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있다. 자신은 독일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나치가 등장하면서 전반적인 반유대주의 정서가 점차 강해지고 박해가 심해진다. 어느 쪽에도 동화될 수 없는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 이것은 가상의 질문이 아니다. 실지로 정신분석학의 원조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러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던 역사가 피터 게이도 같은 경우인데,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러한 곤경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믿는다.
프로이트의 친구였던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경우도 비슷하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 된 것이 단지 “출산의 우연” 때문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오니즘을 창시한 테오도어 헤르츨과 교분을 맺기도 했지만, 그는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서 명확하게 밝혔듯 로맹 롤랑의 영향 아래 세계주의를 받아들인 평화주의자였다. 헤르츨의 책 <유대인 국가>에 대해서는 “멍청하고 무의미한 저작”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좌에 오르자 위협을 느낀 그는 영국으로 도피했다. 2차 대전이 벌어지고 히틀러의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자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했고, 얼마 뒤 브라질의 도시 페트로폴리스에 정착했다. 브라질의 황제와 귀족들이 거주하면서 독일 농민들의 이주를 권장해 그들이 농촌 풍경을 가꿨던 곳이다.
여전히 히틀러의 세력은 강성해지고, 세상에는 불관용과 독재가 팽창하고 있기에 그는 실의에 빠져 좌절감을 표현했다. 마침내 그는 “좋은 시절에 마감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지적인 작업이 가장 순수한 즐거움이며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선이라고 믿던 그가 악은 끝내 파멸한다는 결말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어느 극단에도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상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보장한다. 그들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