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뇌 기능에 이상이 발생한다. 격투기 시합 도중에 자주 볼 수 있는데 머리에 가해진 타격으로 인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경우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뇌신경세포 기능에 일시적으로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보통 몇 초에서 몇 분 동안 의식, 인지, 감각, 운동 등의 기능이 소실된다. 그러나 이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이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뇌 기능을 정상적으로 되돌릴 의학적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최근 그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11일 ‘사이언스’ 지는 캘리포니아대학(UCSF) 뇌과학자 수잔나 로지(Susanna Rosi) 교수 연구팀이 ISRIB란 물질이 기억력 재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보도했다. 기억력 회복에 대한 약물 효과가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뇌충격으로 인한 기억력 상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뇌과학자들을 통해 동물실험을 통해 뇌기능 회복을 돕는 ISRIB의 약물효과가 최초로 확인됐다. ⓒ td.org
ISRIB 주입한 쥐 미로 쉽게 찾아
ISRIB가 발견된 것은 지난 2013년이다. 당시 캘리포니아대 피터 월터(Peter Walter) 교수 연구팀은 충격으로 뇌기능이 손상된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한 결과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약물 유사물질 ISRIB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월터 교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ISRIB 등 관련 물질을 대상으로 인지 기능과 기억력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효과를 최종 확인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며 공동 연구를 수행할 협력팀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이 일을 위해 합류한 사람이 캘리포니아대 뇌과학자인 수잔나 로지(Susanna Rosi) 교수다. 그녀의 연구팀은 이후 공동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뇌가 충격을 받으면 그 안에서 제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스트레스 반응(stress response)이 일어난다.
특히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 안에서 28일 동안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팀은 이 기간 중 ISRIB를 투입할 경우 뇌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지 정확히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시도했다.
로지 교수 연구팀은 쥐들을 두 부류로 분류한 후 피스톤을 사용해 한쪽에 있는 쥐들에게 충격을 가했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 받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두 부류의 쥐들에게 28일간 휴식을 주었다.
그리고 두 부류의 쥐들로 하여금 특별히 제작된 미로를 따라 수영할 수 있도록 한 후 쥐들이 후에도 그 미로를 기억하고 헤엄쳐갈 수 있는지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건강한 쥐들은 미로 찾기에 쉽게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쥐들은 미로찾기에 애를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 충격을 가했던 쥐 뇌에 ISRIB를 주입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기억력을 회복해 건강한 쥐처럼 미로를 헤엄칠 수 있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쟁 중 기억상실자 등에 희소식
로지 교수는 “매일 네 번의 ISRIB를 투입했으며, 약물 효과를 통해 뇌충격을 받은 쥐들이 건강한 쥐처럼 미로를 찾아 헤엄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연구논문은 11일 미국 국립과학원 학회보에 게재됐다.
이 논문이 발표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뇌과학자 라몬 디아즈-아라스티아(Ramon Diaz-Arrastia) 교사는 “이번 연구 결과로 그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외상성 뇌손상 치료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미국 사우스플로리다대학의 뇌과학자 체사리오 볼롱건(Cesario Borlongan) 교수는 “충격으로 인해 뇌 기능이 마비됐을 경우 응급 치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치료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던 중에 수지 교수팀이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했다.
현재 동물에 머물고 있는 약물 테스트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확대되는데 대해서는 우려감을 표명했다. “동물실험에서 약물효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사람의 뇌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억상실로 인해 절망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약물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중이다. 특히 전쟁 중에 충격으로 인해 기억을 상실하고 있는 군인, 민간인이 다수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샌디아고 헬스케어 센터의 뇌과학자 브라이언 헤드(Braian Head) 박사는 “전쟁 참전 용사 중 많은 사람들이 기억 손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병원을 찾아오지만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글 역시 ISRIB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15년 구글 자회사 칼리코(Calico)는 월터 교수팀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수지 교수의 연구 결과와 관련해서도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뇌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돼 왔다. 지난해 6월 텍사스대 티모시 듀옹(Timothy Duong) 교수팀은 메틸렌블루(methylene blue) 성분이 기억과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메틸렌블루의 기억력 회복 기능이 알려진 것은 1970년대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효능을 확인하지 못해 이론으로 머물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ISRIB 효능에 대한 효능이 1차적으로 밝혀지면서 기억력 회복이란 난제를 풀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