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쫄병 시절 대대장 바둑판을 만들기위해 살아 천년 죽어 천년간다는 붉은 목을 베어 오라는 명령을 받고 1400 고지 깊고 높은 북능선을 들어 갔다가
육이오 때 인민군들이 사용했던 방방이식 박격포가 큰 나무에 3분에 1 정도 박힌(불발탄)을 발견 했는데..가까이 가서보려다가 더욱 놀랐던 일은 ...나무 아래 유골 하나가 오랜 세월 이끼를 덮어쓰고 ..두눈 부위만 뻥하니 구멍이 난체 있었다.
생각하면 슬픈 비목이 절로 생각나는 추억인데..그후 50년이 지나서 군 경비병을 눈을 피해서 기억을 더듬어서 올라 가보았지만 숲이 더욱 우거져서 나무에 박힌 박격포나 이끼 덮어 쓴 유골을 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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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젊은 나이에 먹는 것도 제 되로 주지 아니하고
호된 훈련을 논산에서 마치고 나니
호송차는 북으로 북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이남에서 가장 춥다는 최전방 1400 고지나 되는 곳에
배치가 되어 말단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당시 혹한기에는 새벽에 000방송국에서
"수고 하십니다 오늘 그 고지는 마이너스 몇도인지요?"
전화 문의가 왔다
그러나 .혹한에 온도계는 터져 쓰지 못하고........온도계 살 돈은 없고 산정상 온도를 대답은 해야하는데 .
답답했지만 결국 정확치 아니한 짐작으로 대답을 수개월 했었던 기억이 있다.
혹한기에는 화목으로 군불을 피워도
워낙 북풍 칼바람 돌아드는 고지 막사라서 방안에 서리 내림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벽 성애 내림 길이를 보고 짐작으로
" 오늘은 영하 마이너스 14도 입니다"
대답해도.... 대충은 맞았다.
그렇게 보고 된 온도가 그날 전방 지역 온도 기준으로 전국 날씨 방송 자료로 사용 되었던 세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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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을 즐기는 사람이라 늘 겨울이오면 좋다.
눈밭에 노숙 할 경우는 영하 10도가 넘어야만 메트리스 아래 눈이 녹지 않코 눈송이 아삭거림으로
편하게 누워서 겨울 청빛 밤하늘의 별보는 재미도 있고 운이 좋아서 천고에서 백설부라도 휘날리는 날은 세상일은 우망하고 그저 설곡의 작은 동물로 더 좋을 수없는 노숙을 하는데 ...올해는 그런 혹한이 아직 오지 않아서 아직 군생활 했던 그 곳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미 여러번 다시 가서 노숙했던 밤에는
꼭 되살아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
요즈음 탈북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북 전거리 교화소 인권 유린을 듣고 ...참혹하다 이렇게 생각할 젊은이들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도 6-70 년대 군대는 솔직히 인권 사각지대였다.
전거리 교화소가 50kg 전후 청년이 서서 들어가면 6개월 안으로 28kg 전후가 되어서 누워서 나 온다는 악명높은 교화소 란다
부산 꼴통 병장이 수시로 쫄병들을 야밤에 세워 놓고 줄밧다를 치고 설쳤다.
왠만해서는 화를 내지 아니하고 참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결국 욱하는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소위 하극상을 하게 되었는데..점호시간에 소대장에게 쫄병에게 얻어 터져서 눈두덩이가 거먹케 솟아 오른 병장 얼굴이 발각되었도 결국 나는 다음날 헌병 차가 와서 군화 끈을 풀고! ..김신조 일당으로 인해서 더욱 군기강이 엄했던 시절인 군감방으로 가게 되었는데...그당시 한국군 군 영창에도 전거리 교화소 비슷한 인권유린 문화가 있었다.
조사 시작에 일단 밧다를 10 대 정도 맞고 시작하고,조사 받은 후 감방에 수감 될 때 감방 바로 앞에서 간수들이
몸둥이 폭력을 쓰는데 ...기절을 할 때까지 때리고 기절하면 찬물을 부어서 깨운후 감방 문지방을 기어서 넘게 하였는데...같이 끝려간 자들이 기절을 했지만 ..별 힘도 없던 나는 당체 기절이 안되어서 더 얻어 맞았던 기억이 바로 한창 추웠던 1월 17 경이다
엉덩이에 핏물이 고일 정도로 얻어 맞고..며칠간 화장실에 앉은 자세가 안 될 정도 였고, 잠을 재우지 아니하고 보통은 두 세시까지 감방 폭력이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 졌고 그 좁은 감방에 이북처럼 똥통이 있었고
장소하 협소하여 칼잠을 자야했다.
말이 인간이지 동물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감방에 끌려오는 군인들이 얻어 맞는 것을 보면
심하게 매를 맞으면 인간 입에서 자동적으로 짐승 소리같은 동물 고통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목격한 이후 나는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다.
솔직히 이제는 많이 자유화니 인권이 보장되는 세월이지만 6-70년대 한국군대의 인권은
북한 전거리 교화소 인권이나 크게 다를 이유가 없다고보면 ....과연 우리민족이 온순한 민족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과학자들이 ...흰 쌀밥을 먹는 인종들이 가장 냉혹하다라고..평했다는 논리도 어느 정도 수궁이 가는 대목이라고 본다.
아무튼 무려 50년 전 일이지만 1월 17일이 다가오니 그때 추억이 다시 생생하고하여
이제 늙어서 다시 그 당시를 추억하면서 자료를 남기는 글을 쓰는데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오른 부산 꼴통 병장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평생 나를 잊지 못한 못할 일인데..그래도 길가다가 만나면
"문병장님 반갑습니더...그때 쫄병 조정래 입니다!"
인사하고 그 당시 눈탱이 되도록 박치기를 넣었던 사과의 뜻으로 종로에 될꾸 나가서 어디 좋은 안주에 소주라도 한잔 대접 했으면하는 생각이 드니 ...인생 중중한 추억라서 그런지 왠지 늙은 웃음이 나온다.
사진의 장소는 부산 꼴통 병장이 통신 훈련 나와서도 우리 쫄병을 세워 놓고 줄밧다를 쳤던
vhf차량 주차 자리인데...그 시절이 그리워서 눈이 펑펑 내린 훗날은 서울을 출발 하여 일동 이동을 지나고 사창리로 넘어가는 갸라멜 고개를 넘어 800 고지 능선에 있는 이곳에 들어가서 이미 몇번 노숙을 했다.
군 인권 사각지대인 전방이지만 산하 풍광은 조선선비가 이곳을 곡운구곡이라고 칭했을 많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며, 그 깊은 산중,밧다를 맞던 곳에 노숙을 하는중 천고에서 백설이라도 흐브지게 내리는 밤을 지세고나니
그곳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였다는 것을 뒤 늣게 깨닫게 되니 그 또한 백설에 감탄했었다.
한겨울 노숙을 위해서 청계 골목에 들락거리면서 2틀만에 만들어 본 간이 보일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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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쩨 사진이 약 1400 고지 풍광인데 그곳에 통신 파견대가 있었고
저녁 무렵 고참들이 술이 생각나면 통신 발전기 빨간 기름을 한말 메고 그 험한 산길을 헤집고 내려가서
강원도 옥수수 밀주를 바꾸어 오라 하였고 다들 가기 싫어 하지만 나는 술이 좋아서 자청해서
산아래 화전민들이 세가구 살았는데 그곳까지 기름통을 메고 내려가면
화전민들은 기름을 반갑게 받았고 덜덜 떠는 나를 따뜻한 구들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산골 개구리가 둥둥 떠 있는 매운탕에 옥수수 술을 권했는데
강원도 갱냉이 술은 무척이도 달달하고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어 마시고 나면 엄청 독했던 기억이있다.
.... 이제 그 화전민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화전민 골방에서 강냉이 술 마시던 시절이 벌써 50년 흘렀는데도 추억이 아름다워서인가 바로 엊그제 같은 것은 ...인생 중중 하다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루살이와 딱히 다를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