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시라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노무현
이제 나는 봄날이 싫어졌습니다
사월은 역사의 낡은 유물처럼 빛바랜 채 뒤틀려졌는데
다시 또 오월은 아우성처럼 머리맡을 뒤척이고
유월은 소리쳐 잠든 시간을 일깨우겠지요
초록과 싱싱한 것들 꿈틀거려야 할 이 땅의 시간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나라가 두렵습니다
생명을 무참히 짓밟는 이 정권이 끔찍합니다
아니라고 도리질을 쳐봅니다
어찌 그리 가셨는지요
살아오며 잘못한 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우러른 하늘 떳떳한 사람 그리 많겠습니까
나도 욕했습니다
이런저런 나라의 일로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합니다
피 흘리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연둣빛 새싹을 틔우는 것을,
잎을 드리우고 줄기가 자라며 뿌리내려가는 시간을,
햇살처럼 노란 깃발이었던 당신을 떠올립니다
벼랑 끝에 내몰렸던 뒷등을 보았습니다
눈시울 붉혀 찍어 내리던 당신의 눈물,
거침없는 단호함을, 쩡쩡거리는 올곧은 분노와 벼락같은 호통의 말갈기,
푸른 소나무를 생각합니다
천길 벼랑 끝 바위 틈에 서서 부단의 강물로 노래하는 소나무를,
지친 새들의 작은 날개를 곤히 쉬게 하는
바람 부는 언덕 위 늘 푸른 소나무 말입니다
당신 떠난 자리 참으로 커다랗습니다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은 이렇게도 잔인한 것입니까
산 첩첩 의로운 자들의 묘비명을 쌓은
죽음으로 가는 제단이어야 합니까
비, 비, 이 땅은 지금 우기의 날들
저 비를 딛고 일어설 아름다운 희망의 꿈을 꾸어봅니다
침략과 전쟁과 위선과 기만에 찬 모든 악의 무리들이,
그 이름의 대명사인 제국주의 미국과 살인정권이,
남김없이 뽑혀지고 사라져서 이루어질
생명과 평화로 가득 찬 통일조국의 신명난 세상 말입니다
남은 것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부디 잘 가시라는 말 아직 못하겠습니다
그곳에서 평안하시라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 땅에 산화해간 모든 열사들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출전: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박남준, 실천문학,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