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카라칼라 대욕탕
독서신문, <책과 삶>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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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욕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거기에는 몸을 깨끗이 씻고 휴식을 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겼다. 신체의 정결은 마음을 가다듬기에 앞서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기 때문에 목욕은 신성한 의식을 위한 한 수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목욕은 은밀한 상상력을 부채질해 쾌락의 도구로 여겨지기도 했다.
목욕에 관련된 관행은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다고 알려진 고려 시대에는 목욕 문화도 발달해 혼욕은 물론 여러 종류의 향을 이용한 목욕법이 성행했다. 조선 시대에도 목욕은 중요했다. 그러나 의미가 달라졌다. 고려의 성문화를 경멸하며 유교사상을 숭상한 조선 시대에는 내면과 외면의 청결을 동일시한 이유에서 목욕 문화가 발달했다. 세수를 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누구나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세수였고, 제례 전에는 반드시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했다.
로마인은 서양에서 목욕을 가장 애호한 민족이었다. 로마에는 물을 공급해주는 수로가 열세 개나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 긴 것은 20km가 넘는다. 엄청난 수압을 견딜 수도관을 만들 금속 자원이 별로 없던 로마는 나름 경제적 방안을 강구해 흙으로 수로를 만든 것이다. 그 이유는 로마의 목욕탕 때문이었다. 역사가 로렌스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막대한 경제력과 기술을 쏟아 부어 지붕을 얹은 가장 큰 건물이야 말로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19세기에는 기차역, 18세기에는 궁전, 중세에는 대성당이었다. 로마에서는 공중목욕탕이었다. 이곳이 공공 생활의 초점이었다. 목욕은 근본적인 사회적 의무였다.” 실지로 목욕탕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카라칼라의 목욕탕은 잠실야구장 넓이의 약 16배에 해당한다.
온천은 목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지각 깊은 곳의 뜨거운 암석층과 접촉하여 뜨거워진 물이 분출하여 이루어진 온천에 대한 정의는 합의를 이루지 못할 만큼 다양하다. 지열에 의해 덥혀진 물이면 모두 온천이라 부르기도 하고, 체온보다 높아야 한다거나 섭씨 50도를 넘어야 한다는 기준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온천과 관련된 역사는 그런 물리적 정의보다 훨씬 함의가 풍부하다. 그것은 역사의 시대가 변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 하며 변해왔다.
서양의 중세에 사회의 모든 계층은 순례를 떠났다. 그것은 참회는 물론 복을 바라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중세인의 삶에 있어서 성(性)적 모험을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순례의 장소에 온천이 빠짐없이 꼽히는 이유였다. 종교개혁으로 순례가 금지되면서 온천의 의미가 바뀌었다. 이전에 성천이 있던 순례지에 온천장이 세워졌다. 이제 온천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질병 치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실용적인 관심이 생기며 물의 사용 범위도 확대되어 목욕학, 또는 수치료학이 의학에서 중요하게 떠올랐다.
물의 효용이 높아지자 그것을 상품화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의사, 약제사 등이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온천물을 이용한 수치료법을 폭넓게 보급시켰다. 그 결과 온천장은 독보적인 의료 기관이자 레저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을 사용하는 데 사용료가 붙었고, 온천과 수치료법에 관련된 다양한 직종이 생겼다. 광천수의 판매가 이루어졌고, 쾌적한 욕탕과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 온천장 자체가 새로운 휴양지로 변모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여행자가 대체로 수도원 같은 종교 기관에 묵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온천장이 새로운 숙박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온천장이 고급 휴양지가 되면서 빈곤층이 쫓겨났다. 전통적으로 온천장은 성지였기 때문에 병을 고치려던 빈민의 방문이 잦았다. 상업화의 물결에 편승해 이윤 추구를 극대화시키려던 온천장의 주민들이 그들을 ‘무임승차자’ 취급하면서 배척한 것이다. 빈자 전용의 목욕탕을 만들어 공간적으로 격리했고, 배척의 과정에는 의사들도 참여했다. 그들은 빈민에게는 온천욕이 필요 없다는 논지를 폈다. 자비나 자선과 같은 인간애가 더 이상 의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닌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목욕과 온천의 역사에도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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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어야 할 책
설혜심, 『온천의 문화사: 건전한 스포츠로부터 퇴폐적인 향락에 이르기까지』, 한길사, 2001
김규한, 『한국의 온천』, 이화여대 출판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