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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해원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6-05-23 02:44:17
추천수 13
조회수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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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태섭 [가입일자 : 2008-07-05]

제목

원균 해원
내용
 오모님한테 황당한 주장을 한다고 지목받은 황당한 사람입니다.

노가다 비슷한 일을 하여 집에 들어가는 한달에 , 두번.  그래서 그때 그때 자료를 찾아 대응을 못합니다마침 어제 집에 다녀와 썼습니다.


 


저는 원씨가 아니고, 일가친척에도 원씨가 없습니다원씨 문중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역사에 억울하게 낙인찍힌 사람들한테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뿐입니다예컨대 이주회을미오적의 1호라는데, 글쎄요, 그럴까요원균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


 


 


임진왜란 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전경험이 없어서) 수군없이 출정하는 황당한 짓을 했고 원균은 전함(판옥선)함대를 가지고도 소형 수송(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선단을 보고 모조리 자침시키고 불지르는 비교도 없는 황당한 짓을 했습니다


 ð    1. 마치 원균 함대가 판옥선을 주력으로 한 대함대였던 양 말씀하시는데 아닙니다판옥선이 주력은 주력이었으나 몇 척 없었습니다님은 밑엣글에서


충무공이 첫번째 해전에서 투입한 판옥선이 29척이라고 했으니까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죠.”


라고 추정하셨는데, 저는 전혀 달리 추정합니다.


이순신의 29척은 1591 2월 좌수사 부임 후 새로 건조한 게 태반입니다왜란 발발이 1592 4 13일이니까 1 2개월간 착실하게 전비를 갖춘 셈입니다.


반면에, 원균의 경상우수사 부임은 1592 2월입니다원균에게는 불과 2달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2달 사이에 배를 만들면 몇 척이나 만들었을까요원균의 경상우수영은 이순신 부임 당시 전라좌수영이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기록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최소 40척에서 최대 70척이었습니다.”


이것도 전혀 사실에 입각한 추론이 아닙니다보니까, 국방부전사편찬위 『임진왜란사』와 문장까지 거의 비슷한데, 출판년도가 1987 12월이네요이 책은 그냥 참고만 하세요.




2. “원균은 전함(판옥선)함대를 가지고도 소형 수송(세키와 고바야)선단을 보고 모조리 자침시키고 불지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황당한 짓을 했습니다. “


라고 하셨는데, 밑에 보니까 『징비록』 을 근거로 하신 말씀 같네요


우선 징비록은 유성룡이 썼고, 유성룡이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추천, 파격 승진시킨 장본인이자 동인의 선봉이었음을 환기시킵니다그리고, 병조판서 유성룡이 전방에 나가본 적이 없음을 환기시킵니다전방에서 올린 장계나 장수의 증언 등이 근거였지 직접 보고 겪어 근거로 삼은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윗글의 근거는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 같습니다김수는 장계에서 말하길,


수사 원균이 함대 사령관으로서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로 피하였으며, 우후 우응진으로 하여금 관고를 불사르게 했다실록 선조25 6월 병진조.


그런데요, 같은 날 장계에서


원균이 南邊賊을 措捕했다.”


고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고 있어요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후자는 원균이 적선 10여척을 焚滅했다=태워 없앴다는, 문제의 그 승첩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국방부의 『임진왜란사』, 님이 참고하신 그 책은 원균 승첩의 근거가 「원균행장기」밖에 없다며 무시하는 입장입니다님과 똑 같아요, 입장이.


그런데 지금 학계 말은 달라요의병장 조경남 『난중잡록』, 이순신 『부원경상도장』, 『임진장초』


나는 전라도 남원에 있었으므로 호남과 영남의 일과 본부(=남원부)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경상우수사는 적을 많이 잡았으니 勝聲이 크게 떨쳤다.  이로 인하여 민생들은 모두 마음놓고 생업에 종사하고 서로 경동치 아니하였다.”  난중잡록 선조25 5 1일자


경상우수사가 회답한 관문에 본도 배와 병력을 초발하여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태워 없앴다.”  이순신




그러므로,


2-1. 김수의 장계는 종잡기 힘든 말이므로 비판적으로 해석해야지 선택적 인용은 곤란합니다.


2-2. 국방부 『임진왜란사』는 애써 원균을 무시합니다박정희가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부식하는 차원에서 이순신을 이용하였음은 익히 아는 바입니다이순신 혼자만이 우뚝 서야 박정희 직성이 풀렸습니다이순신을 그렇게 만들다 보니, 주변 사람을 모두 비겁하고, 용졸한 인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죠국방부의 이런 전통과 맥락에서 『임진왜란사』가 나왔다고 봅니다.




역사에서 "만약에 그랬다면" 무의미하지만, 원균이 뒤늦게라도 함대를 이끌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1진은 늦었더라도 2진인 가토 기요마사부터 막아낼 있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비화 - 수군없이 도박한 고니시 1


 


고니시 유키나가가 1진으로 그리고 앙숙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2진으로 침공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죠


ð    =>고니시와 가토가 서로 전공 경쟁을 벌인 것은 맞습니다경쟁을 하다 앙숙처럼 서로 미워하는 관계로 갔을지도 모르지요실제 전쟁 막판 고니시가 휴전협상을 거의 성사시켰을 가토가 끼어들어 파토를 사실도 있으니깐요.


ð    그러나 사람이 전쟁 전부터 앙숙이었던 것은 아닙니다고니시는 오사카의 상인 집안 출신입니다그래서 죽기살기로 싸우느니 협상을 통해 실속을 챙기는 스타일입니다초상을 봐도 무장의 풍모가 별로 보입니다반면에, 가토는 토요토미 近衛 출신입니다토요토미 근위는 8명으로 출발하는데, 가토가 8 하나입니다그래서 전형적인 무장이고, 근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대망』에도 등장합니다. 참고) 이런 가토니만큼, 고니시와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을 겁니다그러나 전쟁 사람이 충돌할 일은 없었습니다토요토미한테 고니시 집안의 후원이 필요했고, 사실을 근위 가토가 모를 없었으니깐요.


 


 


1진과 2 앙숙이 협의 중인 그림입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서부지역에서만 병력을 동원했는데 만약에 중부와 동부지역까지 동원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겁니다.


ð    => 그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한계였습니다다른 사람 것도 없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답입니다.  (야마오카 대망』참고)

 


 그렇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물론이고 3진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까지도 수군의 엄호가 없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ð    => 구로다 나가마사제가 접때 기억이 안 난다고 한 이름입니다西路 구로다의 당초 구상은 남강을 따라 전라도로 진입, 진입 후 북상하여 충청도 경유 한양 입성이었습니다진주성에서 좌절당하자, 계획을 변경, 그대로 북상합니다그래서 전라도가 온존했고, 전라도 근왕병 10만이 구성되어 북상하다가 용인 근방에서 매복에 걸려 전멸합니다농민병으로 급조해서 숫자만 많지 전투력은 없던 부대 같아요그럼에도 전라병영 중군 권율이 살아남아 훗날 행주대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구로다는 북상길에 소환당했고, 일본사에서 웬간하면 언급을 피합니다그래서 잊혀진 인물인데, 후손 구로다 기요다카가 강화도 조약 때 일본 수석대표를 하는 바람에 한국인의 기억에서 살아난, 비운의 인물(?)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음력 4 13(양력 5 23부산에 상륙하는데 수군의 엄호없이 바다를 건너는 도박을 합니다섬나라인 일본은 의외로 해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수군의 필요성에 대해 알지도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수군은 해적이나 어부를 모은 것에 불과했고 수군 지휘관 대부분은 해전경험도 없는 육군 중에 지위가 낮은 다이묘나 무장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을 상대할 없는 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만으로 조선수군의 2/3 주둔한 경상도를 침공한 것인데 역사상 가장 무모한 작전 중의 하나였죠.







 


 


왼쪽이 판옥선을 간신히 1:1 상대라도 있는 아타케부네(극소수)이고 가운데가 일본수군의 주력함이자 수송선인 세키부네 그리고 우측은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고바야부네입니다.


=>  판옥선은 大, , 小가 있고, 절대불침호가 아닙니다판옥선도 약점이 있습니다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모르긴 해도, 이순신이 왜장이었다면 결과가 또 달라졌을 겁니다.


1. 조선전함과 일본전함을 비교하자면, 먼저 조선소나무와 일본소나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양국 모두 소나무로 배를 만드는데, 조선의 경우 최상은 금강송입니다.(얼마전 남대문 복구 때 쓰였던.)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강송이 많지가 않습니다그래서 국법으로 정한 禁松지역(황해도 장산곶, 충청도 안면도, 전라도 변산)의 소나무를 썼는데 아다시피 곰솔이건 육송이건 곧게 쭉 뻗은 나무가 많지 않습니다일본 홍송은 쭉쭉 뻗는데요. 그리고 일본 홍송보다 훨씬 단단합니다휘어지고, 단단하다…, 그래서 조선소나무는 제재가 어렵습니다판옥선 외판 두께가 4=12센티인데, 제재가 어렵다 보니 판재가 이렇게 두껍게 나오는 게 조선 제재업의 전통입니다단단하다는 말은 조직이 치밀하다는 말입니다그래서 무겁습니다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판재를 두껍게 켰으니 얼마나 무거웠겠어요무지무지 무거웠습니다배도 당근 무겁지요이게 장점이자 단점입니다일본 홍송은 곧고 무르기 때문에 제재가 쉽습니다그래서 얇게 켜는 게 일본 제재업의 전통이었습니다왜냐구요엷게 여러 장 켜는 게 경제적이깐요때문에 일본 배는 가볍고 빠릅니다.


그래서, 장점; 이순신은 배의 무게를 이용하여 충돌 전법을 많이 썼습니다


단점; 무거우므로 속도가 느리고, 기동성이 떨어진다왜군은 당근 조선의 이 약점을 붙들고 늘어졌어야 합니다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커버하는, 유능한 수장이 없었다는 게 일본한테 불운이었지요.


2. 대형 판옥선을 기준으로 할 때 石수(쉽게 말해 톤수)가 아타케의 2배입니다.  (아타케도 터무니없이 큰 게 있습니다만 토요토미의 유흥선 따위이고, 조선군과 맞붙은 아다케는 최대가 500석급일본石은 조선石의 1/2.  조선 판옥선 최대 500 조선석, 일본 아다케 최대 500 일본석)


중형, 소형이 아타케와 비슷하거나 작거나 했을 것 같은데 확증은 없습니다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거북선때문입니다조선이 왜구를 수없이 겪은 바 왜구가 단병접전에 능함을 잘 압니다판옥선에 철갑 지붕을 덮어 거북선을 만든 게 이 때문입니다판옥선이 왕창 클 것 같음 적군이 뛰어오를 걱정을 할 리가 없지요적군이 뛰어들 만큼 높이가 만만하니까 철갑 지붕을 덮어 막았다, 이렇게 봅니다실제 삼도주사분군도의 거북선은 중형, 소형 판옥선급니다.


3. 아타케가 극소수였다고 하셨는데, 조선군의 판옥선 현황은 더욱 비참했습니다아다케 2배 크기의 대형판옥선은 조선수군 최고 전성기 때도 몇 척 없었을 겁니다정조 때 작품이라는 삼도주사분군도에 대형판옥선이 등장하는데 딸랑 1척입니다소형선박 빼고 거북선 포함 전선급만 100척 이상인데 딸랑 1.


4. 세키, 고바야는 우스운 배가 아닙니다일본수군이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뿐입니다.


세키는 關입니다전국시대 곳곳에 해적이 창궐했는데, 이들은 요샛말로 세관, 즉 관關을 세우고 통행세를 거뒀습니다이때 해적의 쾌속선이 세키[]입니다때문에 세키는 기동력이 아주 좋습니다세키를 보다 소형화시켜 기동력을 높인 게 고바야입니다앞에서 말씀드린 바, 일본 배는 원래 빠르고 기동력이 좋다고 했습니다그것을 더욱 빠르게, 민첩하게 만든 게 세키이고, 세키보다 더욱 민첩한 게 고바야입니다이순신이 왜장이었다면,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전을 짰겠지요.


4. 원균이 이순신에게 관문을 보내 전하길, 일본수군 규모가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 90여척, 부산포 건너편에 350여척이었답니다.  토탈 440척 이상이네요.  경상좌수영은 궤멸했고, 우수영 원균의 전력은 맨앞에서 추정한 바 있습니다부임 2달만에 준비를 갖추었으면 얼마나 갖추었을까요?


 


 


절대로 성공할 없었고 성공해서도 안되는 도박은… 우리가 알듯이 대성공을 거뒀습니다경계를 게을리 탓에 접근을 뒤늦게야 알았고 박홍과 원균은 동북아 최강이었던 조선수군 전력의 2/3 자침시키고 달아났습니다.



...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배를 보고 겁에질려 3척을 남기고 80여척의 배를 자침시킨후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또한 도망가려고 하자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군인의 임무는 이기든 지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데에 있습니다. 당장에 적의 수에 당황하여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하여 도망친다면 상감께서는 필히 이에대해 문책하실께 분명합니다. 청하건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최선책 일듯합니다." (징비록上-류성룡)


 ð    => 징비록은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함이었기 때문에 대량건조되었고 명종 21 (1566)에는 너무 많아서 감축해야 정도였습니다.



충무공이 첫번째 해전에서 투입한 판옥선이 29척이라고 했으니까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을 밖에 없었죠. 기록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최소 40척에서 최대 70척이었습니다

=> 충무공이 29척이니까 원균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논리가 어떻게 성립하죠앞에서 말씀드린 , 이순신은 1 2개월의 준비기간이 있었고, 원균은 2개월이었습니다. 명종 때의 전력은 자연소멸하여 개전 당시 전력은 거의 제로 베이스였습니다.  전함의 수명이 엄청 짧거든요.  ‘어쨌든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최소 40척에서 최대 70척이었습니다.’ 하셨는데 글은 국방부 『임진왜란사』와  문장이 똑 같습니다개전 당시 조선수군 전력을 어디 논문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못 찾았습니다찾는 대로 자게에 공개하겠습니다.




 


원균은 바다를 덮은 많은, 그러나 군선이라고 없는 이런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을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선을 보고도 줄행랑을 쳤다고 하죠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하되, "사또가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로 보아 그 관할 경내에서 죽을 것이며 여기는 호서ㆍ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여기를 잃어버리면 호서ㆍ호남이 모두 위태롭습니다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모을 수 있고호남 수군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기문에는 그 비장 이영남의 말을 써서 구원병을 청했다 하였다.


ð    => 앞전 댓글에서 말씀드린 바, 남해현 관아를 불태운 사람은 기효근이 아니고 이순신이었습니다징비록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 역시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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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pns@hitel.net 2016-05-24 16:35:39
답글

벌써 10년전쯤 일이 됐는데요.
다른 동호회 게시판에서 이와 비슷한 이순신, 원균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원균은 군사정권에 의해 과도하게 난도질당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라는 요지의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동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저보다 나이는 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원모모 회원의 댓글이 달리더군요.
자신이 바로 원균의 직계후손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선조가 마치 매국노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원균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글만 봐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이런 요지의 댓글이었는데 그 어조가 사뭇 절절했습니다.

그때까지 생각도 못했던 원균의 후손이 받아왔을 고통의 무게가 느껴지더군요.
이글 읽다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것을 보니 그때 느낌이 상당히 컸었던 모양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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