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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답신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의 全文을 게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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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4 09: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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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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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가입일자 : 201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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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답신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의 全文을 게시합니다.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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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양원석"님이 올리신 "금토패문" 자료에 일부 함께 게재돼 있던,충무공의 답장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을 졸역을 무릅쓰고 번역한 일이 있었는데,벌써 1年 半 쯤 前의 일이 되었네요.세월의 흐름이 무상할 정도로 빠릅니다!
근자에 우연히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의 全文을 읽어 보는 기회가 있어,이왕이면 이것을 자료실에 올려 함께 읽으며,당시의 충무공의 심정을 다시 한 번 전문으로 느껴 봄이 좋을 것 같아 게시하는 바입니다.
또한,변변찮은 졸역을 병기하니 양해해 주시고,혹 大家의 叱正이 있다면 감수하겠습니다.
전과는 달리 번역 문체에 조금 변화를 주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
朝鮮陪臣三道水軍統制使李某謹答呈于皇朝宣諭都司大人前。
倭人自開?端。連兵渡海。殺我無辜生靈。又犯京都。行兇作惡。無所紀極。一國臣民。痛入骨髓。誓不與此賊。共戴一天。
各道舟艦。無數整理。處處屯駐。東西策應。謀與陸地神將等。水陸合攻。使殘兇餘孼。隻櫓不返。擬雪國家之讐怨。
本月初三日。領先鋒船二百餘隻。將欲直入巨濟。蕩滅巢穴。次次殲滅?無遺種。
而倭船三十餘隻。?入于固城鎭海之境。焚蕩閭家。殺戮遺民。又多擄去。輸瓦斫竹。滿載其船。原其情狀。尤極痛憤。撞焚其船隻。追逐其兇徒。馳報舟師都帥府。
領大軍合勢直搗之際。都司大人宣諭牌文。不意到陣。
奉讀再三。諄諄懇懇。極矣盡矣。
但牌文曰。日本諸將。莫不傾心歸化。俱欲卷甲息兵。盡歸本國。爾各兵船速回本處地方。毋得近駐日本營寨。以起?端云。倭人屯據巨濟熊川金海東萊等地。皆是我土。而謂我近日本之營寨云者。何也。
謂我速回本處地方云。本處地方。亦未知在何所耶。
惹起?端者。非我也。倭也。
日本之人。變詐萬端。自古未聞守信之義也。
兇狡之徒。尙不斂惡。退據沿海。經年不退。豕突諸處。劫掠人物。有倍前日。卷甲渡海之意。果安在哉。
今之講和者。實涉詐僞。
然大人之敎。不敢違越。姑觀程限。馳達國王。
伏惟大人遍曉此意。?知逆順之道。千萬幸甚。
謹昧死以復。
조선배신삼도수군통제사 李아무개가 皇朝(明朝) 선유도사대인 앞에 삼가 답신을 올리오이다.
(※ 陪臣은 원래 중국의 봉건시대,즉 周代‘에 諸侯’의 ‘大夫’가 ‘天子’에 대하여 자신을 일컫는 말이나,여기서는 자신이 조선의 신하이면서 중국의 신하임을 일컫는 말로,상대방을 높이면서 속국임을 시사하는 말.
단,이 말은 상대방을 대우하여 이르는 말일 뿐,속국임을 자인하거나 자처하는 말이 아님을 인식하여야 함)
왜인이 스스로 사달(트집,탈)을 만들어,군사를 연이어 이끌고 바다를 건너 와 우리의 무고한 생령들을 죽이고,또 도성을 침범하여 흉포한 짓을 행하고 악행을 저지름이 그 끝을 기록할 바가 없어,일국의 臣民으로서 원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이 도적떼와는 (결코) 함께 한 하늘을 머리에 이지(두지) 않기로 맹세하였소.
각도에 전함들이 무수히 정리되어 곳곳에 주둔하여 있고, 東과 西에서 응원(호응)하기로 계책한 바,육지의 神將(勇將)들과 수륙으로 합공하여 패잔한 흉도들로 하여금 한 隻의 배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원한을 씻으려 꾀하였소이다.
本月 초사흘에 선봉선 2백여 隻을 지휘하여,장차 거제(도)로 바로 진입하여 賊徒의 소굴을 쓸어 없애고 차차로 賊徒를 섬멸하여,남은 종자들을 모조리 없애려고 하였사오나,왜선 30여 隻이 "고성"과 "진해"의 경계에 난입하여 민가를 분탕질하고 남아 있는 백성들을 살륙하며,또 사로잡아 가는 일이 많은 데다,도기를 실어 내고 대나무를 베어 배에 가득 싣고 가니,그 정황을 거슬러 생각하면 더욱 지극히 통분하와,그들의 선척을 쳐서 불태우고 그 흉악한 무리들을 추격하여 몰아 내고서,말을 달려 주사도수(솔)부(수군사령부)에 보고하였소이다.
대군을 거느려서 軍勢를 모아 바로 타도하려 할 즈음에 도사대인의 선유패문(금토패문)이 뜻하지 아니하게도 진영에 당도하였기에 삼가 두세 번을 읽으매,타이르는 사연(모양)이 절절하고 지극하여 뜻을 다하였더이다.
다만, 패문에 가로대
"일본의 제장들이 우리에게 마음을 기울여 붙좇아 따르지 아니 하는 자가 없고,모두 갑옷을 걷고 군사를 쉬게 하여(또는 전쟁을 그치어서) 본국으로 다 돌아 가고자 하니,귀관은 각각 병선을 속히 본처지방으로 돌아가게 하되,일본 진영에 가까이 주둔함으로써 사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였소이다.
왜인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를 거점으로 주둔하고 있으나 이는 다 우리의 땅인데,소인에게 "일본의 진영"에 가까이 한다 일러 운운한 것은 무슨 말씀이오?
소인에게 본처지방으로 속히 돌아가라고 일러 말씀하셨는데,본처지방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아직 알 지를 못하시오? (그 곳 역시 우리 땅이오)
사달을 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고 倭(왜;일본)요.
일본인은 변(돌변)하고 속이는 재주가 만단이라,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아직 들은 적이 없소.
흉악하고 교활한 무리가 오히려 악행을 거두지 못하고,근해에 물러나서 웅크리고 있으나 해를 넘기도록 물러가지 않고 모든 곳에서 돼지(멧돼지)처럼 치받으며 인명과 재물을 겁략하고 있음이 前日보다 배나 더하오.
갑옷을 벗고 바다를 건너 갈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소이까?
이제 (그들이) 강화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실제로) 속임수를 건넜소(속임수에 불과하오).
그러나,大人의 하교를 감히 어기고 지나칠 수 없어,잠시 추이의 끝을 관찰한 뒤 국왕께 奏達하겠소이다.
엎드려 생각컨대(바라건대), 大人께오서 이 몸의 뜻을 두루 깨달으시어(살피시어),(저들로 하여금) 역리와 순리의 도리를 알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소이다.
삼가,어리석음에 죽을 죄를 무릅쓰고 써 아뢰오.
(?로 표시된 것은 웹페이지가 지원을 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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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일 |
2018-05-26 06:5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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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의 '징비록'에 이순신과의 첫 대면에서 본 용모에 관해 짤막하게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有中膽氣 ~ 亡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순신의 위인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아하고 삼가는 태도였으며,수양하고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그리고 중심에는 담기(담력)가 있었다.
~몸을 버리고 나라를 따라 죽으니,곧 평소에 축적된 바였다"고 하여 추상적인 묘사에 불과하고,무형적 정신자세만을 언급할 뿐이었으나,
이순신의 진영(陣營)에 머문 일이 있는 과거(科擧) 동기생 고상안(高尙顔,1553~1623)은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豊厚, 相又 건脣, 私心以爲非福將也
"그 언론과 전술과 지모는 진실로 난을 평정할 만한 재목이나,용모는 풍성하고 두텁지 못하며 관상은 또 입술이 뒤집혀 있는 모양이라,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복이 없는 장수라고 생각하였다"고 하였으니,동기생이라 옆에서 보아온 용모라 보면 비교적 정확한 묘사로 볼 수 있으니,
우리가 影幀(영정)에서 보통 봐 오던 美男형이나 好男형은 아닌 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정의 肖像은 상상화로서,좀 美化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용모가 어떻든 충무공의 인격과 인품은 聖人君子에 準하는,그야말로 聖雄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동기생의 "복이 없는 장수"라고 본 것이 적실하다고 볼 수 있으니,즉 평생 나라를 위한 수심에 젖어 하루라도 편안히 보낸 날이 없으며 ,功을 세우고도 오히려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신 것에 더하여 '백의종군'이라는 치욕도 감수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드님과 조카님을 전투에서 잃은 애닯음 위에 홀어머님을 보살피지 못하는 불효에도 가슴 아파하신 公의 일생은 그야말로 눈물없이는 되새길 수 없는 박복의 인생이었으니,하늘이 不仁하다고 했던가,어찌 大人의 인생은 저리 고난의 연속 속에서 끝을 맺어야 하며,소인모리배의 인생은 풍족과 안락속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지,알 듯하면서도 도시 모르겠으니,조물주의 뜻을 인간 피조물이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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