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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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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5 07:5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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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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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가입일자 : 2010-05-05]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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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말로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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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전력을 다했다. 메스티소였던 어머니는 독학으로 배운 기타와 피아노에 맞춰 칠레의 전래 민요를 노래했다. 빅토르 하라의 노래 ‘아만다, 당신을 기억합니다’는 그런 어머니를 추모하며 만든 노래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칠레 민속음악을 현대 칠레인의 삶에 접목시킨 비올레타 파라의 영향을 받으며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이 물결치게 만들었다.
연극 연출가로도 명성을 쌓아가던 하라는 음악 세계로 들어서며 연극을 떠났지만, 그의 역할은 예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교사였으며, 독재 타도를 위해 헌신한 운동가였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당 대통령이 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아옌데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반군에 의해 사살되며 하라의 운명도 같은 길을 갔다.
쿠데타의 밤에 그는 산티아고 기술대학교에서 학생들과 노래했고, 다음날 아침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칠레 대운동장에 감금되었다가 살해된 그의 시체는 운동장 밖으로 버려졌고, 영국 출신의 아내가 수습하여 고문의 흔적을 확인했다. 오늘날 칠레 대운동장은 ‘빅토르 하라 운동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쿠데타의 원흉이었던 피노체트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고, 미국마저 등을 돌렸다. 독재자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칠레 사법부의 의지에 따라 수백 건의 기소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사법적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무덤과 시신에 대한 훼손을 두려워해 화장해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실제로 고문과 살해에 가담했던 하수인들에 대한 사법 처리도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다. 42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던 군부의 실력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고, 미국으로 도주한 자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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