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초기의 강직한 정치가 카토의 증손자는 그 명성을 이어받기에 충분한 성품과 능력을 가졌는데, 선조와의 구분을 위해 소 카토라고 불린다. 그는 청렴결백한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공화정 말기에 공화주의 이상을 투철하게 지켜나갔다.
당시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카토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무장해제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귀환하라는 카토의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는 고심 끝에 루비콘 강을 건넜고, 이어진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카토는 아프리카의 속주인 우티카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게 자신을 사면할 권리가 있음을 암묵적으로조차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던 카토가 택한 길은 자살이었다.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함을 웅변하는 <파이돈>을 읽으면서 실행한 그의 선택을 플루타르코스는 상세하게 전해준다.
칼에 찔린 그의 복부에서 창자가 밖으로 돌출되었고, 그가 쓰러지며 난 소음에 가족과 하인들이 몰려와 처참한 피바다를 보았다. 의사가 수술로 창자를 봉합했으나, 의식을 되찾은 카토는 의사를 밀쳐내고 수술 부위를 다시 개복한 뒤 곧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이렇게 개탄했다 한다. “카토여, 그대의 생명을 보전해준 것이 그대에게 통한이었던 것만큼 그대의 죽음은 내게 통한이요.”
사망 이후 카토의 이름 뒤에는 ‘우티켄시스’라는 별칭이 하나 더 붙었다. 어떤 지역을 획득해온 장군에게 그 지역의 이름을 별칭으로 붙여주던 관례를 고려한다면, 우티카에서의 자살이 카이사르의 폭정에 대한 카토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명예로운 칭호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그를 연옥의 수호자로 등장시킬 정도로 수많은 문학 작품이 그의 죽음을 추앙한다.
귀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타락한 세계의 비정함에 대한 더없이 강력한 항변이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