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타 강 상류에 있다 하여 ‘오트볼타’라 불리던 나라의 이름이 ‘부르키나파소’로 바뀌었다. ‘올바른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조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란 젊은 혁명가 토마스 상카라가 만든 명칭이었다. 자원도 없고 전략적 요충도 아닌데다 부정부패가 심각하던 이 약소국은 상카라의 개혁에 힘입어 잠시나마 아프리카 전체의 희망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쿠데타를 통해 33세에 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부패는 물론 잔존하던 프랑스 제국주의 결탁 세력을 척결함으로써 거국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며 자급자족의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토지와 광산을 국유화하고 지하수를 개발했다. 수많은 부족들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전 국토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했고, 의무교육을 통해 문맹을 퇴치했으며, 여러 풍토병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심각해진 사막화를 막기 위해 10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 결과 농지가 확대되어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그렇지만 생산성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무기력했던 국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참여 의식이 커진 것이었다.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식량난을 해소했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귀감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이웃 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의 일부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카라는 외국 세력의 사주를 받은 개혁의 동지 콩파오레에게 살해되었다. 콩파오레는 최근까지 대통령이었다. 죽음을 예감했던 듯, 상카라는 죽기 한 달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죽을 당시 게바라의 나이를 묻고는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중얼거렸다 한다. 39년 8개월의 게바라보다 2년 짧은 삶을 산 그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 불린다.
그의 죽음 이후 부르키나파소는 부패가 만연한 옛 아프리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