑자기 흐려지는 것 같았다. 지난날의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나무 아래를 한동안 서성거렸다.
안성현과의 만남
1947년, 박기동 시인이 순천사범학교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남조선교육자협의회(일명 교협)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전교조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박기동 시인 등 6명의 교사가 교협에 가입한다는 서명을 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좌익성향이 꽤 강한 김선생이라는 사람이 적극 권유해 나머지 5명은 교육자들의 권익옹호를 요구한다는 차원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가입한 것인데, 이것이 세칭 ‘교협사건’으로 불거지고 말았다. 전원 순천경찰서에 잡혀가서 4개월 동안 구금됐다.
박시인의 일생이 사상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게다가 김구 선생이 북한을 방문할 때 그가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라는 헌시(獻詩)를 써보낸 일이 당국의 미움을 사게 돼 어디론가로 끌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영영 벗을 수 없는 좌경시인의 굴레를 쓰게 됐다.
구금생활을 마친 그는 6개월 정직처분을 받았다. 그때 시인인 항도여중의 조희관 교장이 그를 국어교사로 초빙했다. 항도여중을 명문학교로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치던 조교장은 경향 각지의 우수한 선생들을 수소문해서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일대에 평판이 자자한 음악선생 안성현이었다.
박시인은 그렇게 안성현 선생을 만나 단짝으로 지냈다. 국어교사와 음악교사의 성향이 비슷한 탓도 있었겠지만 조희관 교장이 두 사람을 유난히 아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빨리 친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향이나 출신학교 같은 개인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박시인은 언젠가 그가 도쿄음악학교를 나왔고 성악을 전공한 테너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안선생은 1년에 두 차례씩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을 발간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던 중 아끼던 김정희 학생이 죽었고 제자를 애도하는 곡을 만들기 위해 박시인의 허락도 없이 그의 습작노트에서 시 ‘부용산’을 택해 곡을 붙였다. 그는 ‘부용산’뿐만 아니라 박시인의 또다른 시 ‘진달래’에도 곡을 붙여 발표했다.
안선생은 박시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부친이 평양에서 고관으로 재직하고 있는데(1948년 당시는 공산정권 수립 전이다) 한번 만나러 가고 싶다. 도쿄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무용가 최승희도 만나보고 싶다”고.
안성현 선생은 보통 키에 눈에 띌 정도의 미남이었다. 성격도 온순하고, 매우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어디에서도 정치성향이나 사상적 경도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철저한 낭만주의자였다. 가족은 광주에 두고 조희관 교장의 집에서 머물 만큼 조교장이 보배처럼 아끼는 선생이었다.
1999년 광주 KBC에서 ‘부용산을 아십니까?’라는 TV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방송국에서 추적한 결과 안성현 선생은 1949년 9월15일에 항도여중을 의원면직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일설에는 한국전쟁 중 최승희가 남하했을 때 “북쪽은 예술인의 천국이니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고 따라갔다고 한다. 또한 안씨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무용가)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그가 월북한 후 북한국립교향악단의 단장을 지냈다는 소문도 있다.
지금도 안성현 선생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음악밖에 모르는 그가 어떻게 빨치산 활동을 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정성이 넘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곡을 붙인 로맨티스트였다.
53년 만에 나온 ‘부용산’ 2절
- 안성현 선생이 한동안 단짝으로 지낸 사람이기는 하지만, 결국 월북했고 그 결과 박선생의 일생을 신산(辛酸)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부용산’을 작곡할 때 지극히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 노래 때문에 내 인생이 많은 곡절을 겪었지만 그건 나의 운명이지, 안선생을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 안선생과 헤어진 후 그의 소식을 접한 적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다만 지난해 10월1일, ‘부용산 시비(詩碑)’ 제막식에서 안선생의 부인을 5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삯바느질을 해가면서 고생스럽게 살아온 그 분도 남편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만약 아직도 살아있다면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빨치산의 노래’라는 굴레를 쓰고 50년 넘게 숨어서만 불러야 했던 ‘부용산’이 몇년 전부터 잔잔한 감동으로 되살아나면서 이 시를 쓴 박기동 시인도 재조명되고 있다. 1997년 ‘민중가수’로 불리는 안치환이 조심스레 구전돼 오던 ‘부용산’을 취입하면서 시를 쓴 지 꼭 50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안치환의 음반에는 ‘부용산’이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다.
이어 1998년 2월14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김성우 에세이 ‘부용산 오리 길에’가 ‘부용산’을 명실공히 햇빛 아래로 나오게 만들었다. 김성우 당시 논설고문은 이 글을 통해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남도지방에서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 노래가 태어난 배경을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정리했다.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남도사람들만 부를 게 아니라 전국민이 함께 불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 노래가 1절밖에 없어 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박시인에게 ‘부용산’ 2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절이 나온 지 53년만에 ‘부용산’ 2절이 태어났다.
‘부용산’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연극인 김성옥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김씨는 오랜 세월 이 노래의 탄생배경을 알아보고 악보를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호주까지 건너와서 박기동 시인을 만났다. 그는 지난해 5월29일 목포에서 ‘목포 부용산 음악제’를 열어 목포에서 태어나 명맥을 이어온 이 노래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 처음 발표된 ‘부용산’ 2절은 소프라노 송광선씨가 그 가사만큼이나 가슴 저미게 불러 청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 1절을 쓴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2절은 쉽게 써지던가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양했습니다. 더구나 ‘부용산’은 정형시가 아닌 자유시인데, 그걸 어떻게 억지로 꿰어맞출 수가 있겠냐고 김성우씨에게 되묻기도 했지요. 그래도 부탁한 분의 성의를 생각하고 내 운명을 바꿔놓은 시 ‘부용산’ 이후의 내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2절을 썼습니다.”
▲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전남 벌교 부용산을 찾은 박기동 시인
벌교에 세워진 ‘부용산 詩碑’
그리움 강이 되어/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재를 넘는 석양은/저만치 홀로 섰네/백합일시 그 향기롭던/너의 꿈은 간 데 없고/돌아서지 못한 채/나 홀로 예 서있으니/부용산 저 멀리엔/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부용산’ 2절 전문)
- 2절을 읽어보니 ‘너의 꿈은 간 데 없고/돌아서지 못한 채/나 홀로 예 서있으니’ 부분이 선생님의 지금 처지나 심정을 읊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요. 며칠동안 시상을 가다듬다가 막상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보니 지난날의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 한 30분쯤 그냥 엎드려 울었지요.”
- 어리석은 질문입니다만, 이곳에 살면서 많이 외로우신가요?
“외롭지요. 그러나 시인은 모름지기 외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모두가 외로운 존재들이지만, 특히 시인은 처절한 고독감과 마주설 줄 알아야 해요. 그 고독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생의 한 자락이나마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부용산’ 부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시비 건립이다. ‘부용산’이 태어난 곳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오리 길에 지난해 10월1일 ‘부용산 시비’가 세워진 것. 박시인은 1993년 호주로 이민온 이래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 시비 제막식에 참석해 많은 고향 사람들, 제자들과 해후했다. 50년 가까운 세월 숨어서만 불러야 했던 노래를 돌에 새겨놓고 마음껏 부르게 됐으니 박시인은 물론 벌교사람들 또한 얼마나 기뻤을까.
- 호주 이민후, 첫 모국 나들이를 자신의 시비 제막식 참석차 다녀오셨으니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
“격세지감이었어요. 살다보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하는 감회가 있었습니다. 시비 제막을 위해 애써준 서울 거주 벌교 향우들과 벌교번영회, 벌교청년회의소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당시 경원대 이대순 총장이 힘을 많이 썼다고 하더군요. 비록 내가 쓴 시지만 벌교사람들과 목포사람들이 이 노래를 지켜왔고 부활시켰기 때문에 ‘부용산’의 주인은 그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비 제막식에서 안성현 선생의 부인 송동을 여사도 만나셨다면서요?
“송여사가 부산에서 일부러 오셨더군요. 50여 년 만에 만났으니 반가운 마음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송여사를 만나니 그 자리에 없는 안성현 선생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더군요.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헤어졌는데,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좌경 교사’의 인생유전
1917년 일제 강점기에 여수 돌산에서 태어난 박기동 시인은 열살 때 가족이 벌교로 이사해 벌교보통학교를 다녔다. 당시 ‘천재소년’으로 이름을 날리던 소년 박기동은 제1고보(현 경기고)에 진학하려 했으나 배일파(排日派)인 부친 박준태(한의학자)씨가 일본인 학교라는 이유로 반대해 진학이 좌절됐다. 그는 열네살 때 아버지의 금고에서 30원을 훔쳐 만주로 달아나 1년 동안 만주 일대를 방랑했다.
가족들의 권유로 귀향하기 위해 압록강변에 닿은 박기동은 고향까지 걸어서 가겠다고 결심하고 갖고 있던 중국 돈을 압록강에 버렸다. 사흘 동안 굶다시피 하며 걸어 사리원에 도착한 그는 역사(驛舍)에서 탈진과 허기로 쓰러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당도한 박기동은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것이 뭐냐?”는 부친의 질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대답했다. 부친은 그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막으면 또다시 가출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자유분방하게 소년기를 보낸 그는 간사이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오히려 모국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10년 남짓한 일본 유학을 마친 박시인은 1943년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벌교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벌교중학교, 항도여중, 광주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등에서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재직하는 학교마다 교가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벌교초등학교, 벌교중학교, 벌교상고 등은 그가 쓴 교가를 부르고 있다. 한편 그가 항도여중에 재직할 때 만든 문예지 ‘새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문예지다.
1947년 순천사범학교에서 교협사건을 겪은 박시인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또한번 사상적 시빗거리를 만들게 된다. 피란을 가지 않고 3개월 동안 공산치하에서 산 게 화근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목포에서 당시 이범석 총리의 시국강연회가 있었는데, “국군이 수원 전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오히려 북쪽으로 밀어내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했다. 그는 총리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송정리 쪽에서 북한군이 밀려들어왔다. 꼼짝없이 갇힌 사람들은 집회에 참석해 ‘김일성 장군’ 등의 노래를 배워야 했고, 생존을 위해 쌀 배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교협사건 등에 연루되어 좌경교사로 낙인 찍혔던 그에겐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시빗거리가 되어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마침내 박시인은 1957년 목포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나게 된다. 1961년 서울로 이주한 그의 가족들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늘 감시를 받은 것은 물론 툭하면 가택수색과 연행, 구금을 당해야 했다. 그는 가끔씩 출판사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나마 평탄치 못했다. 글을 써서 살아가는 사람의 원고를 빼앗아갔으니….
블루 마운틴의 ‘빨치산 그룹’
1980년대에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일도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어느 새벽에 수사관들이 그를 연행했다. 그때까지 살아온 날들을 정확하게 기록하라는 수사관의 다그침에 그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진술서를 써야 했다. 잠시 후 청년 세 사람이 들어와 30분 정도 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얼마후 그는 방면됐다. 좀처럼 전후 사정을 말해주지 않는 수사관을 졸라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한국전쟁 당시 광주농대 근처에서 한 우익인사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박기동이 그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를 관찰하던 세 청년이 죽은 사람의 자식들인데, 그들은 박시인이 범인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겪은 일이라 기억이 선명치도 않았을 텐데 자칫 그들이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면 당시 시대상황으로 미뤄 십중팔구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게 박시인의 회고다.
박시인은 생계를 위해 일본의 문학작품과 학술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시리즈다. 그러나 번역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번번이 원고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시집 출간이 무산된 것은 물론, 198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붓을 꺾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가 외국으로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자유의지와 더불어 다시 한번 시 창작을 시도해보겠다는 궁여지책이었다.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가족들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 이민을 결심한 후, 일본과 호주를 놓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1993년,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호주로 떠나왔다. 그나마 1987년 6·29 선언 후에 여권이나마 발급받을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만주를 떠돌던 열네살 소년의 방랑벽이 일흔여섯의 노인이 된 그때까지 이어져 호주 이민을 결행하게 된 것이다.
시드니 서북쪽에 블루 마운틴이라는 명산(名山)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은 물론 시드니 시민들의 산행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박시인도 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번씩 7년째 이곳에서 부시워킹을 한다. 산길을 걷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함께 산행하는 한인동포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루 마운틴은 계절마다 갖가지 꽃들을 지천으로 피워놓고 그를 기다린다. 일석 삼조, 사조인 것이다.
그는 부시워킹을 시작하는 카툼바역까지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간다. 이름하여 ‘청산(靑山)으로 가는 기차’다. 그는 그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곤 한다. 얘기를 더 들어볼 요량으로 그의 산행을 따라나섰다.
- 기차여행은 참 오랜만인데,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여유가 있고 깊은 맛이 있습니다. 함께 가는 일행이 꽤 많군요. 모임의 이름이 ‘청산회’라고 들었습니다.
“블루 마운틴을 직역해서 그런 친근한 이름을 만들었죠. 모임에 나오는 사람이 30명쯤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산행 경력과 보행속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부시워킹이 시작되면 그룹을 나누게 됩니다.”
- 일행 중에서 박시인께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데, 어느 그룹에서 산행을 하십니까?
“나는 처음부터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걷는 그룹에 속했습니다. 일명 ‘빨치산’ 그룹인데, 그 동안 한번도 힘에 부친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 산행을 하면서 시도 구상하시는지요?
“그럼요. 그러나 시 쪽에서는 아직 별 소득이 없습니다. 오히려 산행을 통해 아주 귀한 만남을 갖는 행운을 얻었지요. 목포사범 제자인 박마리아(62)…옛날 이름은 박부지였는데…를 만난 것입니다.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는데, 이 아이가 날 쉽게 알아보더군요. 뿐만 아니라 ‘부용산’ 노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호주까지 와서 ‘부용산’을 듣게 되어 감회가 깊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옛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 박마리아씨도 “박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라며,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약해질 때면 연로하신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고 했다. 그는 “목포사범을 졸업한 후에도 동창회 등에서 ‘부용산’을 부르며 내 노래처럼 여겨왔는데, 그 주인공인 은사님을 이역만리에서 뵙게 됐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에 있냐”며 환하게 웃었다.
함께 산행하는 권혁하 장로는 “박시인은 84세의 고령임에도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60대보다 더 강인하다”고 했다. “젊은 사람에게도 늘 경어를 쓰고,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는 일이 없으며, 말씀과 행동이 늘 한결같아 회원들 모두가 존경하는 어른”이라고 했다.
묵묵히 시를 기다린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말없이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에게 언제 마르크스를 알았으며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일본 유학중에 마르크스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요. 교양과정에서 ‘자본론’을 공부했는데 무척 낭만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늘 소동을 일으키는 것 같아 ‘마르크스는 왜 저렇게 소란스러운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어요.”
- 마르크스 이론과 실천가들의 행태에 괴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나도 마르크시즘을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칫 독재로 흐를 것 같은 예감을 가졌는데 결국 그렇게 되더군요. 저는 이념을 떠나서 생태적으로 독재와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마르크스 실천가들이 비록 바른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의지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행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그런데도 좌경시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고생하셨는데….
“글쎄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좌경이라면 좌경시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사상적으로 무척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입니다. 어찌 됐건 나를 문인협회에 가입조차 시켜주지 않는 현실에 상처를 받긴 했습니다. 단체를 싫어하는 성격입니다만, 당시 문협 이사장인 조연현씨나 부이사장인 이동주씨 등과 사적으로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 좌파 지식인들과는 교류가 없었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난 좌파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지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사상 같은 것을 논하겠습니까. 늘 감시 받으며 살얼음판 걷듯 살아오다보니 좌파 지식인들을 만날 수도 없었어요. 그랬다간 자칫 내가 그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줄 수도 있잖아요.”
기차가 요란한 정지음을 내면서 카툼바역에 당도했다. 일행을 따라 내리는 시인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기차바퀴만큼이나 육중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온 그의 삶이 아직도 그를 가위눌리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치 수사를 하듯 집요하게 그의 사상적 배경을 캐물은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일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다시 들렀다. 포도즙과 호두, 말린 과일 등을 앞에 놓고 그가 품은 꿈에 대해 물어봤다.
“물론 시집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가 억지로 써지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썼던 시들은 모두 유실됐으니 언제쯤이나 시집을 엮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시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잠도 자고 요가도 하고 산행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낳고 키워준 모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