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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비화(3) - 수군없이 출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박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6-05-19 13:27:33
추천수 26
조회수   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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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세영 [가입일자 : ]

제목

임진왜란 비화(3) - 수군없이 출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박
내용
 

원균에 대해 재조명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착각은 자유입니다만 전사에서는 원균은 재조명할 수록 더 박살이 나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전사를 다룬 책이면 원균은 지휘관으로 존재해서도 안되는 인물로 설명합니다. 




전사에 대해 모르니 원균이 폄하되었다는 소리를 하죠. 임진왜란 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전경험이 없어서) 수군없이 출정하는 황당한 짓을 했고 원균은 전함(판옥선)함대를 가지고도 소형 수송(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선단을 보고 모조리 자침시키고 불지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황당한 짓을 했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에 그랬다면"은 무의미하지만, 원균이 뒤늦게라도 함대를 이끌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1진은 늦었더라도 2진인 가토 기요마사부터 막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비화 - 수군없이 도박한 고니시 1진

 

고니시 유키나가가 1진으로 그리고 앙숙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2진으로 침공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죠. 



 


1진과 2진 앙숙이 협의 중인 그림입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서부지역에서만 병력을 동원했는데 만약에 중부와 동부지역까지 동원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겁니다.



 

 

(앗! 6진의 고바야카와 다다카게는 다카카게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물론이고 3진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까지도 수군의 엄호가 없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음력 4월 13(양력 5 23부산에 상륙하는데 수군의 엄호없이 바다를 건너는 도박을 합니다. 섬나라인 일본은 의외로 해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수군의 필요성에 대해 알지도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수군은 해적이나 어부를 모은 것에 불과했고 수군 지휘관 대부분은 해전경험도 없는 육군 중에 지위가 낮은 다이묘나 무장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을 상대할 수 없는 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만으로 조선수군의 2/3가 주둔한 경상도를 침공한 것인데 역사상 가장 무모한 작전 중의 하나였죠.



 


왼쪽이 판옥선을 간신히 1:1로 상대라도 할 수 있는 아타케부네(극소수)이고 가운데가 일본수군의 주력함이자 수송선인 세키부네 그리고 우측은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고바야부네입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고 성공해서도 안되는 도박은… 우리가 잘 알듯이 대성공을 거뒀습니다경계를 게을리 한 탓에 접근을 뒤늦게야 알았고 박홍과 원균은 동북아 최강이었던 조선수군 전력의 2/3를 자침시키고 달아났습니다.

...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배를 보고 겁에질려 3척을 남기고 80여척의 배를 자침시킨후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또한 도망가려고 하자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군인의 임무는 이기든 지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데에 있습니다. 당장에 적의 수에 당황하여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하여 도망친다면 상감께서는 필히 이에대해 문책하실께 분명합니다. 청하건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최선책 일듯합니다." (징비록上-류성룡)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함이었기 때문에 대량건조되었고 명종 21년 (1566년)에는 너무 많아서 감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충무공이 첫번째 해전에서 투입한 판옥선이 29척이라고 했으니까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죠. 기록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균이 보유했던 판옥선의 수는 최소 40척에서 최대 70척이었습니다. 



 

원균은 바다를 덮은 수 많은, 그러나 군선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을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선을 보고도 줄행랑을 쳤다고 하죠.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하되, "사또가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로 보아 그 관할 경내에서 죽을 것이며 여기는 호서ㆍ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여기를 잃어버리면 호서ㆍ호남이 모두 위태롭습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모을 수 있고, 호남 수군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기문에는 그 비장 이영남의 말을 써서 구원병을 청했다 하였다.

 



정말 드문 전국시대 해전 중 고바야부네가 아타케부네를 공격(?)하는 장면인데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죠. 참고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최대전함인 아타케부네도 워낙 허술해서 판옥선에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왜군이 함선을 크게 보강한 것은 충무공께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도 훨씬 이후입니다. 





주력인 고바야부네는 이런 구조인데 전투원은 그대로 노출된데다가 노꾼도 얇은 칸막이로만 가린 정도여서 판옥선과는 1:10 이상의 차이가 났습니다.

판옥선은 아타케부네보다 훨씬 강력한 전함급이었으니 박홍과 원균이 겁을 먹지 않고 뒤늦게라도 2진과3진을 차단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물론 다른 결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박홍과 원균 모두 수군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고 왜군의 조총이나 등선육박(배에 올라 백병전전술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세등등한 1진과 2진을 상대하며 경상좌우 수군전력이 모두 전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고니시와 가토 42,000명 병력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고 만신창이가 된 수송선단은 쓰시마와 나고야에 대기 중인 후속병력을 실어나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군의 대형전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에 상륙한 지 2주 만에, 그것도 일본 출항지 나고야에 도착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에 들어설 때까지도 병력 수송을 엄호하지 못했습니다. 


많이 아쉽죠. 그렇지만 계획대로 들어맞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던 일도 있습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정(직접 참전)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7일 아내 오네에게 나고야에 있는 예비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직접 지휘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7월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에게도 조선원정이 빗자루로 먼지 쓸어내는 형세이니 명도 당연히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조선원정의 경험으로 명나라 군대를 거대한 바윗돌로 달걀깨트리는 정도로 쉽게 격파할 수 있다인도필리핀과 남해의 많은 섬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존경받는 자리에 설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가 있는 모든 수송선과 전선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하고 허수아비로 관백에 앉혀 두었던 히데쓰구에게 24개 계획을 알려줍니다히데쓰구(그림 참조)는 히데요시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조카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던 사람인데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소외되다가 결국 자살하게 되죠히데요시의 삽질이자 불운 중의 하나인데 만약 히데요리가 태어나지 않고 히데쓰구가 제대로 정권을 이어받았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쩔 가능성이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히데요시 조선을 통합하면 측근인 미야베 케이준에게 한양을 맡기고 히데쓰구와 일왕 고 요제이에게 중국을 맡길 테니 30,000명을 이끌고 중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인도와 동남아시아 원정은 항복한 명나라 병력과 함께 다른 다이묘에게 맡기고 히데요시 자신은 닝보(지도 참조)에 머물면서 일본조선과 중국의 통치를 관장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측근다이묘아내와 80살의 어머니까지 히데요시의 친정에 대해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1592년 당시에는 히데요시의 건강내정과 태풍을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급격하게 쇠약해져가고 있었고 6년 후인 1598년에 죽었습니다히데요시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85년에 식욕부진 기록이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체구였던 그는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고 편지를 쓰기 힘들 정도로 시력도 나빠졌습니다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식욕도 좋습니다어제는 다도회 후에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산책을 하고 식사도 여러 번 할 정도로 좋으니까요.”



 


히데요시를 뽀샵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실물과 가까운 그림으로 생각됩니다.

 

무장이라면 활을 쏘고 말을 달렸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미 식사를 하고 산책을 즐긴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친정으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이었고 자신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592년 당시에는 히데요시의 건강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히데요시의 성향으로 보아 다른 이유는 그렇게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테니까요.

 

두 번째로는 불안한 내정이었습니다오닌의 난부터 200년 넘게 전쟁을 벌인 일본이 가까스로 봉합된 지가 겨우 2년에 불과했고 반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다이묘가 충성을 대가로 (축소된영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이들을 봉합한 정점은 히데요시였는데 히데요시가 만약 조선원정에 나가 있거나 계획이 대성공을 거둬서 중국에 있게 된다면 사소한 갈등이 다시 전국시대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일왕 고 요제이도 히데요시가 편지를 보내 친정을 극구 말렸습니다.

당신 같은 천재라면 수 천 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군대를 지휘하고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오.이미 파견한 군대와 지휘관이면 전과를 충분히 올릴 것이오왕국의 안녕을 위해 친정계획은 포기할 것을 간곡히 권하오.”

 

당시 일왕의 권위는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귀담아들었을 리가 없습니다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친정에 나서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그런데 7월이 넘고 8월이 되면서 태풍의 계절이 되었습니다태풍(일본은 신풍)덕분에 여몽연합군을 격퇴한 사실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도 결국 친정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바다를 건널 준비는 다 끝났고 배를 탈 준비도 마쳤지만 이에야스도시이에와 여러 다이묘가 태풍계절이 다가오고 있다고 간곡하게 애원하고 있다병력을 수송하는데 몇 개월은 필요하고 8월을 넘어 9월까지 이어지는데 그 때가 되면 태풍 때문에 바닷길이 닫힌다.

이 시기에 수송하면 재앙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바닷길이 열리는 내년 3월로 연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으로두 번째 이유였던 불안한 내정이 사실로 드러납니다. 7월에 히데요시는 마에다 도시이에가모 우지사토아사노 나가마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나고야(지금의 나고야가 아닌 당시의 출정지)에 불러 마에다와 가모를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일본에 남아 내정을 다지라는 당부를 했죠.

뒤로 물러난 아사노가 전하는 제 정신이 아니오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이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불려온 아사노가 전국이 아직 불안한데 친정에 나선다면 반드시 모반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고 히데요시가 목을 치려고 하자 다들 앞을 막으며 직접 목을 치면 안된다고 말리고 아사노를 끌고 데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사노는 숙소로 물러나 할복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큐슈 히고지방시마즈 가신인 우메키타 쿠니카네가 원정군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자 처벌을 받기보다는 저항하다 죽겠다며 나고야성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숫자는 겨우 수백명에 불과했고 시마즈 가문에서 미리 토벌해서 히데요시와의 갈등을 봉합했지만 히데요시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히데요시가 복종하지 않는 시마즈 가문(그림 왼쪽 지역)을 토벌할 때에도 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고 시마즈 가문이 항복을 한 후에도 당주 요시히사의 동생 도시히사가 가신을 시켜 히데요시 가마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히데요시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뒤늦게 도시히사를 죽였지만 아사노의 염려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아사노를 불러 사과하고 아사노 아들에게 반란진압을 맡겼지만 시마즈 가문이 미리 토벌했기 때문에 명예회복으로 끝났습니다.



 



 

 

그 이후에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당항포 해전까지 조선해군이 왜군 선박을 닥치는 대로 격침시켰기 때문에 친정은 무리였고 히데요시가 쇠약해지면서 주변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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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4.***.89 2016-05-19 14:26:15
답글

대학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중에,
- 일본의 군선과 조선의 판옥선은 비교 자체가 안된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며 공격하는 형태다.

- 이순신장군 대단했고, 일본에서도 신격화 할 정도다. 그런데 전쟁 후 일등공신에 원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현재 원균에 대한 조사나 평가가 아직 완성이라 보기 어려운거 아닌가..

뭐 그런식으로 이야기하신 내용이 기억납니다.

uesgi2003 2016-05-19 14:45:47

    원균에 대해 더 밝혀질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죠. 재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선조의 일등공신입니다.

우리와 일본을 객관적으로 보는 외국전사학자들의 평가는 간단합니다. 저런 게 어떻게 지휘관일 수 있었을까?

박헌규 2016-05-19 15:38:14

    선조는 이순신보다 자신의 말을 끌고 의주까지 간 시종의 공이 더 크다고 전쟁의 최종평가문서에서 평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한 권율마져도 하찮은 소소한 승리를 한 경우였다고 하고
모든 공은 명군을 청한 자신의 공이라고 했다죠.

양태섭 2016-05-19 15:03:38
답글

제 경험상, 미국 쪽의 동양사 기술은 피상적인 게 많습니다. 외국 사람 말이라고 덮어놓고 믿는 것은..., 아니올시다입니다.
.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별개입니다. 칠천량은 정유재란 때 이야깁니다.
2. 임진왜란 때 왜군은 1. 고니시가 낙동강 서쪽 길로 북상하여 한양 입성, 2. 가토가 낙동강 동쪽 길을 따라 북상 한양 입성, 3.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장수가 남강을 따라 서진하여 전라도를 점령한 후 북상, 한양으로 입성, 이런 전략으로 부산에 상륙합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적한 부분은 제3이었습니다. 이게 이순신 때문에 좌절당했다는 거였죠.
3. 왜군 전함과 조선 전함의 비교 분석은 맞습니다. 문제는 척수입니다. 왜군 부산 상륙 당시 경상좌수영/우수영에 전함이 몇척이나 있었죠? 제 기억으론 거의 없었슴다.
4. 임진왜란 최초의 승첩은 원균 것입니다. 그때 이순신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순신의 도착은 전투가 끝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장계를 올렸죠. 자기가 싸워서 승리했다고. 실록을 보시면, 원균이 올린 장계, 이순신이 올린 장계, 둘 다 있습니다. 직접 사료 검토를 해 보시길.
5. 이하 생략.

uesgi2003 2016-05-19 15:35:17

    스킵합니다. 전에도 말했죠. 그렇게 계속 믿던가 자료 따로 정리해서 올리라고요. 위에 출정한 다이묘 이름과 규모까지 모두 적어주었는데도 이름도 생각 안나는 장수라니...

에고 더 이상 말 섞고 싶지도 않은데... 전사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죠? 외국전사학자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본 적도 없죠? 피상적이요?

외국전사분석책 한 권이라도 들쳐보면 그런 소리 못할텐데요? 전사분석에서는 전장을 분석하지 사람을 분석하지 않아요. 그런 후에 승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고 그 중에는 지휘관 분석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피상적일 수가 없어요.

이제 정말로 스킵하겠습니다.

양태섭 2016-05-19 15:10:52
답글

그리고, '원균에 대해 더 밝혀질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요?
님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어요? 임진란 당시 기후는 공부했어요? 조선 소나무와 일본 소나무가 어떻게 다르죠?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하셨길래...,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사람도, 그렇게 쉽게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입니다.

양태섭 2016-05-19 15:45:31
답글

1. "원균에 대해 재조명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그 황당한 사람이구요, 그때 그 황당한 주장이 칠천량 이야기하면서 나왔잖아요.
.
2. 선비가 글을 쓰면은 으레 강호제현의 촌평이 따라붙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책 서문에 꼭 '강호제현의 무엇 무엇을 바랍니다', 이렇게 멘트를 달잖아요. 저는 님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따로 시간을 내 무엇을 정리하는 글을 못 쓰고요,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로 무엇을 정리하는 글이 아니고, 강호의 일개 촌부가 님의 고견에 삼가 촌평을 단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양태섭 2016-05-19 15:49:27
답글

댓글을 수정하셌네요?
.
외국전사학자 수준이 그렇게 대단해요? 바꿔말해, 님은 그 정도도 못된다는 이야기네요? 허허허..., 학국학계가 미국사 유럽사라면 모를까, 적어도 한국사만큼은 걔들보다 훨 낫습니다.

uesgi2003 2016-05-19 15:52:50

    수준을 알겠습니다. 예. 평생을 전사연구에 바친 분들의 자료를 보며 감탄하며 20년째 전사공부하고 있습니다.

걔라는 수준보니 정말로 더 이상 말 섞고 싶지 않군요.

양태섭 2016-05-19 15:50:48
답글

또 수정?
.
'전사분석에서는 전장을 분석하지 사람을 분석하지 않아요'... 님의 말씀.
.
그런데 님은 원균을 물고 늘어지고 있잖습니까.

양태섭 2016-05-19 15:59:15
답글

하나 물어봅시다. 외국전사학자, 그 사람들 한국어 해요? 일본어 해요? 한문 읽는대요?
.
있긴 있을 겁니다, 가물에 콩 난 만큼. 태반이, 아니 열에 아홉이 못합니다. 하바드를 비롯 미국 대학 파란 눈을 가진 교수 가운데 한국 일본 학계에서 인정받는 동양사 교수가 몇이나 있을 것 같습니까?
.
대학 다닐 때 교수가 하바드 엔징연구소 교환교수로 갔는데, 옌징도서관 소장 도서(물론 순전히 동양사 내지 동양학 도서만 있지요, 미국 최고 권위)가 당신 집 서재만도 못하다고, 건질 게 없다고 그냥 돌아왔답니다. 이게 걔들 수준입니다.

오정식 2016-05-19 18:32:43

    하바드를 비롯 미국 대학 파란 눈을 가진 교수들한테 동양사가 중요할까요?
어찌보면 서양의 역사중에 동양이 연결되면서 서양사의 일부가 된 것 뿐이지요.

그런데도 세계 전사에서 이순신이란 이름이 나온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교수 이름을 밝혀 주세요.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궁금하네요.

사실 전사를 얘기할 때 언어는 필요없습니다. 객관적인 숫자와 레벨이 중요하죠. 이건 온라인 겜하는 얘들도 알아요.

양태섭 2016-05-20 03:45:03

    전사를 20년 공부하셨다고요? 밀덕이신가봐요? 밀덕은 보통 정통역사학도가 아니더만요. 정통역사학도라면 의당 사료비판부터 합니다. 징비록을 인용하셨는데, 징비록을 누가 썼지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지요? 그 양반 당색을 의당 따졌어야지요. 이게 사료비판입니다. 상대편 기록과 비교 검토를 했어야 맞지요. 원균한테 일방적인 그게 접수가 될 거라고 보세요?
인용글에 말하길, 남해현령 기효근이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고요?... 이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남해현 관아를 불태운 사람은 이순신입니다. 창고만 태운 게 아니라 관아를 싸그리 태웠어요. 당시 기효근은 원균 휘하에 들어가 열나게 싸우고 있었어요.

양태섭 2016-05-20 03:49:19

    부산 앞바다에서 열나게 싸우고 있었으니께 관아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순신이 뒤늦게 출정을 합니다. 출정 길목에 남해도가 있어 현령을 만나러 들어갔는데 텅텅 비었거든요. 이순신 생각하길, 모두들 달아났구나. 이대로 두었다간 왜적이 들어와 사용을 할 것이다. 놈들한텐 넘겨줄 순 없다. 해서 싸그리 태웁니다. 창고만 태운 게 아니라 관아까지 몽땅. 이순신의 어이없는 판단 미스였습니다.
이거 난중일기에 나오는 말이니께 징비록이 사실 왜곡했다는 거 확실하지요? 이런 게 바로 사료비판입니다.
.
공부한 게 20년이라구요? 20년 했음 이제 40대 초반? 잘해야 중반이겠네요? 학계에서 40대는 소장파입니다. 40대 초반이라면 새파란 소장파구요. 어디 가서 함부로 아는 체 못합니다. 아마츄어의 자게 놀이에 초를 치자는 게 아닙니다. 님 나름대로 공부하고, 전파하고, 이거 좋습니다. 제가 분노하는 대목은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죽이냐 이겁니다. 꼭 원균을 아작내야 직성이 풀립니까?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순신을 성웅으로 신격화시킨 이것은, 삼별초랄지 고려 무인정권이랄지 이것들과 함께, 군사정권이니까 하고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준다 칩시다. 그렇다고 생사람을 죽이는 만행까지 묵과하라는 말은 아니지요. 더구나 지금은 군사독재정권도 아니잖아요.

양태섭 2016-05-19 19:31:40
답글

오정식//
1. 역사는 전체사 total history를 지향합니다.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니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전사니 이런 것들은 현실적 편의상의 분류지요. 조공무역에서 銀의 비중이 왜 바뀌었냐, 이것을 파고 드니까 '멕시코 은'이 나오고, 하다 보면, 정치사가 경제사로, 동양사가 서양사로. 역사 연구 현장이 이렇습니다. 분야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단 말이지요.
미국인 입장에서 미국사/유럽사를 파고들면 인도/중국 등을 안 건드릴 수가 없게 됩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동양사도 건드리게 되는 겁니다. 연구현장에서 서양사/동양사의 구분이 무의미하단 말씀입니다.
2. 이순신의 위상을 부인한 적 없습니다.
3. 중국사 공부하면서 '齊民지배'라고 들어본 적 있지요? 그 양반 박사논문(중국고대사)입니다. 지금은 전근대 중국 사회 체제, 그러니까 청대까지 중국 사회 체제를 설명할 때 유용한 개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학계가 아니고 세계학계에서요. 제민지배를 추적하시면 교수님이 누구신지 이름이 나옵니다. 그 양반 조교수 때 이야기니까 40년 전 이야깁니다.
4. '전사를 얘기할 때 언어는 필요없습니다. 객관적인 숫자와 레벨이 중요하죠. 이건 온라인 겜하는 얘들도 알아요.'... ??? 이거 달나라 이야기 맞지요?

최재선 2016-05-22 09:25:10

    조선시대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어떤 군대도 출정하면서(원정이 아닌 경우) 주둔지를 몽땅 비워놓고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본진을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원(병사 혹은 관리자 등)은 남겨놓고 가는게 맞습니다.
저라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빈 현청을 보게된다면 비슷한 생각(몽땅 도주)을 하게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창고만 태우려 했는데 관아까지 불이 옮겨붙었는지
아니면 모든건물을 불태우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의 관아가 어느정도의 방어시설과 숙영시설이 있는 형태라면
몽땅 불태우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작전입니다.

양태섭 2016-05-19 19: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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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식//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이때만큼은 독립군이 총기/탄약의 부족을 생각지 않고 싸웠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답은 러시아 혁명과 체코 혁명, 그 와중에 고아로 전락한 체코군입니다.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톡에 집결하여 귀국하는데, 귀국선 승선전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체코군은 무장해제 당하기 전 총기/탄약을 엿 바꿔 먹었구요. 덕분에 독립군은 아주 싼 값으로 무장을 할 수가 있었고, 이게 청산리 대첩으로 나타났습니다.
... 연구자 입장에서, 당연히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체코군에게 관심이 가고, 체코군의 행적; 우크라이나에서 우랄, 시베리아를 덧투게 됩니다. 시작은 한국사지만, 실제론 러시아 혁명을 덧툰 논문, 이게 가능하다 이거지요.

김재용 2016-05-21 14: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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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사도 궁금해요~~
몇일 ? 만에,, 대전 부산까지 퇴각한 것이... 이게 무언지~~

두진석 2016-05-21 22: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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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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