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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7-07-06 19:47:04
추천수 13
조회수   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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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원석 [가입일자 : ]

제목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내용
 <조선상고사> - 신채호

1. 일본 입장


조선의 역사가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야 자신들의 조선 침략이 정당화되고 강압적 식민통치가 합리화된다.. 예를 들면 당파싸움이 너무 심해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든가, 전통적으로 중국에 사대하는 마음을 가진 민족이라든가, 한발 더 나아가 단군은 역사가 아니고 신화라는 둥, 아니면 고대에는 한반도의 남쪽에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내용 등~~


단군세기 등 엄연히 남아 있는 상고사 역사책을 다 없애거나 일본 왕실도서관으로 약탈해가면서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남겨놓은 이유는?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쩔어있는 김부식이 당시에도 엄연히 전해지고 있었던 단군의 역사를 빼버리는 등 중국 중심의 사대사상을 바탕으로 서술하여 독립의 의지를 꺾고 민족의 자존감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 삼국유사는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치는 등 원본을 훼손하는 방법으로 왜곡..


1914년 윤세복의 초청으로 광개토 호태왕비, 환도산성, 국내성, 장군총 등이 모여있는 옛 고구려의 중심지 서간도 지안(집안), 환인 등 우리나라 고대사 유적지를 답사했던 신채호.. 그가 1936년, 57세의 나이로 얼음장같은 뤼순감옥에서 얼어죽을 때까지 썼던 조선상고사.. 신채호는 알아도 조선상고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강단사학계와 우리 국민들...


2. 강단사학계 입장


의도가 개입되어 사실을 비뚤게 만들 경우, 이를 원래 사실대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만고불변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부왜파가 선점한 거짓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신채호가 밝혀낸 '진실'을 시궁창바닥에 쳐넣고서도 여지껏 제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과거 역사가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자기들의 목적에 따라 사과를 포도처럼 그리는 식, 프로스쿠스테스의 잣대로 침대에 맞춰 팔다리를 잘라내는 꼴로 이리저리 바꿔놓았음에도 숱한 한중일 정사와 야사 역사기록들(동사강목, 발해고, 해동역사 등)과 민간구전설화, 비석비문, 유물유적 등이 '숨겨진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왔다.


3. 문헌과 고증이 말하는 진실


'나루(강에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곳)'에서 '나라'가 유래, '나(또는 라)'에서 '내(천, 강)'가 유래, '라라(강이 있는 곳)'에서 '나라(국가)' 어원 유래, '나, 라, 노, 루, 량, 양' 등의 끝말을 갖는 지명은 대부분 '강' 또는 '나라'를 의미, 압록강, 한강, 송화강, 요하(심양), 난하(북경근처) 등 조선족이 흩어져 살던 강 유역을 '아리라'라 부름, 들판에 불을 피워 밭을 일구었기에 '농사짓는 들판'을 '불(=벌)' 혹은 한자음차로 '부여=부리=불내=벌=불'이라 부름,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단군을 통해 정치와 종교의 중심을 이뤘던 '수두'가 이두식 표현으로 '소도'라 적혀 전해내려옴('신수두'의 단군='대단군'), 쥬신(=주신=조선)을 세운 대단군 왕검은 자신을 포함한 세명의 왕, 즉 신한, 말한, 불한(한=칸=왕)을 두고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을 다스리게 함.. 대단군 왕검(신한)은 하얼빈(아사달=비서갑)을 수도로 하고, 해성(안시성=안지홀, 불조선의 수도), 평양(낙랑=백아강) 등 삼경을 두고 돗가, 개가, 신가, 소가, 말가의 5부를 두었다. 한자를 쓸 때 음을 빌려썼기 때문에 쥬신을 조선 혹은 주신 혹은 여진이라고 한 것처럼 똑같은 발음으로 쓰이지 않은 부분을 캐무시하는 강단사학자들의 무능과 게으름, 뻔뻔함과 꼴끼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4. 낙랑국(한4군 낙랑하고는 전혀 무관)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혼란하던 시절, 연나라 위만이란 놈이 불조선 왕 기준에게 귀화를 요청했다가 이후 반란으로 기준왕을 쫓아내자 기준은 배를 타고 남쪽 마한 도읍 월지국으로 갔다가 곧 마한 사람들에게 죽고 만다.. 임진강 남쪽 70여개 작은 나라를 다스리던 마한에 신조선, 불조선 유민들이 중국과 흉노 침략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각각 낙동강 서쪽 지역, 동쪽 지역에 자리를 잡고 진한, 변한의 모습을 이룸.. 본래 말조선 수도이던 평양지역에서는 최씨가 주변 25개 작은 나라를 합쳐 낙랑국을 세움.. (평양=펴라=넓은 땅..낙랑=나라(國)의 이두식 표현=넓은 땅=펴라.. 한4군 낙랑하고는 전혀 무관)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이 추모왕(광개토대왕비엔 '추모', 삼국사기엔 '주몽'으로 나옴)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이 13세손이라고 해놓은 것을 강단사학자들이 의심없이 받아들여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고구려 망하고 5백년 지나서 김부식이란 놈이 쓴 것하고,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기록해놓은 것하고 뭐가 맞겠나?


5. 사대매국매사 부식이!!


북부여 1세 단군 해모수단군(서기전 239~서기전 195)부터 시작된 900년 넘는 고구려 역사를 확 줄여버려서 신라보다 늦게 수립된 것으로 만들어버린 김부식.. 장하다!! 써글넘!! 추모가 졸본부여 공주 소서노(비류, 온조 두 아들을 둔 과부 여장부)와 함께 홀승골산에 도읍을 두고 '가우리('세상의 중심에 있는 나라'라는 뜻)'를 세운다. (이두로 쓰면 고구려) 김부식 거짓부렁이가 성공하는 것에 감탄한 모양인지, 일제강점기 때 이마니시 류 등 식민사학자들도 우리나라의 환국-배달국-대단군조선-북부여로 이어지는 역사를 싹뚝~ 없애버려 일본보다 역사를 짧게 만들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했지~~ 그들의 노력에 하늘도 감읍했는지 아직도 그들이 만들어놓은 개똥만도 못한 왜곡 거짓의 역사가 이 땅의 주류역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더 나쁜지, 우리가 더 멍청한지는 생각해볼 문제~~ㅠㅠ


6. 침략전쟁의 달인 한무제.. 결국 '북부여+위씨조선'에 대패!!


예맥 조선을 침략하여 창해군을 설치하고자 동부여의 패자 고구려와 9년간 싸웠으나 패배하여 줄행랑~~ 이런 역사는 중국 사가들에 의해 감춰진다.. 10년이 지나 위씨조선(불조선 기준왕 몰아내고 세운 난하 지역)을 침략했으나 대패하여 장군과 사신, 참모인 양복, 순체, 위산, 공손수 등을 모두 패전의 책임을 물어 기시형(죄인의 목을 베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벌)을 내린다. 승자인 고두막 왕(북부여 5대 단군(동명왕 서기전 108~서기전 86), 추모(주몽)의 할아버지)은 공을 세운 최장군에게 낙랑, 음장군에게 진번, 협장군에게 임둔(대방국의 별칭), 참장군에게 현도을 봉하였다.. (※한사군 설치 10년전에 죽은 사마상여란 사람이 쓴 <무릉서>와 이 책을 인용한 <한서>의 지명기록은 믿을 수 없는 기록)


7. 불조선 유민들은 가야로, 신조선 유민들은 신라로~~


계립령(문경새재)아래에 변한부를 이루어 함창(고링가라), 성주(벌뫼가라=성산가라=벽진가라), 고령(밈라가라=미마나=임나=대가야), 함안(안라가야=아가가라), 고성(구지가라=소가야), 김해(금관가야, 김수로왕)의 6개지역에 정착했다.. 신조선 유민들이 동해안에 진한부를 이루어 신라가 되었는데 흰말이 우는 곳의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진한 6부 중 하나인 사량부 출신→'신라'라는 이름 기원)가 왕을 하다가, 다파나국의 버려진 왕자였던 석탈해, 닭이 우는 시림의 금궤속에서 태어난 김알지, 이렇게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잇게 된다..


8. 고구려


수두시대 때부터 있던 선배제도(조의, 선인)가 이어졌던 고구려.. 태조왕 때 선배(신크마리=두대형=태대형)를 중심으로 임전불퇴의 고구려 전력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때 세명의 재상, 신가(상가, 신조선 모방), 팔치(패자, 말조선 모방), 발치(좌보·우보, 불조선 모방)을 두고 전국을 동서남북중의 5부로 나누어 각 부마다 재상과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여 동아시아 패자의 자리를 굳건히 했다.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의 뒤를 이어 고국천왕 때에는 고구려 최고의 재상 을파소가 등장, 진대법 등,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다.


그러나 왕후 우씨의 계략으로 아들 없이 죽은 고국천왕의 큰동생 발기 대신 작은동생 연우가 왕위(산상왕)에 오름에 따라 열받은 발기가 순나부 3만을 데리고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투항해버리는 뻘짓을 감행~~ 막내동생 계수에게 매국노 비난을 받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한 발기... 그러나 이 등신같은 발기 때문에 요동지역은 끝내 회복하지 못함~~


9. 만주의 평양 천도(대동강가 평양 아님)


산상왕 사후 동천왕 때 중국은 위촉오 삼국시대~~ 위나라와 동천왕이 협공하여 공손씨 멸망시켰으나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요동땅을 되돌려주지 않자 동천왕은 위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서안평을 점령했다. ‘대무신왕’ 때 이미 정복했던 '화북'(북경을 포함한 인근지역)을 되찾으면서, ‘요서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국 위(사마의, 관구검) vs 고구려(동천왕) 한판 전쟁이 벌어져 비류수에서 동천왕이 크게 승리했으나 반격을 당하고 쫓겨감..(서기 246년) 고구려인 유유가 위나라에 위장항복을 하여 장수를 찔러 죽이며 반격하여 퇴각시키고 나라를 회복하였으나, 이미 고구려 수도 환도성은 완전히 파괴된 터라 동천왕은 평양으로 천도(247년)~~ 이 때 환도성의 수많은 사서가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소각되었다..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기 180년 전 일로 물론 동천왕때 수도 삼은 평양은 대동강가 평양이 아니라 만주 서쪽으로 단군 왕검의 도읍지였던 곳!! 이때의 '평양성'에 대해 『삼국사기』는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단군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王險)성에 도읍했다’고 하였다”고 기록한다. ‘평양’은 특정 지명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구려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펴라'에서 기인)로서 서기 247년의 고구려인들은 이미 단군은 물론 단군 왕검이 도읍했던 곳(왕험성)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이걸 이마니시 류 사관을 이어받은 개자식들은 여지껏 대동강가 평양이라고 우겨댄다!! 니밀!!


10. 요동회복? 끝내 불발~~


명재상 창조리 덕에 왕이 된 미천왕(300~331) 때는 발기가 내다바친 요동땅 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즉위 16년만에 현토성 회복하는 등 요동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였다. 뒤이은 고국원왕은 선비족을 치고 영토를 확장하가 위해 지안현에 환도성을 쌓고 천도했다가 선비족 모용황에게 당하고 환도성 함락당해삐리~~ (※?선비족도 동이족계열..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분명 적이지만, '배달국-고대조선'을 잇는 우리 민족 관점에서 보면 아닐 수도 있음.. 지금 등신같은 부왜군사독재 반공세뇌 때문에 북한을 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 언제까지 이렇게 놀아날 텐가? ㅠㅠ)


11. 한핏줄이던 고구려와 백제가 철천지원수가 된 이유는?


백제 책계왕과 (옛 왕검성 자리) 대방왕 장씨 사이에 사위, 장인 관계가 형성된 가운데 285년 고구려가 대방 침략시 백제가 대방을 도우면서 처음으로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고국원왕이 환도성 뺏기고 남하를 꾀하며 369년 2만군사로 예성강 하구 벽란도(반걸양)에 이르러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와 맞서 싸우다 패배하여 대동강 이남을 백제에게 뺏긴다.. 설욕전에서는 화살 맞고 사망까지~~


12. 백제 근초고왕의 고대조선 고토 회복!!


근구수 태자는 왕이 된 후 바다건너 중국대륙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진을 정벌하고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지역을 차지하여 광대한 영토를 마련했다. (사대주의 사서 <삼국사기>에는 안 실려 있고 <양서> <송서> <자치통감>에 나온 내용)..


13. 고구려 광개토대왕


뒤를 이은 진사왕 때 국력이 크게 약해진 백제와 반대로,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자 절치부심한 고국양왕과 그의 아들 태자 담덕... 용맹한 담덕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석현성, 관미성 등 10여성을 빼앗으면서 고구려의 대원정은 시작된다... 변경(몽골지역 음산산맥)의 과려족(흉노족 후예) 6백개 부락을 깨뜨려 정벌하고,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 아신왕을 무릎꿇려 그의 동생과 10명의 신하들, 남녀 1천명과 가는 베 1천필을 받고 주종관계 서약을 맺었다. 백제와 혈족혈맹인 왜가 신라를 침범하자 광개토대왕이 직접 나서 대파하기도 했으나 광개토대왕이 목표한 바는 북진이었고 남쪽은 언제나 부차적인 문제였다. 북방 선비족 모용씨와의 전쟁에서 10년간 매번 대승, 마침내 요동에서 요서까지의 땅을 차지하였으나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 아들 장수태왕은 아버지의 뜻을 버리고 남진정책을 추진한다.. 동족의 나라를 통일한 후 다른 민족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이동하고 백제를 압박했다..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은 일시적으로 백제를 격파하였으나 오히려 신라+백제+가라(임나(대가야), 아라) 동맹이라는 결과를 빚는다.. 이후 백제 동성왕은 다시 힘을 키워 고구려와 위나라를 물리쳐 바다건너 산동, 절강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속국으로 만든다. (신라와 중국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지워버렸으나 당시 동성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로 증명된 사실)


"(동성대왕 당시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렀다." <구당서>


14. 중국(수·?당)의 침략전쟁


수문제가 중국 통일 후 무례한 국서를 영양왕에게 보내 화를 자초한다.. 병마원수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요서 북경 지역)으로 나아가 대파~~ (중국 측 <수서>의 기록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곽잡록>에 전한다.. 사대주의 사서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강' 자도 안 나옴) 아들 수양제가 1년간 전쟁준비 후 113만명을 끌어모아 군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천리(400km)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쳐들어왔다. 수양제가 직접 이끈 어영군만도 그 뻗친 길이가 80리나 되었다. 고건무(영양왕 동생)는 평양의 선봉대를 대파하고 군량선을 모조리 침몰시키는 패강(대동강) 전투 대승으로 승기를 잡았다. 이후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 대첩으로 30만 몰살, 이후 오열흘(요동성) 전투에서 을지문덕의 기습에 의해 대파~~


북수남진 정책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연갓쉰)을 제거하려 하자 선수를 쳐서 이들을 오히려 먼저 제거하고 왕의 조카 보장을 왕으로 세운 이후 고구려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 당태종은 20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에게 막혀 대패하고 화살에 눈을 맞아 북경까지 거지꼴로 간신히 도망갔다가 그 상처가 도져 30개월만에 뒈졌다...


15. 천하잡놈 사대매사 김춘추의 외세도입 덕에 백제멸망 ㅠㅠ


대야성을 지키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딸이 의자왕의 백제군에 목이 잘리자 복수에 눈이 멀어 민족의식 따위 개나 줘버린 후 중국의 개로 전락해버린 천하잡놈의 시키(신라 고유 연호 버리고 당의 연호 사용, 당의 의관을 씀, 우리를 모욕하고 멸시한 중국역사서 퍼뜨림)!! 부여성충이란 희대의 재상 덕에 신라 땅 10여개 성은 물론 중국 월주(회계, 양쯔강 유역으로 상해 아래쪽)까지 점령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던 의자왕은 모사꾼 김유신의 첩자 조미곤(삼국사기에는 '조미갑'으로 나옴. 부산현 현령)과 무당기녀 금화를 통해 멸망의 길을 걸었다. 백제의 충신들 윤충, 성충, 흥수를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몰자 이에 홀라당 발라당 넘어간 의자왕.. 성충과 흥수의 '탄현에서 신라를 막고, 백강에서 당을 막으라'는 충언을 캐무시한 결과 백제의 찬란했던 7백년 종사를 반민족 연합세력(신라+당)에게 내주고 말았다... 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바라봐야 한다는 빙신같은 외교론자(+실력 양성론자)들의 줏대없는 외세구걸의 결과가 어떠한지 역사에서 배워야~~ 찬란했던 동북아 상고사 역사와 양쯔강유역 월주에서 북경을 거쳐 요동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홀라당 내다바치고도 정신 못 차리고 미일에 놀아나며 북한을 '주적' 취급하는 작금의 개한망국 반민족 부왜파 지도층(4776마리 반민족 역적의 후손들)과 그들이 장악한 언론과 재벌정권에 홀라당 발라당 속아넘어가는 무뇌빙신 같은 5천만 국민들~~


16.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 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 할 수 없다" - 신채호(1931)


내가 보기엔 이 나라에 미래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이 번영한다면 역사를 잊지 않은 민족 입장에선 억울할 법하지 않은가? 배달국, 고대단군,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와 요동(고국천왕 동생 발기의 투항 이후 회복못함), 요서(조선초까지 우리 영토)를 아우르는 우리 영토를 기꺼이 시궁창에 내다꽂는 등신머저리 매사매국노들이 주류 코스프레하는 나라, 중국동북공정 돕겠다고 수백억 세금 꽂아 문헌, 고증으로 폐기처분이 마땅한 조선총독부발 한4군 한반도설이나 주장하는 매사매국노들 먹여살리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①?35년간 역사와 영토와 민중을 마음껏 수탈했던 일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무기한 신탁통치를 하려 했던 미국(※오히려 이를 '무한정'이 아닌 ?5년으로 한정하고 이후 단일 자주독립국으로 독립시켜주자는 소련을 '적'으로 규정시킨 매국오보지 동아일보를 아직도 90만부도 쳐보는 민중), ②한국전쟁 발발후 731부대전범 이시이 시로와 함께 세균전특수기구 ‘심리전략위원회’를 구성, ‘이륙작전(세균폭탄 투하작전)'을 세워 70kg짜리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균에 감염시킨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를 담은 세균폭탄을 북한 169개 지역, 중국동북부, 지리산과 무등산 등 38선 이남의 주요 전장에 뿌린 미국, ③개미새끼만 보이면 무조건 네이팜탄 등을 뿌려 2백만 북한민중을 폭살시킨 미국, ④현재도 '주피터 프로그램'을 통해 용산, 오산기지에 10년간 탄저균을 보내 세균폭탄 실험해온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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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전의 2017-07-06 21:15:34
답글

결국 환단고기의 지지자들이 갖는 관심은 강역이지 사람은 아닌거 같습니다
솔직히 고대 한반도인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여러 소국) 들이 지금과 같은
한민족에 대한 동질성이나 같은 민족이라는정체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운동가로는 진정 존경하느 바나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적인
능력은 전혀 검증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또한. 신라왕실의 직계이나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를기록해 놓은점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 더욱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피 튀기게 싸운
역사를 돌아보면 말이죠~~~~!!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평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한 나라의 유물만 보더라도
낙랑이 위치한 즉 한사군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있었다는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결국 교차검증이 불가한 역사는 역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민족이 자존심은 결국 영토가 아닌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야가 이나라 상고사를
확대 해석하는 일부 부류가 문제라고 봅니다
철저히 검정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역사적 주장은 자칫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전의 2017-07-07 00:32:33
답글

굳이 삭제하시지!마세요~~저또한 제가!옳다는게 아니라 의견을
피력한거 뿐입니다
역사란게 항상 일방적으로 흐르게 되면 결국 탈이난다고 생각합니다

황준승 2017-07-07 11:12:05
답글

[고대 한반도인들이 지금과 같은 한민족에 대한 동질성이나 같은 민족이라는정체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 정말 그렇겠네요. 공감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알고보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국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현재와 미래의 후손들을 한 국가 내에서 민족 자긍심으로
결집 시키려는 목적도 있겠죠.
학자들은 호기심이나 학문적 성취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구하기도 할테고요.

미국이나 호주는 역사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굳이 억지로 사료도 희박한
고대 역사를 애써서 찾아내려고 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긴 미국 역사도 어찌보면 유럽의 문화적 역사까지도 감안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역사는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기부터라는
생각도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솔직히 고려시대 문화에 대해 우리가 느끼거나 영향을 받고 있는게 없잖아요.



위에 제가 한 말 모두 잡소리고, 사실은 저도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업적이나 작품들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황준승 2017-07-07 17:18:53
답글

오해하지 마시고요.
저는 우리 역사를 경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동학, 천도교를 건학 이념으로 하는 고등학교를 나왔기에 민족적 자긍심이 높은 편입니다.
가끔 문득 저런 생각이 들 때도 있기에 언급한 겁니다.

김도범 2017-07-07 17:53:46
답글

저는 역사 문외한으로서 가끔 궁금한 것만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수준인데
정말 궁금한 점이 어느 역사가 식민사관이 아닐까,걸러 볼수 있을까,입니다.

https://youtu.be/AYYhAv3LITM?list=PLvjirENKg8pCsOFu9anMjL-azIDjcS13f
https://youtu.be/hDYd02yJkMo

저는 이 강의를 잘 봤습니다만 이 강의도 & 도올도 식민 사관이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대체 맞는 역사는 어디서 볼수있는지,정말 궁금합니다.

인조에 대한 평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선조,인조는 그냥 아버지 잘 만난 무능한 왕으로 보이거든요.

병자호란은 이순신의 신화적 승리후 불과 30년후에
또 역사는 전처를 밟은,그 막강한 수군은 어디갔는지...

kbs 라디오 주말 심야 방송에 역사를 찾아서,라는 프로가 있는데
가끔 잘 듣는데 거기에 나온 내용을 옮기면 식민사관이라고 지적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당히 오랜 프로인데 토렌트 파일을 구해 전편을 구해 가끔 듣는데
개인적으로 과거 민중들의 삶이 궁금한데

배울수있는 우리 역사는 왕실의 역사만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을 쫒아다니며 기록하는 사관이 있어 그렇겠지요.

19세기 외국인들이 조선을 방문했을때 조선의 노비들은
서양 노예보다 비참하다,양반들은 호위호식,나라가 일제에 넘어가도
남일처럼 무사태평하다,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독일 왕실 방문자는 조선 항구에 도착한 첫 인상이
시체 썪는 냄새였다고 하더군요.

길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방치되어 있는데
사대부가들은 호위호식 했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심산이 많아 수렵 조건이 좋은데
왜 그리 굶어죽은 이가 많았는지,늘 궁금했는데

세상 모든 것은 임금 것이여서 물고기도 잡을수 없었고
물고기를 먹으려면 열마리중 아홉인가,스무마리중 열아홉인가,를
관하에 바쳐야 했다더군요.

호남,남쪽은 바다에 뻘이 있어서 기근에도
산낙지라도 잡아 먹을수도 있었을텐데,임금 것이라서 먹을수 없던 것이지요.

반면 기근에 왕실 지침서 구황작물중에
흙을 먹어라,도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 귤,있잖습니까.
예전에는 귤은 왕만 먹는 음식으로 귤나무마다 포졸을 세우고

날마다 숫자를 확인해서 한개라도 틀리면 목을 뱄다고 합니다.
예전엔 귤 나무가 많지 않았겠지만 왕 혼자서 그 귤을 다못먹어도 그리했다는.

그리고 왕묘가 훼손되면 묘지기 삼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왕들의 횡포가 심했다는 생각인데,

기타등등...그저 근래 보고들은 이런 것들도
식민사관이 아닐까,헷갈립니다.

하멜도 탈출안했다면 거의 죽었을거라는데,
일본에 가서는 잘 대접 받고 활동했다는 것도 식민사관적 관점인지.

에디슨이 조선 왕궁에 최초로 전기 등불을 달아 주었는데
이후 왕실의 호출이 있었는데 에디슨이 안갔다는데
혹시 왔다면 에디슨이 죽었을거라는 설도 있더군요.

서양 과학 문명사를 보면 원천 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많지만
아주 잘 써먹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 사회와 서민들의 자유도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눈뜨면 죽어라고 개돼지처럼 주인님 논밭 가는 사회에서는
만유인력이니 지구가 둥글었다등은 나올수가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이미 1900년대 초에 항공 모함을 만들었습니다.
독일도 전쟁 말에 일본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 최초 항공 모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잠수함이 아주 작은 잠수함이 모의 전쟁에서
미 항공모함 선단을 혼자서 모두 격침,전멸시켰다고 합니다.

핵잠수함도 격침됐다고 합니다.
잠수함 건조 기술을 제공한 독일 측에서

잠수함을 한번 보고 만든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라고 극찬을 했다고 하는데 한술 더 떠서 기존 독일 잠수함 결함도
발견,업그레이드 했다고 합니다.

아이큐도 우리가 늘 세계 1위 이지요.
민족주의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리 민족이 뛰어난 것은
정확한 사실이라고 봅니다.

예전 mbc 다큐 삼성 vs 소니를 보면
삼성이 90년대에 비디오 기술 배우려고 삼성 기술자가

소니 본사 앞에서 설계팀 기술자를 기다려 쫒아다니며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 소니가 이미 90년대 말에 삼성에게 tv 기술을 좀 가르쳐 달라,
기술 제휴하자 했었지요.

스마트폰,디지틀 가전등은 현재 우리가 세계 최강이고
다른 중공업,여러 첨단 분야도 그런게 많습니다.

세계 지도를 펼쳐보면 이처럼 작은 나라에,
외국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인지 불과 50년도 안되어서
이런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고 봅니다.

물론 어느 국가 사회나 이른바 작게 잡아도 10%론,으로
극악한 새누리,일베 박사모 같은 사회악이 있기는 하지요.
각설드리고...

결국 제가 줏어본 것들이 모두 식민 사관 같은데
대체 어느것이 식민사관인지,정말 헷갈리고
걸러 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yws213@empal.com 2017-07-07 18:27:23
답글

현재 우리의 역사 탐구는 했더라 하던 시기에서 다양한 과학적 토대와 검증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주변국의 사료와 견주어 보며 그 실체를 제대로 찾아가려는 시기에 있습니다.
여전히 두고 봐야 할 미지의 내용들이 많습니다.

진성기 2017-07-07 18:53:49
답글

전 역사를 전공하지 않아 그냥 읽은 책들을 종합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갑니다.
우리 문화의 원 뿌리가 중국 대륙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에 걸쳐 있었는데
상고사 때엔 거의가 중국 대륙쪽에 우리 문화의 뿌리가 있었기에

이 이전에 우리가 전승해 왔던 것들은 일제에 의해 많은 부분이 훼손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북환과 당시 중공과 그에 대한 학술적 교류가 전무한 상태였기에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역사를 바로 잡을 기회가 없지 않았나 생가합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마저 친일매국노들이 판을 치던 세상이엇기에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역사가 그대로 정설인양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합니다.

으리 지난 역사를 과장하여 미화 시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의상황이 나쁘다고 지난 날을 미화시키면 지금 더 비참해질 뿐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상고사는 아주 화려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만들어 냈고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 낸 민족이니까요.
황하문명보다 2천년 이상 앞서 생긴 요서 문명과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국가인 하 와 은도 동이의 나라로 알려지고 있고
결국 중국 한족의 나라인 주나라에게 멸망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중국대륙에서 물러 너게 된셈에죠.
하 혹은 은 나라에서 내부의 정치적 갈등에서 나라를 떠나 동쪽으로 간 망명집단이 고조선을 세운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사기에 적힌 석국이란 나라가 신화의 나라가 아닌 요서문명에서 발단한 국가가 아닐까.
어쨋던 최초의 문명으로 부각되고 있는 요서문명이 이 동이문화라고 발굴됨에 따라 중국은 동북공정에 이어
요서 공장 까지 진행 중입니다.
예전에 나쁘게 폄하했었던 치우도 이제는 자신들의 조상신 반열에 오리고 있지요

중국은 우리와 달리 민족에 기반을 둔 역사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지리적 기반을 둔 역사를 이야기 하니가 우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네요
중국이 우리처럼 민족에 근간을 둔 역사를 기술하면 많은 시간들 요 금 원 청 까지 그들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 시간은 그들은 식민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처럼 민족 사관을 주장 할 수가 없겠죠

김좌진 2017-07-07 18:56:38
답글

우리는 아니라도, 중국의 기원전 2세기는 이미 개인의 대화까지 기록될 정도로 꼼꼼하게 역사로 남기던 시대입니다.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 아예 삼국은 중원에 있었다...
우리는 문자도 없이, 역사를 남기지 못한 문명이었지만 중국은 아니라는 말이죠.

개인적으로 역사를 남긴 중국이 부럽지만, 그들이 일부러 한반도의 고대사를 찾아내 말살시켰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남죠.
이를테면 손빈의 병법이 무덤에서 죽간으로 발견되는 식의, 혹은 사해문서같이 갑자기 문헌이 쏟아져 나오는 식의 발굴이 우리에게는 없었어요.
경주 가보면 신라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아있지요. 그런데 책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일강 2017-07-09 08:57:26
답글

한민족은 혈통적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그 문제를 건너 뛰면서 생기는 문제가 환빠와 식빠입니다.
환빠는 한반도 밖의 역사 집단을 우리민족이라 말하고, 식빠는 한반도 밖은 우리민족이 아니라 하는거죠.
우리민족, 우리역사의 정의도 못내리고 어정쩡한 역사관이 충돌하고 있지요.
한반도 안에서도 고인돌 속에는 백인의 유골이 넘치고,
고구려 주몽시대 몽골 부근에도 백인종이 널려 있었죠.

삼국사기의 김부식을 나무랄 필요가 없습니다.
강단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합니다. 식민사관의 연장선에 있어요.
자국의 고대 역사를 타국에서 더 세세하게 기록해준다는 해괴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한반도 사관들이 일본의 고대사를 세세하게 잘 기록해준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승헌 2017-07-10 11:15:30
답글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매우 왜곡되고 조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로 결정짖는 국정역사교과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역사도 사실은 진실이 아닌경우가 태반이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사료가 너무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지요.

고작 2000년에서 1100년사이에 있었던 사국시대도 사실은 신화의시대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웃기는 게 많지 않나요?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황당한 얘기라든가...(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시대에 알에서 태어나?)

덕택에 방금 "조선상고사"를 주문했습니다.

부승헌 2017-07-10 11:30:32
답글

저는 우리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시대는 조선왕조 518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동을 정벌하고 오라고 했더니, 작은나라가 대국을 침범한다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뭔 개족같은 핑계 대고 쿠데타 일으켜서, 명청에 조공을 주고, 책봉을 받는 나라로 전락시켰습니다.

518년동안 남은 것은 단 하나 한글 밖에 없죠. 그것도 500년가까이 무시당하다 현대에 와서야 대접 받고 있지요.

위에서 나라망쳐먹고, 결국은 국민들이 다시 일으켜왔던, 국민들만 불쌍한 나라...

역사를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가 판단됩니다.

모든 현대 문물을 단어하나 까지 일본것을 그대로 배끼는 학자들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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