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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숨겨진 이력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5-10-14 00:04:54
추천수 18
조회수   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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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원석 [가입일자 : ]

제목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숨겨진 이력
내용
 지석영 (池錫永, 1855년 5월 15일 ~ 1935년 2월 1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의사이며, 한글 학자이다. 자는 공윤(公胤), 아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 이다. 그는 조선 시대 후기,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종두법을 최초로 도입한 의사입니다. 1855년 5월 15일(음력) 한성에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석영은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편이었다.

지석영은 1855년 서울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4남으로 출생해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의학을 배웠다.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서 서양의학을 배워 온 이는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고, 최초의 미국 의사는 1892년 조지워싱턴 의대를 졸업한 서재필(1864~1951)이다.


지석영(池錫永)은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제너의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에 관심을 가졌다.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朴永善)에게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 보았고, 1879년 10월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일본인 의사에게 2달 간 종두법(種痘法)을 배웠다. 1879년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하였고 한성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痘苗)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種痘法) 보급에 힘썼다.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형조 참의(刑曹 參議)를 역임하였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였다.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6년 동래 관찰사가 되어서도 종두법(種痘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1908년 국문연구소 연구위원,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 학감이 되었다. 1909년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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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s213@empal.com 2015-10-14 00:09:32
답글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참여하여 우금치마루에서 동족을 학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을 과거 제가 배웠던 역사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 마음 속에는 단죄해야 할 대상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빌붙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으니 말입니다.
1910년에 이르러서야 조국의 현실을 깨달았다(?)는 대목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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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술 내용 첨부해 봅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지석영은 일제가 불법으로 조선을 병탄했고 자신이 일제를 위한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인식한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로부터 수많은 공직을 권유받아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일제가 1928년 ‘조선 종두 도입 50주년’ 기념행사를 펼치면서 지석영을 위대한 선각자로 추켜세우는 등 지석영을 우대하였지만 일제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1935년에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종호 2015-10-14 08:00:49
답글

이래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ㅜ.,ㅠ^

박전의 2015-10-14 10:24:32
답글

그럼에도 지석영선생을 변호하자면...
동학운동은 양반계층에 있어서 한낱 아래 계층이 벌인 반란에 지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대다수 양반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을테고 심지어 안중근 의사 마저 자발적으로 토벌에 참여 했다는
기록을 읽은적이 있는것 같습니다..
동학운동성격 자체야..이제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졋기에...
그점 하나만으로 지석영선생을 단죄하기엔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windouz@korea.com 2015-10-14 10:39:03
답글

토벌?
말이 좀 이상하군요
학살이죠
일본놈들 앞세워서 기관총으로
학살한 것이죠

고동윤 2015-10-14 15:09:32
답글

동학혁명은 내전이기 때문에 피아를 가려서 단죄하기 어렵습니다. 외세를 끌어들인 권력자야 당연히 지탄의 대상입니다만. 미국도 남북전쟁후에 남부군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있는 것이지요.

yws213@empal.com 2015-10-14 23:12:11
답글

고동윤님, 그러면 6.25에 대해서도 한 말씀하셔야 각론이 설 듯한데요?
그나저나 외세가 남의 나라에 마구 간섭해서 자국민 학살에 가담하는 것도 그냥 용인된다는 거죠?
침략이 있지만 자국민이 쐈다?
굿모닝? 베트남!

황준승 2015-10-14 23:40:26
답글

국방군이 인민군 죽인건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요?

김동현 2015-10-15 11:37:41
답글

저정도면 양식있는 지식인 수준은 훨씬 뛰어 넘는 사람이 분명하군요

의학자로서 종두법만 아니라 한글쪽으로도 많은 업적이 있으신 분이셨군요.

아마 그분이 보급하신 종두법의 혜택을 본 사람만해도 ....

soni800@naver.com 2015-10-15 18:30:26
답글

젊어서 실수를 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 잘못에 대한 자기성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후 행동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지석영선생과 안중근의사가 동학운동에
가담한 농민들을 향해 큰 잘못을 했더라도.,,
그 다음의 역사적 사실을 우린 알고 있지않습니까?
한 평생 민족을 위해 희생하다 가신 분들이죠.
그 유명한 스네이크 박이나 이승만이 같은 놈들은
우리 민중에게 한 패악짓거리를 젊어서부터 늙어
뒈질때까지 했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들 젊어서 실수 한번
안해 본 사람 있을까요?
역사적 공과 과는 이렇게 평가돼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 과오를 무조건 덮자는 건 아니고요.

ccpns@hitel.net 2015-10-16 16:03:50
답글

박전의님 의견에 한표 더합니다.
저도 동학농민운동을 당시의 양반계급은 쌍놈들의 반란이라고 여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제 생각과 비슷한 의견을 박전의님께서 댓글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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