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에 대해 재조명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착각은 자유입니다만 전사에서는 원균은 재조명할 수록 더 박살이 나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전사를 다룬 책이면 원균은 지휘관으로 존재해서도 안되는 인물로 설명합니다.
전사에 대해 모르니 원균이 폄하되었다는 소리를 하죠. 임진왜란 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전경험이 없어서) 수군없이 출정하는 황당한 짓을 했고 원균은 전함(판옥선)함대를 가지고도 소형 수송(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선단을 보고 모조리 자침시키고 불지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황당한 짓을 했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에 그랬다면"은 무의미하지만, 원균이 뒤늦게라도 함대를 이끌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1진은 늦었더라도 2진인 가토 기요마사부터 막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비화 - 수군없이 도박한 고니시 1진
고니시 유키나가가 1진으로 그리고 앙숙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2진으로 침공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죠.
1진과 2진 앙숙이 협의 중인 그림입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서부지역에서만 병력을 동원했는데 만약에 중부와 동부지역까지 동원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겁니다.
(앗! 6진의 고바야카와 다다카게는 다카카게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물론이고 3진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까지도 수군의 엄호가 없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부산에 상륙하는데 수군의 엄호없이 바다를 건너는 도박을 합니다. 섬나라인 일본은 의외로 해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수군의 필요성에 대해 알지도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수군은 해적이나 어부를 모은 것에 불과했고 수군 지휘관 대부분은 해전경험도 없는 육군 중에 지위가 낮은 다이묘나 무장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을 상대할 수 없는 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만으로 조선수군의 2/3가 주둔한 경상도를 침공한 것인데 역사상 가장 무모한 작전 중의 하나였죠.
왼쪽이 판옥선을 간신히 1:1로 상대라도 할 수 있는 아타케부네(극소수)이고 가운데가 일본수군의 주력함이자 수송선인 세키부네 그리고 우측은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고바야부네입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고 성공해서도 안되는 도박은… 우리가 잘 알듯이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경계를 게을리 한 탓에 접근을 뒤늦게야 알았고 박홍과 원균은 동북아 최강이었던 조선수군 전력의 2/3를 자침시키고 달아났습니다.
...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배를 보고 겁에질려 3척을 남기고 80여척의 배를 자침시킨후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또한 도망가려고 하자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군인의 임무는 이기든 지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데에 있습니다. 당장에 적의 수에 당황하여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하여 도망친다면 상감께서는 필히 이에대해 문책하실께 분명합니다. 청하건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최선책 일듯합니다." (징비록上-류성룡)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함이었기 때문에 대량건조되었고 명종 21년 (1566년)에는 너무 많아서 감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충무공이 첫번째 해전에서 투입한 판옥선이 29척이라고 했으니까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죠. 기록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최소 40척에서 최대 70척이었습니다.
원균은 바다를 덮은 수 많은, 그러나 군선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을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선을 보고도 줄행랑을 쳤다고 하죠.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하되, "사또가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로 보아 그 관할 경내에서 죽을 것이며 여기는 호서ㆍ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여기를 잃어버리면 호서ㆍ호남이 모두 위태롭습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모을 수 있고, 호남 수군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기문에는 그 비장 이영남의 말을 써서 구원병을 청했다 하였다.
정말 드문 전국시대 해전 중 고바야부네가 아타케부네를 공격(?)하는 장면인데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죠. 참고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최대전함인 아타케부네도 워낙 허술해서 판옥선에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왜군이 함선을 크게 보강한 것은 충무공께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도 훨씬 이후입니다.
주력인 고바야부네는 이런 구조인데 전투원은 그대로 노출된데다가 노꾼도 얇은 칸막이로만 가린 정도여서 판옥선과는 1:10 이상의 차이가 났습니다.
판옥선은 아타케부네보다 훨씬 강력한 전함급이었으니 박홍과 원균이 겁을 먹지 않고 뒤늦게라도 2진과3진을 차단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물론 다른 결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박홍과 원균 모두 수군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고 왜군의 조총이나 등선육박(배에 올라 백병전) 전술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세등등한 1진과 2진을 상대하며 경상좌우 수군전력이 모두 전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고니시와 가토 42,000명 병력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고 만신창이가 된 수송선단은 쓰시마와 나고야에 대기 중인 후속병력을 실어나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군의 대형전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에 상륙한 지 2주 만에, 그것도 일본 출항지 나고야에 도착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에 들어설 때까지도 병력 수송을 엄호하지 못했습니다.
많이 아쉽죠. 그렇지만 계획대로 들어맞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던 일도 있습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정(직접 참전)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7일 아내 오네에게 나고야에 있는 예비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직접 지휘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7월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에게도 “조선원정이 빗자루로 먼지 쓸어내는 형세이니 명도 당연히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조선원정의 경험으로 명나라 군대를 거대한 바윗돌로 달걀깨트리는 정도로 쉽게 격파할 수 있다. 인도, 필리핀과 남해의 많은 섬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존경받는 자리에 설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가 있는 모든 수송선과 전선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하고 허수아비로 관백에 앉혀 두었던 히데쓰구에게 24개 계획을 알려줍니다. 히데쓰구(그림 참조)는 히데요시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조카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던 사람인데,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소외되다가 결국 자살하게 되죠. 히데요시의 삽질이자 불운 중의 하나인데 만약 히데요리가 태어나지 않고 히데쓰구가 제대로 정권을 이어받았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쩔 가능성이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히데요시 조선을 통합하면 측근인 미야베 케이준에게 한양을 맡기고 히데쓰구와 일왕 고 요제이에게 중국을 맡길 테니 30,000명을 이끌고 중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원정은 항복한 명나라 병력과 함께 다른 다이묘에게 맡기고 히데요시 자신은 닝보(지도 참조)에 머물면서 일본, 조선과 중국의 통치를 관장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측근, 다이묘, 아내와 80살의 어머니까지 히데요시의 친정에 대해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1592년 당시에는 히데요시의 건강, 내정과 태풍을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급격하게 쇠약해져가고 있었고 6년 후인 1598년에 죽었습니다. 히데요시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85년에 식욕부진 기록이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체구였던 그는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고 편지를 쓰기 힘들 정도로 시력도 나빠졌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식욕도 좋습니다. 어제는 다도회 후에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책을 하고 식사도 여러 번 할 정도로 좋으니까요.”
히데요시를 뽀샵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실물과 가까운 그림으로 생각됩니다.
무장이라면 활을 쏘고 말을 달렸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미 식사를 하고 산책을 즐긴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친정으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이었고 자신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592년 당시에는 히데요시의 건강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성향으로 보아 다른 이유는 그렇게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테니까요.
두 번째로는 불안한 내정이었습니다. 오닌의 난부터 200년 넘게 전쟁을 벌인 일본이 가까스로 봉합된 지가 겨우 2년에 불과했고 반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다이묘가 충성을 대가로 (축소된) 영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봉합한 정점은 히데요시였는데 히데요시가 만약 조선원정에 나가 있거나 계획이 대성공을 거둬서 중국에 있게 된다면 사소한 갈등이 다시 전국시대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일왕 고 요제이도 히데요시가 편지를 보내 친정을 극구 말렸습니다.
“당신 같은 천재라면 수 천 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군대를 지휘하고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오.이미 파견한 군대와 지휘관이면 전과를 충분히 올릴 것이오. 왕국의 안녕을 위해 친정계획은 포기할 것을 간곡히 권하오.”
당시 일왕의 권위는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귀담아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친정에 나서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7월이 넘고 8월이 되면서 태풍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태풍(일본은 신풍)덕분에 여몽연합군을 격퇴한 사실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도 결국 친정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바다를 건널 준비는 다 끝났고 배를 탈 준비도 마쳤지만 이에야스, 도시이에와 여러 다이묘가 태풍계절이 다가오고 있다고 간곡하게 애원하고 있다. 병력을 수송하는데 몇 개월은 필요하고 8월을 넘어 9월까지 이어지는데 그 때가 되면 태풍 때문에 바닷길이 닫힌다.
이 시기에 수송하면 재앙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바닷길이 열리는 내년 3월로 연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두 번째 이유였던 불안한 내정이 사실로 드러납니다. 7월에 히데요시는 마에다 도시이에, 가모 우지사토, 아사노 나가마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나고야(지금의 나고야가 아닌 당시의 출정지)에 불러 마에다와 가모를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일본에 남아 내정을 다지라는 당부를 했죠.
뒤로 물러난 아사노가 “전하는 제 정신이 아니오”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이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불려온 아사노가 전국이 아직 불안한데 친정에 나선다면 반드시 모반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고 히데요시가 목을 치려고 하자 다들 앞을 막으며 직접 목을 치면 안된다고 말리고 아사노를 끌고 데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사노는 숙소로 물러나 할복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큐슈 히고지방, 시마즈 가신인 우메키타 쿠니카네가 원정군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자 처벌을 받기보다는 저항하다 죽겠다며 나고야성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숫자는 겨우 수백명에 불과했고 시마즈 가문에서 미리 토벌해서 히데요시와의 갈등을 봉합했지만 히데요시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복종하지 않는 시마즈 가문(그림 왼쪽 지역)을 토벌할 때에도 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고 시마즈 가문이 항복을 한 후에도 당주 요시히사의 동생 도시히사가 가신을 시켜 히데요시 가마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뒤늦게 도시히사를 죽였지만 아사노의 염려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아사노를 불러 사과하고 아사노 아들에게 반란진압을 맡겼지만 시마즈 가문이 미리 토벌했기 때문에 명예회복으로 끝났습니다.
그 이후에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당항포 해전까지 조선해군이 왜군 선박을 닥치는 대로 격침시켰기 때문에 친정은 무리였고 히데요시가 쇠약해지면서 주변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