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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시선 - 연개소문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7-01-31 06:14:39
추천수 19
조회수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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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원석 [가입일자 : ]

제목

단재 신채호 선생의 시선 - 연개소문
내용


블로그에 실린 글을 올려 봅니다.



CHINA(支那)가 두려워 한 연개소문




                                  [그는 조선역사 4000년 이래 최고의 영웅 - 단재 신채호]


 

원문 주소 : blog.daum.net/yoosoo42/79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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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쯤 되면 양만춘 장군과의 관계도 늘어두어야 좋을 듯하여 추가합니다.



원문 주소 : nk-koguryo.blogspot.kr/2012/09/blog-post_9145.html



양만춘 장군



 




양만춘 장군의 10대 시절



10대 후반에 영양왕의 친서를 가지고 돌궐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 양달문을 따라 돌궐에 갔으나 수 양제의 계략으로 

아버지를 돌궐에서 잃었고 겨우 탈출해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아버지 친구인 을지문덕의 요청으로 

유구왕국에 육군 훈련 조교로 가셨다가 수 양제의 명령을 받은 내호아가 

50만대군으로 유구왕국을 치자 결국 유구왕국은 멸망하고

친구인 유구사람 손가영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강도에서 같이 여러 노예들과 함께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 때 쓸 전함 제조를 하게 됩니다.







양만춘 장군의 20대 시절.



손가영과 함께 고구려 밀선으로 탈출해 둘다 모두 고구려군에 장교로 활동 하십니다.

20대 때 여수대전이 일어나자 기병 소사자로 활약하다가 중국에 포로로 잡혀가십니다.

이때 고구려 포로들은 중원 곳곳으로 퍼지게 되는데 양만춘 장군이 간 곳은 

당 고조 이연이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이후 수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고 돌궐이 침공해 오자 

수 양제는 이연에게 돌궐 진압을 명합니다. 이때 양만춘 장군은 말을 잘다뤄서

이연 및 이연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마여우" 라고 불리셨는데

그래서 이연이 돌궐을 진압하는곳에 같이가게 됩니다.

이때 수나라로 처들어온 돌궐군의 지휘관은 "부랴트"로 엄밀하게 말하면

양만춘 장군의 아버지 양달문이 죽은 이유는 부랴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랴트는 사실 엄청난 맹장이기도 해서 수나라 장수 여러명이 죽어나갔고

여느 장수 못지 않은 기량을 지니고 있던 이연의 3번째 아들 세민까지 나갔지만

부랴트의 무용에 이세민은 위험하게 됩니다.

그때 양만춘 장군은 복면을 쓰고 자신이 돌보던 말을 타고는 부랴트를 향해 달려가서

그와 겨루게 됩니다. 

순식간에 달려나가자 수나라 장수및 여러 사람들이 말릴 시간도 없었으며

더욱 놀랄만한 일은 창을 잘 다루는 

그 대단한 부랴트를 장검으로 단 5합만에 베어버린 일이었습니다.

수나라 장수 및 이연과 아들 건성, 세민등은 양만춘 장군을 알아보고는

양만춘 장군을 관우 운장에 비교해 자신의 밑에 두고자 했지만

양만춘 장군은 거절하시고는 이연의 아들 이세민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자신 및 중원 곳곳에 퍼져있는 고구려 포로 전부를 고구려로 반송해 달라고 합니다.

이연은 때가 되면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연이 돌궐을 진압하였지만 이미 중원은 민란과 반란으로 가득하였고

세째 아들 세민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중원의 패자가 되라고 설득합니다.

이연은 거절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하게 되고

이때도 양만춘 장군 및 고구려 포로들의 힘으로 장안성을 함락시킵니다.

장안성을 함락하자 이연은 자신의 밑에 있는 모든 고구려 포로를 고구려로 되돌려보내고

나머지 포로는 중원의 패자가 되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양만춘 장군은 고구려로 돌아왔는데 이때 성군이자 명군이던 영양왕 고원이 죽습니다.











양만춘 장군의 30대 시절



고구려로 돌아온 양만춘 장군은 이후 태학 무과반의 교수가 되어

활동하시고 그 유명한 "연개소문"도 가르치시는 학생중 한명이었습니다.

교수로 활동 하시다가 여수대전이후 사라진 을지문덕을 찾으러 돌아다니시다가

을지문덕이 백두산에 있다는것을 아시고는 찾아가 천지에 까지 도착해서 을지문덕을

만나고는 돌아올것을 부탁하지만 

을지문덕은 장수가 전쟁이후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면 반란 의심만 받게 된다며

거절하고는 자신이 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집필한 바이칼호에서 일본까지 그려진 

동북아시아 대지도와 자신이 집필한 모든 병법과 지략을 담은 책을 

양만춘 장군에게 줍니다.

백두산에서 돌아온 양만춘 장군은 계속 태학 무과반 교수로 활동하시다가

원광법사의 부탁으로 신라의 화랑이던 김유신이 기생 천관과의 연을 맺으려다가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못하자 버려진 천관의 아들 군승을 아들로 입양하게 되고

중국에 포로로 있으실때 잘 알고 지내던 위징의 딸 위소연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중원을 평정한 이연은 모든 고구려 포로를 약속대로 반송합니다. 











양만춘 장군의 40대 시절



태학 무과반 교수를 그만 두시고 요동의 장수로 활약하시다가

결국 안시성 부성주가 되십니다.











만춘 장군의 50대 시절



안시성 성주가 죽자 안시성 성주가 되셨고 옛 제자인 연개소문이

태학 무과반을 졸업한 신진 세력들 

(예 : 연개소문과 같이 태학을 졸업한 신진 장수 검모잠)

및 영류왕 고건무의 친당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들과

(예 : 양만춘 장군의 친구인 당시 수군제독이던 손가영)

손잡고 함께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 고건무를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란 직책을 만들어

내정과 외정을 모두 지휘하자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은 분노하여 안시성 군사들과

당시 양만춘 장군의 인품과 능력을 믿고 따르던 여러 다른 성주들과 함께 

평양성으로 처들어가려 했으나 여러 친지들과 동료들의 반대로 그만두었고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죄를 씌어서

(실제로 양만춘 장군이 풀어주었는지 김춘추 스스로 꾀를 내어 풀려났는지는 알수없음)

오른손 손목을 칼로 잘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과 성주의 요청으로 안시성주 직 만은 유지하게 됩니다.

그후 여당대전이 일어나자 연개소문은 요동의 여러 성들의 지휘권을

양만춘 장군에게 줘버리고 요동성과 비사성등을 함락하고 안시성까지 온 

당태종 이세민군과 그 유명한 안시성 혈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세민이 안시성 혈전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안시성 혈전 자체가 정사가 아니고 야사입니다. 같은 야사라면 신빙성이 더 높은 이야기가 사실 가능성이 높고 제가 이제부터 하는 내용이 신빙성이 더 높습니다,.)







* 이세민이 애꾸라는 소문이 퍼진 이유



안시성 혈전 전 요동성등 여수대전에서는 꿈쩍도 않하던 여러 성들이 차레차례 무너지자

연개소문은 사태의 급박함을 느끼고는 자신 과 같은 신진 세력인 고연수와 고혜진을 요동으로 급파합니다. 당시 고연수와 고혜진이 지휘하던 병력은 15만이고 당군은 30만이었습니다. 병력 차이는 2배였지만 이제까지 보여준 고구려군의 무용으로 봐서는 당군은 승리 자신이 없었고 이세민은 지략으로 고구려군을 양분하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지휘하던 7만은 결국 당군에게 전멸을 당하다 시피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을 하여 당나라에서 출세까지 하였죠. 하여튼 이 고구려군 양분 작전을 시행하던중 고연수의 부장 중 한명이 이세민이 있던 산을 습격하여 이세민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세민은 친위군이 고구려군을 저지할 동안 도망하였고 당군이 달려와 이세민을 습격한 고구려군을 격파했지만 도망치다가 거대한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딪힌 바로 치료를 할 상황이 아니었고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하였지만 의사가 

냄새가 고약한 약을 상처부위에 바르고는 붕대를 감고 한달동안 풀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 모습이 꼭 애꾸 같아 사람들 사이에 황제가 고구려 원정 갔다가 안시성에서 화살 맞고 애꾸가 되었다라고 소문이 퍼지자 스스로 붕대를 풀어버려 그 상처로 두통이 이세민의 고질병이 되었다고 합니다.



안시성에서 대 혈전을 벌였지만 겨룩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당군이 퇴각하자

연개소문은 양만춘 장군과 손가영에게 당나라를 침공하게 합니다.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

려 원정으로 국력이 약해진 당나라는 쉽게 무너졌고 양만춘 장군은 요서를 넘어 

북경까지 점령하고는 북경의 이름을 고려성이라고 지었습니다.

한편 손가영은 수군을 이끌고 산동에 진출하여 고려진을 세웠습니다,.

고구려는 요서와 북경과 산동을 이세민이 죽기전까지 지배하다가

세민이 죽으면서 고구려에 대한 모든 무력 행동을 멈추라고 유언을 남기자 

점령한 땅을 모두 당에 넘기고 고구려로 귀환하게 됩니다. 

고구려로 귀환후 절친한 친구 손가영은 병으로 죽게 됩니다.











양만춘 장군의 60대 시절



고구려로 귀환후 안시성주로 계속 활동하시다가

안시성주가 되신 이후부터 계속 늘어가던 양만춘 장군을 따르던 무리들이 너무 늘어나고

그의 동생인 연정토마저 양만춘 장군을 좋아하고 따르게 되자

연개소문이 이를 두려워하여 반역 죄를 뒤집어 씌어 감옥에 하옥 되셨고 

7년 동안 나오지를 못하십니다. 

60대 후반에 비로소 다시 당이 다시 강해져 당 고종이 아버지 태종의 유언을 어기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다시 안시성주로 복직되시고 요동 전체 지휘권을 손에 쥐시고 

당의 침입에 대항해 싸우게 되십니다.







양만춘 장군의 70대 시절~사망



당의 침입이 잦아지던 때 마침내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권한을 남생, 남건, 남산이 3분하여 가지게 되었지만

세 형제를 따르던 무리들이 서로를 시기하여 형제들을 싸우게 만들었고

마침내 연남생은 자신의 권한을 되찾기 위해 

당에 항복하여 당의 침입에 앞잡이가 되고 맙니다.

연남생이 자신이 지배하던 성을 당나라에 넘기자 당나라는 요동을 쉽게 점령하기 

시작하였고 내분 및 동맹국 백제의 멸망등으로 

고구려의 군사력 역시 급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당나라는 요동에서 까다로운 성만 내버려두고는 평양으로 진격하여 압록강에서 

연남건이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다가 

패배하고 퇴각하게 되지만 당고종 대신 정사를 다루던 측천무후의 명령에 의해 

당은 다시 침공하여 압록강에 모든 힘을 쏟아 넣고 결국 고구려는 압록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평양성으로 후퇴합니다.고구려는 마지막으로 평양성에서 농성 하지만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연남산과 보장왕등 신료들이 항복하고 평양성을 나가자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사기를 잃고 평양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그 이후 평양소성에 들어가 항거하던 연남건 및 여러 장수들 역시 

평양소성이 함락되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이당시에도 요동에는 수많은 고구려 성이 남아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몇성을 들자면 요동성,안시성,북부여성,풍부성,신성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의 공격으로 하나하나 무너지고 

양만춘 장군이 성주로 있으시던 안시성이 마지막으로 남게 됩니다. 

그 이후 성안의 군량미 및 모든 양식은 바닥나게 되고 양만춘 장군은 

두 아들과 마지막 남은 군사 5000명 과 함께

(평양성 함락 직후때 20000명이였고 부성주 고연수에게 신라와 합동작전을 명해 

10000명을 주어 나가게 했다가 고연수는 이후 안시성으로 돌아갈수가 없자 

연정토의 아들 연안승을 따르게 됩니다. 그 이후 마지막 남은 10000명이 

당과 전투 및 식량 부족으로 조금씩 죽어 5000명이 남음) 

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간의 군을 향해 돌격을 하시고 두 아들인 양군승와 양선백과 800명

은 살아서 포위망을 뚫고 고구려 수군이 점령하고 있던 대장산섬으로 가서 함께 신라로 

갔지만 양만춘 장군은 당나라 군사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구려군 4200명과 함께 전사하게 되십니다. 

자 여기가 끝입니다. 고구려 후기 최후의 진정한 용장이자 지장이셨던

양만춘 장군을 사람들이 너무 모르는것 같아서 제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썼습니다.

기억이 나는 대로만 썼기 때문에 약간 실제 정사와 연관되는 부분이 틀릴수 있으니

유의만 하시면 이해하시는 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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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철 2017-01-31 12:18:32
답글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yws213@empal.com 2017-01-31 20:40:48
답글

퍼즐처럼 나누어져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보다 보니 꿰어 맞추어지는 부분이 보이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는군요.
어릴 적에 선친께 한문을 좀 더 일찍 배운 것도 동기가 되는 듯합니다.
일 예로 몽고에 있는 무릉이라는 도시를 다큐에서 본 뒤로 그 무릉이라는 몽고어가 물을 뜻하는데,
무릉도원이 막연히 이상향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몽고의 무릉이 아닐까 싶었는데, 김정민 교수의 역사 강의 속에서
복숭아의 원산지가 파미르고원이라는 이야기에 숨겨진 궤가 딱 맞아 떨어져 가더군요.
고대사에 대해선 우리가 아닌 남들이 우리 역사를 더 소상하게 연구하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기에 한번 깊숙하게 캐어보는 중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에 속마음이 좀 더 불타오릅니다. ^^

박헌규 2017-02-01 01:01:29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한 어부가 복숭아 꽃이 만발한 이상향을 보았던 것을 노래해서 그 후로 무릉도원이란 말이 생겼는데
시의 첫줄에 진나라 어느 왕대의 무릉 사람이 어쩌구라고 지칭을 합니다
진나라 무릉이라는 지역은 호남성에 있는데 지도로 보면 중국의 남부지역입니다.
몽골의 무릉은 우연히 명칭이 같을 뿐 별 연관성은 없어 보입니다

yws213@empal.com 2017-02-01 01:06:46
답글

헌규님이 아는 이야기는 저도 아는 바입니다.
몰라서 쓴 것은 아니지요. ^^
도연명은 허구를 지어낸 것이죠.
제 관점에선 무릉의 홉스굴 호수와 그 천혜의 아름다움이 옛말로 하자면 그런 곳을 동경하여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며 고리를 역추적해 나가는 중입니다.
후난성에 있는 무릉은 북경대에서 중의학하는 친구에게 알아 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일강 2017-02-02 00:08:55
답글

그 유명한 호남이야기가 나오네요.
초기 조선시대의 위치가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금의 호남은 오류라고 합니다.(전라도)
호남이란 바다같이 큰 호수 남쪽을 말하는데 큰 호수가 한반도에 없지요.

중국의 호남이란 동정호 아래에 있고 동정호에 무릉이란 곳이 있습니다. - 신동국여지승람

한국의 재야 사학자들이 조선시대의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때문에 요즘 난리입니다.
지리지에 나오는 지명이 한반도와 일치하는게 드물고
중국 지리와 일치하는 곳이 너무 많아요.

박헌규 2017-02-02 00:57:41

    문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또는 개척자의 입장에서 기존의 지명을 차명해서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떤가 봅니다.
무작정 중국의 지명을 가져다 무슨주 무슨주 (나주 완산주 춘주 등등)하고 이름을 붙였는데 중국 사신으로 부터 중국의 주와는 비교도 안될 단위에 주를 붙였다고 한소리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느때인가 주 대신에 산과 천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리 지명중애 산도 없는데 산이 붙었거나 큰 강도 없는데 천이 붙은 지명은 그래서 일겁니다.

미국이나 캐나다도 영국지명을 차용한곳이 많습니다. 때로는 뉴-어디어디라고 하기도 하지만
고향에대한 자부심이거나 귀찮아서인지 그냥그대로 쓴 곳고 많아서
토론토에서 런던(디트로이트 가는 중간애 있슴)까지 가는 도중애 익숙헌 여러 영국 지역명이 나옵니다.

호남은 김제 벽골제(동정호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이남 이라서 그랬다는 말도 있습니다.
핑계인것 같고 그냥 중국식으로 차명해서 쓴것이겠죠.

이일강 2017-02-02 02:11:05

    지명에서 끝나면 문제는 간단한데요.

동국여지승람은 그 지명에 대한 인문학적 설명을 겸하는게 문제 입니다.

특산물이 뭐가 있고... 유명한 장소가 뭐가 있으며... 그 지역 유명인물에 누가 있다.
게다가 그 지역은 어디와 가깝다.(동래와 대마도는 걸어서 도착할만큼 가깝다는둥...)
그 지역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도 설명합니다.

그지역의 명칭 변경사까지 나열하고 있기에 추적이 가능합니다.

이일강 2017-02-06 05:25:39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 부근에는 대마도와 주필산이 존재 합니다. 현재는 부산 - 동래 개념

대마도는 원래 신라의 영역이었으나 어느날부터 왜인이 하나둘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조선초에 땅이 척박하여 주민이 굶주려 국가에서 양곡을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실겁니다. 그리고 대마도를 주마점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주마뎬시(??店市, 주마점시)
.
대마도는 현재의 상식으로 납득이 되실 겁니다.
.
.
동래현에 주필산이 존재합니다. 동국여지승람이 말하는 주필산은
주필산 전투(駐?山 戰鬪)는 고구려-당 전쟁 중에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과
이에 반격하려는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동원되어 교전하였던
중국 한족과-한국 한민족 간에 벌어진 고대의 대규모 전투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주필산이 동래현에 있다고 합니다.

동래현에 대마도, 주필산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은 상세하게 역사적 배경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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