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한국전쟁과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무사태평이던 것이 북쪽 끝과 남쪽 끝으로 도망가서 망명운운했고 외국의 힘으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죠. 그런 것을 떠받드는 무리도 500년 전이나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지금의 나고야가 아닌)성에서 출정을 지켜보는 그림입니다. 당시의 그림은 아니고 2~300년 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임진왜란에는 우리가 몰랐던 비화가 몇 가지 숨어 있는데 오늘 그 내용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명제국과 스페인의 일화에 대한 외국학자의 자료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재미로만 읽으시면 됩니다.
만약 펠리페 2세가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면 우리 역사는 참담해졌을겁니다.
임진왜란 비화 - 명제국의 상황과 스페인의 명제국 원정불발
명제국의 국방약화는 해적을 불러들였고 1540~60년대에 부유한 동남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구 또는 와코라고 부르는 해적은 14세기부터 조선과 명제국의 근심거리였다.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포르투갈인이 뒤섞인 해적은 주로 규슈에 본거지를 두었는데 명제국이 대외교역을 엄격하게 규제하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수비대가 없는 해안마을이나 도시는 손쉬운 사냥터였고 연합해서 과감한 시도를 벌일 때도 많았다. 1555년 가을, 2~3척을 타고 온 소수의 왜구는 옛수도 난징 부근까지 약탈하고 다녔다. 당시 병적에는 난징 부근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2만 명이나 되었지만 모두 숫자에 불과했다.
겨우 6~70명에 불과한 왜구는 80일 동안이나 무인지경으로 수 백 km를 누비다가 토벌되었는데 민간인 사상자는 4천명에 달했다.
왜구의 복장에 대해서는 기록도 제대로 없어서 논란이 많습니다. 신발은 신었을 것 같은데...
명제국은 몽골부족의 침입에 대응하듯이 군사력으로 왜구를 토벌하려고 했다. 연합할 불만세력도 없기 때문에 단호하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무대책으로 당한 지역의 지휘관과 관리를 처형했고 숫자에 불과한 수비대도 보강해서 왜구를 어느 정도는 처리했다.
그렇지만 왜구문제는 대외교역을 해제한 1560년대부터 해결되었다. 명제국과의 교역으로 왜구를 유화시킨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군사력이 허약했다는 반증도 되었다. 실제로 정치, 경제와 군사 모든 부분에서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 곳의 불길을 잡기도 전에 더 급한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명제국의 진짜 위기는 남동해안의 왜구도, 북부의 몽골족도, 만주국경의 반란도, 미얀마국경의 충돌이 아니라 1570~1610년 사이의 극심한 흉년과 기아 그리고 자금성이었다.
16세기부터는 왜구의 약탈이 명에 집중되어 조선은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남부 해안에 왜구본거지(붉은색 원형사선)가 있었을 정도로 명제국의 국방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안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80년대 말부터 명제국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말고도 마카오, 필리핀, 일본과 중국에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모험가도 비슷한 야심을 가졌다. 명제국은 최고의 사업거리 중 하나였다.
1576년, 필리핀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산데Francisco de Sande는 펠리페Philip 2세에게 중국원정에 나설 정규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스페인 정규군 6천 명에 중국과 일본해적을 보태 명제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필리핀의 풍부한 나무로 갤리선함대를 만들고 중국 남부해안에 가서 2~3천 명을 상륙시켜 한 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매우 쉬운 일입니다. 일반 주민은 무기가 없고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해적 200명이 3만 명의 대도시를 약탈할 정도입니다. 명제국의 화승총은 무용지물인데다가 사격술도 형편없습니다.”
중국인은 순종적인데다가 불만세력이 많아서 다른 주도 스페인 원정군에 합류하거나 반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전력과 종교를 보면 그들도 합류할 것입니다.”
펠리페 2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가다가 1586년 4월, 마닐라 식민회의에서 더 자세하고 거창한 계획을 협의한 후에 다시 왕에게 청원했다. 이번에는 필리핀 주둔군 수 백명을 중심으로 스페인 본토의 1~1만 2천 명 증원을 받고 필리핀 원주민 5~6천 명과 일본에서 같은 수를 지원받아 총 2~2만 5천 명으로 명제국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포르투갈도 초대하겠다고 했다.
“우리의 군사력을 보기만 해도 명은 항복할테고 희생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쿠바나 다른 지역에서처럼 황폐화시켜서는 절대로 안되기 때문에 원정군 지휘관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필리핀에서 건조한 함대로 푸젠주(대만 북서쪽)에 상륙하고 포르투갈은 마카오 식민지에서 광동주에 상륙한 후에 중국 주재 예수회 신부가 길 안내를 맡아서 베이징을 향해 진군한다는 계획이었다. 베이징을 점령해도 명왕조는 그대로 살려 두어 꼭두각시 황제로 중국통치에 활용하기로 했다.
명제국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아예 안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예전의 청원 때에는 별다른 수고가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조만간 아예 기회조차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떤 인간도 이루지 못한 부와 영원불멸의 명예를 얻으실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페인 모험가(콩키스타도르)가 극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신세계(중남미)를 정복했고 그 뒤를 따라 많은 모험가가 전세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펠리페 2세가 실제로 병력을 보내주었다면 데 산데는 실제로 원정에 나섰을 것이다.
명제국의 병력은 병적과 달리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전의 지휘관이 막강한 화력의 2만 5천명을 실제로 중국에 상륙시켰다면 베이징은 별 어려움없이 점령했을 수 있다.
파비아 전투(1525)이후 유럽을 100년 이상지배했던 스페인의 밀집방진 테르시오Tercio입니다.
한줌의 병사로 손쉽게 얻은 중남미의 엄청난 금은으로 최고의 무장을 갖췄고 때마침 유능한 지휘관도 끊이지 않아서 유럽에서는 상대할 군대가 없었습니다.
구성은 명제국의 방진과 흡사했지만 지휘관부터 일개병사까지 전장경험이나 무장이 비교 자체가 안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당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식민지 경영과 종교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극동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이 인구가 많지 않은 국가였고 유럽 각지의 전쟁에 투입할 용병을 고용하고 무장시키느라 중남미의 막대한 금은도 결국에는 바닥나서 1596년에는 국가파산 선언을 했습니다.
30년간 태업을 자행한 황당한 황제 만력제와 달리 40년을 일과 종교에 헌신해 서류왕으로 불렸던 펠리페2세입니다. 만약 그가 종교개혁 요구에 타협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을 탄압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이 세계역사를 다시 썼을 것입니다.
명제국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기에 필리핀과 일본이 원정을 시도했을까?
1573년, 당시 10살 소년이던 유왕태자가 13대 황제 만력제에 올랐다. 그는 1620년까지 오랜 동안 황위에 있으면서 1644년 명제국 멸망의 원흉으로 손꼽힌다.
만력제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한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이후 이야기를 보시면 실감할겁니다. 우리는 만력제에 대해 비난하기 힘든 면이 있는데, 당시 명제국이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도와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만력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신속하게 지원군을 파견했습니다. 그것도10만이라는 대군을 파병했지 말입니다.
선황 가정제는 불사약에 광기를 부렸고 융경제는 대외교역 완화로 왜구문제를 해결하고 개혁을 시도했지만 파격적인 행동으로 궁중대신을 경악시켰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대환영을 하고 위대한 황제 교육을 시작했다.
불로장생약을 찾아 궁녀에게 황당한 짓을 해서 암살당할 뻔한 가정제입니다.
그는 서예, 역사와 고전교육을 받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고 몇가지 미담도 남았다. 만력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재상이자 스승인 장거정이 대리통치를 했다. 그는 선황의 기행을 염려해 검소와 효율성을 강조했다. 궁정의 쓸데없는 지출을 대폭 줄이고 허례허식도 취소하고 만력제를 엄격하게 가르쳤다.
행정에서는 모든 세금을 예외없이 징수해 막대한 재정적자를 막았고 부패하거나 무능한 관리를 해고하거나 처벌했으며 모든 관리에게 엄격한 성리학 사상을 따르게 했다.
그에 대한 기록이 모두 뒤집혀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모호한 장거정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명제국을 지탱한 마지막 위인이라는 평가는 한결같습니다.
무능력한 지휘관 집단이 심각한 국방위기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유능하고 의지가 있는 무관을 승진시키고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그 중에는 멍제국 최고의 무장 척계광도 있었다. 그는 고전과 군사학 교육을 제대로 받았고 1544년에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 받았다.
동남부 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하면서 오합지졸의 군대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그림 참조). 그는 직접 병력을 모아 훈련시켜 척가군을 만들었고 위기가 있는 곳마다 달려가는 원정군 역할을 맡았다. 병사가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면 귀를 잘랐고 전장에서 등을 보이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전투에 대비해 엄격한 훈련을 시켰는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평소의 50% 전력만 발휘해도 무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앙진이라는 방어중심의 전술도 고안했다. 지휘관, 방패, 투창, 장창 등의 12명과 척계광이 고안한 대나무창 4명으로 한 조를 이루어 훈련했다. 나중에는 큰 두 바퀴 마차인 전투차를 만들어서 방어력을 더욱 높였다. 이 경우 20명 한 조 중 10명이 공격을 맡았고 4명이 화승총을 나머지는 칼, 창과 방패를 들었다.
가지를 떼지 않은 대나무를 잘라 방어용 장창으로 사용했습니다.
공격조가 전진하면 뒤에 남아있던 10명이 뒤에서 전투차를 밀며 따라갔다. 공격조는 반격을 받으면 10m떨어진 전투차로 복귀했고 적의 공격은 포르투갈이 100년 전에 전해준 소구경 불랑기포로 물리쳤다.
대규모 교전에서는 사각형으로 전투차를 배치하고 기병을 안으로 불러들여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도망치는 적을 추격했다.
불랑기(프랑크)포는 조선에도 전해져서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되었습니다. 독특하게 탄약 카트리지 교환식입니다.
좀 오글거리기는 하는데, 조선에 전해진 척계광의 원앙진입니다. 지금도 문화유적지에서 시범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척계광은 엄격한 규율, 훈련, 신중한 전술로 1550~1560년대 왜구의 습격을 막아냈고 다시 북부국경으로 이동해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몽골족의 침공에 대비했다. 30년 동안 한 차례도 패전하지 않은 그는1574년에 무관에게 허락되는 최고직으로 승진되었다.
1582년, 재상 장거정이 57의 나이로 죽자 목소리를 낮추고 있던 대다수의 부패관리가 그의 업적을 모함하고 개혁을 모두 취소하기 시작했다. 스승에게 눌려 지내던 만력제도 반개혁파에 동조하면서 강경정책은 하나씩 유화되었고 잠시 몰락을 멈췄던 명제국은 다시 곳곳이 무너져내렸다.
지역관리의 부패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고 베이징의 지출이 늘어나면서 국고가 바닥났다. 장거정이 몰아낸 무능력한 대신이 모습을 드러낸 반면에 개혁인사는 숙청당했다.
숙청대상에는 척계광도 있었다. 장거정이 죽으면서 그가 무에서 쌓아 올린 승전, 전술과 군대는 부인되었다. 1583년에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동안 치부하지 못한데다가 수입이 전혀 없어서 가난에 시달렸다.
1588년 1월 17일, 명제국 최고의 지휘관 척계광이 세상을 떠났는데 의원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1590년이 되자 명제국 군대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원앙진과 전투차는 역사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만력제는 스승의 철권에서 벗어나자 인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탐욕스런 환관으로 주변에 인의 장벽을 만들었고 직언하는 대신은 태형으로 입을 막으려 했다. 오히려 태형을 명예로운 고통으로 받아들이자 30년 가까이 대신의 알현을 거부하며 자금성에 틀어박혔다. 재상이 황제알현을 노심초사 기다리다가 입궐허가를 받자 며칠 동안 기절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만력제의 퇴행은 극에 달해서 사랑하지 않던 황후에게서 얻은 첫 아들 대신에 총애하는 첩의 3남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는 관례를 무시하며 태자책봉을 미루다가 19살이 된 주상락(태창제)를 태자로 책봉했다.
황제가 집무를 30년이나 거부한데다가 황태자 책봉문제로 극심한 분쟁을 거듭했는데 그 동안의 가뭄과 기아, 북로남왜, 반란보다 훨씬 큰 피해를 남겼다.
만력제의 태자책봉 분쟁 때문에 선조의 광해군 세자책봉도 지연되거나 자금성에 배경이 모호한테러를 감행하는 정격안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1620년에 황위에 오른 태창제는 대신의 약을 먹고 29일만에 죽습니다. 이를 홍환안이라고 부르며 태창제 다음 황제인 천계제의 암살시도인 이궁안과 함께 만명3대의안이라고 부릅니다.
영화 대명겁을 보면 명제국 멸망직전의 군대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영화에서는 화승총병이 대거 나오는데 실제로 명제국의 주력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왜 멸망했느냐고요?
허경영씨가 나라에 도둑놈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을 했었죠? 영화에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모두가 도둑놈인 가슴아픈 영화입니다.
이 영화 꼭 확인해보세요. 요즘의 생계형 국방비리가 생각나서 답답해집니다. 몇년 전 훈련에서 익사한 아이들이, 불량 구명조끼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하죠. 50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