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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과 불가리아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6-06-16 03:50:47
추천수 25
조회수   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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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원석 [가입일자 : ]

제목

부여족과 불가리아
내용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화학술원 신용하 석좌교수의 기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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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 2016-06-16 07:20:29
답글

신용하 선생님, 이제 dna로 관계를 밝히시는 일만 남았군요.
민족주의, 애국심, 그리고 역사학의 관계에서 과학도 한 몫 할 수 있음을 ...

황준승 2016-06-16 14:05:24
답글

불가리아나 우리나라의 조상인 부여는 터키의 조상인 돌궐(투르크)과 어떤 관계 였나요?

yws213@empal.com 2016-06-16 15:07:56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68

준승님, 위 링크를 참조하시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황준승 2016-06-17 13:03:27

    예, 감사합니다 ^^

yws213@empal.com 2016-06-16 14:54:40
답글

같은 유목민의 후예로서 돌궐(투르크)는 부여와 멀지 않은 의사 소통 체계(우랄 알타이어족)와 공조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구려때 연개소문이 첫 부인으로 돌궐(투르크)의 공주를 맞이했으나, 후세를 잇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이 두번 째 부인을 맞이했다고 하죠.

yws213@empal.com 2016-06-16 15:02:43
답글

참고로 연개소문에 대한 자료를 남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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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그는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이자 무장(武將)으로 대당항전(對唐抗戰)을 총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42년 대신(大臣) 108명을 몰살시키고 영류태왕(榮留太王)을 시해한 뒤 보장태왕(寶藏太王)을 옹립한 사실을 들어 그를 역신(逆臣)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그를 1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하였다.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645년에 친히 1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을 결행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비사성(卑沙城), 백암성(白巖城) 등을 함락시켰지만, 안시성(安市城)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을 비롯한 고구려 군민(軍民)의 끈질긴 저항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전략에 말려들어 패배,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이 10만 대군을 동원, 후퇴하는 태종(太宗)의 당군(唐軍)을 추격하여 어니하(?泥河)에서 태종(太宗)의 왼쪽 눈에 부상을 입히고 강소성(江蘇省) 비주(?州)의 애산(艾山)에서 설인귀(薛仁貴)의 부대를 격파한 이야기는 지금도 화자(話者)가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또 661년 8월에는 직접 고구려군을 이끌고 사수 전투(蛇水戰鬪)에서 방효태(訪效泰)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들을 전멸시켜 중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의 고사(古史)에 남아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각인된 고구려(高句麗) 최후의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일본 나라[奈良]시대의 제왕 덴무왕[天武王]과 동일인물이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을 해석한 이영희(李英熙)의 저서 '노래하는 역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 학설은 일본의 재야사학자 고바야시 야스꼬[小林專子]가 제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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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경극 살사문에서도 드러나듯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너무 두려워하며 늘 절대강자로서 대응하기를 꺼려했다고 하죠.
신채호 전집에는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수장이라고 써 있더군요.
(조의선인 링크)
http://tip.daum.net/question/49508363

홍원경 2016-06-17 01:13:52
답글

조선 과 터키 불가리아 몽고반점 있는 몽골까지 한핏줄 이라고 봤을때 참 못난민족 이라고 보입니다.
하나같이 못살거나 산다고해도 그리 녹녹치 않다는거...

어디에도 확실히 속할수 없으며 그져 그자리에서 먹고사는게 전부...
그게 그 잘난 조선에 핏줄 이라고 보여집니다.

황준승 2016-06-17 13:05:23

    고려 때는 나름 잘 살았잖아요. 동북아 해상무역도 장악했고요. 몽골의 침입을 받고도 나라가 유지 되었어요.
터키도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이루었잖아요.

홍원경 2016-06-17 16:29:22
답글

몽골에 침입을 막아내다니요..
몽골 쳐들어왔을때 다 점령되서 원숭이 나라로 쳐들어갈 원정길을 열어주기도 했었잔아요.
불행이도 태풍때문에 실패로 끝났지만..

몸골 , 청나라 이런데 한테는 사실 점령되서..
왕이 대가리박고 가랭이로 지나가면서 정권만 유지하게해 달라고 싹싹 빌었던 사실은 잘아실꺼에요.

몽골이나 청나라가 들어와 내땅이다...할수도 있지만 도호부 하나 세우고 조공 받아먹는게 더 쉬우니 멸망은 않시킨겁니다.
그놈들이 맘먹었으면 조선은 그때 없어졌지요.

과거 일본이 미개했내 라고 흉볼필요 없이...
조선 그이전에도 중국 청나라 몽골 거란 이런것들한테 전투력이나 인구 문화 물자에서 항상 열세였습니다.

그러니 사대주의 라는말이 생겨났고 걍 옛날부터 조공이나 하고 사는 나라였다는건 부인하기 힘들어요.

역사 와 전통 유적지에 대해서 울나라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건 과거가 그리 자랑할만한게 없었던겁니다.
그러니 유적지고 뭐고 걍 갈아업어버리고 아파트 짓는게 일상화 되지않았을까 하는 생각 입니다.

yws213@empal.com 2016-06-19 02:06:00

    역사적으로 몽골과 그 주변의 부족은 발해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예하에 묻혀서 지냈지요.
징키스칸 양부가 우리 케레이족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해가 백두산 폭발로 지리멸렬하고
흩어지는 틈에 꿋꿋하고 독하게 와신상담 결합한 세력이 몽고이겠죠. 지난 날의 설움을 갚으려고
갑이었던 발해, 고구려의 후예인 고려에 침략을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yws213@empal.com 2016-06-17 23:26:00
답글

자랑할 만한 게 없는 것처럼 일본과 중국이 역사 노략질하고 있으니 신채호선생이
못 다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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