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반신반인의 따님과 미천한 자의 염문설로 시끌 시끌하죠? 저는 박모 여인과 윤모 놈의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17세기 후반 러시아의 소피아가 떠오르더군요. 우리도 다행히 박모 여인 이후에 개혁이 일어나면 좋을텐데...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바이킹, 금발미녀, 아바, 복지후생의 천국으로만 알려진 스웨덴이 17~18세기에 북유럽은 물론 러시아까지 정벌했던 초강대국이었던 역사를 아는 분은 얼마 안 될 겁니다. 저도 Peter the Great라는 러시아 최고의 인물에 대한 영문소설을 읽기 전까지 막연하게 바이킹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제가 폴타바 전투에 대해 공부하게 된 계기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토의 변방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변모하게 된 표트르Peter 대제의 소설에 등장하는 전사왕 칼 12세Karl XII(1682년 6월 17일 ~ 1718년11월 30일)를 알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군신으로 불렸던 선왕(할아버지 칼 구스타브 10세, 아버지 칼 11세)가 모두 40 초반에 요절하면서 17세에 첫 전투에 나선 칼 12세는 전사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수비보다는 공격을, 안전한 후방보다는 선두를 택하면서 북유럽과 폴란드를 평정한 후에 러시아로 원정을 떠납니다.
당시 프랑스에 버금가는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맞이하게 된 표트르는 초토화작전으로 시간을 끌다가 평생 공들여 육성한 유럽식 신식군대로 최후의 일전을 치른 전투가 바로 폴타바 전투입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두 인물, 두 국가에 대한 배경까지 설명하려면 일본 전국시대와 같이 초장편이 되기 때문에, 흥분을 가라 앉히고 여기에서는 폴타바 전투와 관련된 배경과 전투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다른 기회로 돌리기로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번역해서 출간하고 싶은 Peter the Great를 여러분에게 선보일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먼저 러시아의 상황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 역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한 장면, 폴타바(Poltava) 전투 1부
역사, 특히 전사는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항우와 유방, 조조와 유비,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과 같은 영웅과 영웅의 대결의 연속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기생유하생량(나, 주유가 있는데도,하늘은 어찌하여 제갈량을 또 내셨는가!)를 외치면서 피를 토하고 죽은 주유와 같이 다른 시대,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웅지를 그대로 펼칠 수 있었을 인물이 좌절하는 모습은 가슴아프게 만들지만, 절대영웅 두 사람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는 신경전은 당사자의 피말리는 심정과 상관없이 가장 재미있는 분야다.
이번에 소개할 칼 12세와 표트르 1세의 대결도 강철대왕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칼 12세가 10년만 먼저 태어났더라면... 아니면 표트르가 그냥 평범한 중세 지도자였다면... 지금의 북유럽과 동유럽, 아니 서구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폴타바 전투를 바로 설명하기 전에, 양국의 상황과 두 영웅의 성장과정부터 설명해야 여러분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표트르 1세 - 골육상쟁의 연속
섭정을 하던 이모 소피아가 그에게 권력을 넘겨준 1689년까지 러시아는 동방정교와 농업 중심의 동토왕국에 불과했다.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 군의 주축은 스트렐치라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는 구시대 병사들이었다.
(거의 모든 분이 스트렐치라는 용어를 처음 들을텐데, 스트렐치(Стрельцы?, Streltsy)는 "사격수"란 러시아어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존재했던 러시아 황실 친위대입니다. 커다란 도끼를 들고 다니며 원거리 사격전과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본격적인 화약무기 시대 이전에 두 가지 형태가 혼재된 정규군입니다.
1500년대 중반에는 러시아를 지키는 핵심전력이었지만 1600년대부터는 정치세력화되면서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세력의 테러조직이 되어 황실을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비슷한 예로 오스만제국의 정예군 예니체리가 있는데, 처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쟁기계였던 예니체리가 점차 정치세력화되면서 개혁을 거부하고 술탄을 갈아치우는 폐해까지 생겼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나 군 상황을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왕조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대로 왕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터키의 예니체리가 그랬듯이 초심에서 벗어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고 거꾸로 러시아의 개혁을 방해하는 수구세력이 된다.
외국출신이었던 어머니 나탈리아의 영향으로 궁전에는 언제나 외국 사절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표트르도 자연스럽게 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새로운 세상을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스트렐치와 같은 수구파의 눈에는 궁전이 외국인에게 점령당하고 정통성이 위협받는 것으로 비쳐졌다. 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죽으면서 당연히 표트르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이모 소피아의 사주를 받은 스트렐치의 반란으로 모스크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어머니와 함께 여름 궁전으로 쫓겨난 피터는 자신의 숙부가 바로 눈 앞에서 도끼에 맞아 죽는 모습을 봤고, 자신도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10살 때부터 간질병을 앓고 성격이 거칠어진다. 그에게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기였겠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자신과 조국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스트렐치의 비호아래 왕좌에 올랐다면 수구파의 꼭두각시가 되었겠지만,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 버림을 받았던 덕분에, 수구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최초의 신식군대가 바로 이 때 조직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동네 총싸움 놀이에서 시작했었지만...
여러분도 어린 시절 동네를 뛰어다니며 총싸움을 했었겠지만 표트르는 황제(모든 권력은 이모 소피아만 가지고 있는)답게 그 수준이 엄청났다. 그는 자신과 함께 별궁에 쫓겨난 귀족의 자제와 신하들로 포텐시니예라는 놀이군대를 조직해 본격적인 전쟁놀이를 즐기게 된다.
소피아는 어린 황제가 정치보다는 병정놀이에 빠져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지원해주라고 방치를 한다. 아마도 군복이나, 기껏해야 칼 정도라고 생각했겠지만, 표트르의 놀이군대는 이미 소년 군사학교 수준을 넘었기 때문에 심지어 대포까지 갖추게 되고, 그 수도 600명을 넘어서게 된다.
결국 소피아는 이 놀이 군대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17세기 말의 러시아
도대체 당시의 러시아 군이 어느 정도였기에 소년들로 구성된 놀이 부대가 최초의 현대식 군대이자 최정예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변방민족인 타타르(Tatar, 러시아를 통치하다 밀려난 몽골족)의 사냥터와 다름이 없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왜구들이 아예 작정하고 도시를 점령하는 것처럼, 1662년에는 푸티블을 점령하고 시민 2만 명을 전부 노예로 잡아갔을 정도다.
17세기 말까지 러시아 노예는 오스만 노예시장의 주요 거래상품이었고 동부 지중해 항구마다 갤리선에서 사슬에 묶여있는 러시아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러시아 본국보다 외국에서 러시아 사람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농담이 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지만, 러시아의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모두 너무나도 부실했다. 궁여지책으로 오스만의 술탄에게 설문을 빙자한 공물을 바쳐 타타르 인들을 통제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막대한 재원 중 하나인 러시아 노예를 술탄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전체, 특히 모스크바에서 보면 별로 상관하고 싶지도 않은 외곽이 약간의 피해를 입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을 향해 진출하면서 이슬람 전선과 기독교 전선의 종교전쟁이 벌어졌고 폴란드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본토견제를 맡게 된다.
그러나 자국의 국경도 못 지키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타타르 인들을 토벌해서 그 동안의 복수도 하고 이슬람 진영의 한 축을 무너뜨렸다는 명분도 세우기로 한다.
다른 것도 무능했지만 전쟁에는 거의 재앙덩어리였던 소피아와 그의 연인 골리친은,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스텝지역을 횡단해 수 천km나 떨어진 크리미아 산맥에 있는 타타르 수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편안한 궁전에서 썩어빠진 수구파들은 그런 고생을 할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군대를 모은 김에 손쉬운 폴란드나 공격하자는 황당한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소피아는 무능한 연인 골리친이 이 기회에 큰 공을 세워 황제로 옹립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징집하고 특별세를 부과해서 군수물자까지 마련했는데 문제는 수구파 중 어느 누구도 전투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687년 5월 약 10만 명의 대군이 오렐과 폴타바를 향해 출발한다. 골리친은 타타르의 기병에 주의하면서 6월 13일, 드니에프르 강 하류까지 진출하지만 이상하게도 타타르의 본대는 고사하고 정찰대조차 만나지를 못했다.
10만 명의 대군이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타타르가 모를리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광활한 평원에서 수 만 명의 타타르 기병과 마주칠 것으로 예상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 만 명의 야만족 기병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 러시아 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불타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초토화된 스텝의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초원에서는 기병대의 말에게 먹일 목초는 물론이고 수송대의 주축인 소가 먹을 것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타르의 대응에 당황한 골리친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후퇴시키기 시작한다. 또 한 번 그런데... 이미 후방의 초원에도 타타르 선봉대가 전부 불을 놓아, 전진하자니 굶어 죽을 판이고 후퇴하자니 불타 죽을 상황이었다. 그래도 후퇴하는 것이 안전했기에 불길을 뚫고 후퇴를 거듭한 러시아 군은 타타르와 마주치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려 4만5천 명을 잃었다.
원정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골리친은 타타르의 칸이 자신들을 보고 산맥 깊숙이 도망갔다고 허위보고를 했고 사랑에 눈이 먼 소피아는 한술 더 떠서 전국에 국경일을 선포한다.
그렇지 않아도 무능한 두 연인의 실정에 실망을 하던 러시아 국민들은 이 일로 인해 표트르라는 대안을 머리 속에서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실수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느냐에 인재와 고문관이 구분된다. 못난 연인은 또 한 번 주제를 모르는 사랑놀이를 벌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무려 50%에 육박하는 손실이 이해가 안되실 텐데, 보통 장거리 원정을 떠나게 되면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사기가 높은 상태에서도 병이 나거나 기동력부족으로 낙오되어 전력에서 제외되는 병력이 최소한 10% 이상은 됩니다. 그리고 전진할 때에도 탈영하는 병력이 이어지는데, 후퇴할 경우에는 탈영병이 줄을 잇게 되죠. 그래서 전투 한 번 없이 무려 50%에 이르는 손실을 보게 되는데, 전사와 같은 완전한 손실은 아니더라도 당장의 전투에 동원할 수 없는 손실이니까 손실은 손실이죠.)
소피아의 실정,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러시아의 자존심
러시아는 사랑 놀이에 흐느적거리고 있었지만 동유럽의 상황은 절대위기 상태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스만 군대를 몰아내기도 했지만 1688년에는 폴란드도 거의 붕괴직전이어서 러시아 혼자 오스만 제국을 떠 맡아야 할 판국이었고 제 아무리 정신없는 소피아라도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산맥 깊숙이 쫓겨 들어갔다는 타타르 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유린하며 폴타바와 키에프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겨울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타타르 인들의 수레에는 무려 6만 명이 넘는 러시아 국민이 묶여 있었다.
궁지에 몰린 골리친은 두 번째 원정계획을 세웠고 러시아군은 얼음이 채 녹기도 전부터 서둘러 원정을 떠났다. 3월이 되자 골리친은 112,000 명의 군대와 450문의 대포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나섰다. 봄이 되면서 불어난 강물과 그 유명한 진흙대장군으로 힘겨운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사마라 강에서는 코삭크 기병도 12,000명이 합류해 막강한 기병전력까지 갖췄다
그림 설명: 대장 불리바라는 영화로 친숙한 코사크 족. 코사크 족의 그림은 항상 유쾌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때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에도 악몽을 안겨주었고 2차대전에서도 낙오한 독일군들에게는 코사크 기병대가 악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봄이 되면 진탕이 되는 러시아 지방도로 때문에 2차대전 당시 독일군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군의 T-34 전차의 궤도는 폭이 매우 넓었고 진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목재를 하나씩 싣고 다녔습니다. 반면에 독일군의 초기 전차들은 모두 좁은 궤도여서 진흙에 빠지면 다른 전차가 구조해주기 전에는 기동불능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봄과 가을 도로상황을 진흙대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 번의 실패의 교훈을 되살려 선봉대를 보내 스텝 초원에 미리 불을 질러서, 본대가 도착할 때 쯤이면 어느 정도 목초가 자라게 만들어두었다.
기병, 포병, 보병 3박자가 모두 갖춰진 러시아 대군을 맞은 타타르는 5월 중순 10,000명의 기병대를 보내 러시아군의 수송대를 노리지만 골리친은 대포를 재빨리 정렬시켜 물리쳤고, 5월 30일 드디어 타타르 수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120,000명이 넘는 러시아 대군이 타타르 수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대학살로 피의 복수를 했을 것으로 예상하겠지만, 그랬다면 표트르 대제는 없었을 테고 지금의 러시아도 없었을 것이다.
기세 좋게 수도를 포위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도의 성벽은 굳건했고 타타르 인도 충분한 병력과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군이 보유한 대포는 공성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소구경 대포가 대부분이었고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공병부대가 없었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오래 전의 영화 라스트 모히칸, 킹덤 오븐 헤븐, 트로이 등의 영화에서도 잘 표현되었듯이, 프랑스 군이 성벽에 근접할 때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긴 교통로를 파가다가 공격을 하거나, 무슬림이 며칠 밤낮 투석기로 두들기다가 부서진 성벽 틈으로 밀고 들어가거나, 트로이의 성벽은 아예 기어 올라가지도 못해 목마라는 편법을 짜냈다.
표트르도 아조프를 공격할 때에 공성전문 공병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 된다.
어쨌든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잡은 골리친은 엉뚱하게도 먼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지 말 것, 러시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말 것, 그 동안 잡아간 러시아의 국민을 돌려 보내라는 3가지 강화조건을 제시한다.
포위를 당했는데도 느긋한 칸은 처음 두 조건은 한 번에 거부했고 세 번째 조건도 잡아온 러시아 인들은 모두 노예로 팔았거나 달아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골리친은 조건이 하나도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화를 맺을 수도 없었고, 공병과 공성무기없이 공격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철군을 명령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모스크바에는 타타르의 칸을 성안에 가두고 강화를 이끌어냈다는 허위보고가 전해졌고 소피아는 표트르에게 승전축하 개선행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정에 참여했던 외국인 참모의 보고서는 허황된 모스크바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20,000명이 죽고 15,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보다 더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70문의 대포와 모든 전쟁물자를 타타르 인들에게 넘겨주고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의 실망은 통제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고 급기야 개선행진에 참석한 표트르는 시민이 보는 앞에서 소피아에게 한 계단 내려가 설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소피아가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는 것으로, 소피아가 명령에 따르지 않자 표트르는 화를 내며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