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의 가설무대 - 동네 젊은이들의 소인극(素人劇)이 한창이다. 부상을 입고 낙오되어 어느 민가에 숨어든 독립군 병사.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숨겨 정성들여 간호하는 여인. 병사에 대한 여인의 동정심은 어느덧 이성에의 사랑으로 변한다.
둘은 조국이 광복되는 날 함께 가정을 이룰 것을 굳게 다짐하며 무대는 클라이막스에 오른다.
그러나 여인의 정성스런 간호와 애끓는 사랑에도 보람없이 병사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일어난다. 눈물은 이미 메마르고 한 곡조 노래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할 뿐이다.
낮고 가늘게 애처롭게 흐르는 멜로디. 조용하던 관객석에 흐느낌이 파도치기 시작한다.
소인극의 히로인이 부른 이 멜로디에 새 가사가 붙어 뒷날 '자장가'로서 불려지게 될 줄은 작곡가 자신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김대현 씨가 이 노래를 지은 때는 그의 나이 29세때. 선친이 선교사로 가 있던 간도 왕청현에서 8.15 해방을 맞은 그는 곧 고향인 흥남으로 돌아왔다.
동네 청년들이 연극을 한다기에 연습장면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는 그 연극의 히로인역을 맡은 처녀가 너무 예쁜데에 놀랐다.
그는 연습구경을 구실로 자주 그 처녀를 보러 갔다.
그러다 독립군 병사가 죽는 장면에서 그 처녀가 부를 노래를 작곡하게끔 되었다.
"그때는 가사까지도 내가 지어 불렀었지요. 다 잊어버렸지만 무척 슬펐던것 같아요" 김씨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이 아름다운 곡은 이내 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6.25동란이 일어나고 이어 1.4 후퇴, 그리고 환도로 이어지는 전황은 숨가쁘게 변해갔다.
환도후 월남한 예술가들의 작품발효회가 시공관(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고 김대현씨도 여기서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다행히 자장가의 악보는 남아 있었다. 그는 동요작가 김영일씨에게 가사를 부탁했다.
몇 년 전 고향의 소인극에서 관객들을 울렸던 자장가가 그때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
소프라노 이관옥(작고, 전 서울대 음대교수)씨는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얼마 뒤 한국가곡집이 출판되면서 이 노래는 처음으로 음악제에 실렸다.
역시 시공관에서 있었던 '한국가곡집 출판 기념음악회'에서 이관옥 여사는 이 자장가를 불렀고 뒤이어 이 여사의 노래로 미도파레코드사, 유니버살 레코드가 이 노래를 취입하고 음반에 담았다.
그후 자장가는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고 방송의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이면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가곡이 되었다.
슈베르트나 브람스, 모짜르트의 자장가도 있었지만 작사자 김영일씨<아동문학가, 1984년 작고>는 김대현씨의 자장가를 단연 세계적인 수준의 명곡으로 꼽는다. 한 마디로 너무나 한국적인 멜로디라는 것.
1962년에는 故 장수철씨가 인솔한 선명회 합창단이 구미 20개국을 순방했을때 그때 마다 자장가는 열광적인 박수 갈채를 받았고 이국인의 가슴에 한국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 곡은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때도 불려졌었고 스웨덴의 구스타프왕 앞에서 불렀을 때는 왕이 몸소 앙콜을 청하기도 했다.
1968년 3월 이 노래의 악보가 우리 가곡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선교사 미스트 웨이드씨의 편곡으로 미국 펜실베니아주 셔니출판사에 의해 '한국의 자장가'란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지금도 저작료가 유가족에게 지급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자장가 없는 나라는 없다.
'자장가'란 실상 아기를 잠재우기 위한 실용적인 노래라기 보다는 아기들의 잠자는 모습 - 모든 인간들의 본원적인 모습에서 느끼는 정서를 멜로디에 담은 것이다.
양자 신태관(서울 혜원여중 음악교사)씨의 기억에 의한 김대현씨는 명랑하고 누구와도 잘 사귀었으며 유머감각이 풍부했고 시간관념이 강했다. 호주가여서 매일 일정한 시간이면 가는 술집이 있어 누가 그를 만나려면 그 술집에 가면 반드시 있었다고 한다. 한 번 맺은 인간관계는 먼저 끊는 법이 없었고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와 친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다.
그는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정을 잘 베풀어서 제자 중에서 학비를 못내면 도와 준 일이 다반사였다. 신씨도 도움받은 제자중의 한 사람이다.
부인 임윤희 여사는 환도 후부터 명동에서 '윤희 미용실'을 경영해 온 미용연구가였다. 그래서 김대현이 제자를 돕기에 앞장서도 불평하지 않고 말없이 인내하고 내조하며 가계를 꾸려갔다.
작곡가 김대현씨는 1917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담임한 교회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키운 그는 16세인 중학 2학년때 유명한 동요 '자전거'를 작곡했다.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관북관현악단과 원산실내음악단을 지휘했고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 차장을 지냈다. 한국 음악협회 부이사장 및 예술윤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고 서라벌예대 음악과장을 지냈다.
1985년 4월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대현씨는 4곡의 자장가를 작곡했다. 2곡의 가곡과 2곡의 동요다. 김영일 작사의 자장가에는 <예쁜 아기 자장>이란 부제가, 조병화 작사의 자장가에는 <잠자세 귀여운 우리 님>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콩쥐팥쥐]. 경가곡 [사랑의 곡], 교향시곡 [광복 10년]등이 있다. 80여곡의 동요와 [글로리아],[8월의 태양], [새 해여 솟아라] 등의 합창곡과 [그리운 내고향],[새우],[나의 아내여],[들국화],[낙화암],[물레의 노래]등이 담긴 '김대현 작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