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정책을 강제하기 위해 만든 장치의 하나에 ‘통행법’이 있었다.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시행되어 점차 정교하게 세칙을 강화시킨 이 법에 따르면 흑인은 물론 유색인종은 그들에게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때 항상 ‘통행권’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일종의 국내 여권인 이 신분증에는 사진과 지문을 포함한 신상 명세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백인은 어떤 흑인에게든 제시를 요구할 수 있다. 거부는 체포로 이어진다.
법에 의해 다스리는 것이라 하여 ‘법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60년 샤프빌의 경찰서 앞에 수천명의 흑인이 모였다. 통행권을 지참하고 있지 않으니 체포해 가라는 시위였다. 군중이 늘어나면서 평화롭고 축제 같던 분위기가 점차 격앙되어갔다. 마침내 기관총까지 동원한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었다. 전투기까지 저공비행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기껏해야 돌멩이를 들었을 뿐인 시위대 69명이 사망했는데, 그들 대다수는 등에 총을 맞았다.
국제적인 비난을 받은 이 사건 이후에도 남아프리카 정부에서는 영연방에서 탈퇴하면서까지 인종차별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냉전 체제 속에서 남아프리카를 자신의 진영에 포함시키려던 미국을 비롯해, 이곳 자원에 탐을 내던 서구 강대국의 막후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에 저항하던 흑인 단체에서는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그리고 국제 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통행법’은 1986년에 철폐되었다.
이후 샤프빌은 흑인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학살이 있었던 3월21일은 196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지정되었고, 1994년부터는 남아프리카에서 ‘인권일’로 기념된다. 1996년 12월10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새로 만든 감회 어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을 비준했다. 샤프빌이 서명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