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76년 쿠데타로 멕시코 대통령이 된 뒤 대지주와 결탁해 농민을 핍박했고, 대다수 농민은 빚에 몰려 노예의 처지로 떨어졌다. 문제는 디아스가 관료를 동원해 “토지 개혁”을 명목으로 토지의 대지주 편중을 심화시키려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어렸을 적부터 고향 산천 모렐로스 농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박탈당한 토지와 권리를 찾는 일에 몸을 바쳐 신망을 얻은 젊은이였다. 그는 구두로나마 진정한 토지 개혁을 약속했던 마데로를 도와 디아스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 마데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대농장 소유자를 지사에 임명해 농민의 적이 되었다.
다시 정치적 권력과 반목하게 된 사파타는 산악지대로 도피해 추종자들의 세력을 규합하며 무장 항쟁에 나섰다. 시종일관 그의 목적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반면 추격해오는 마데로의 군대는 농지를 불태우고 주민을 소거하며 군인으로 징집해 농민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마데로는 패배하여 권력 다툼 속에 수하의 장군에게 처형당했다.
이후 멕시코의 정계는 정략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단,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사파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사파타 역시 그들에게 실망하여 모렐로스로 돌아가 농지 개혁을 통해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전념했다. 그곳 농민들은 잠시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으나 정부에서는 또다시 군대를 파견해 공격해왔고, 사파타는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결국 그는 계략에 걸려 사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군들은 모렐로스에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가 시작한 농지 분배 정책을 완수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았다. 오늘날 멕시코에서는 농지 개혁을 통해 혁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사파티스타’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이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