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러일전쟁은 일본이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는데도 무기력한 러시아 제정과 무능한 지휘관이 스스로 패전을 자초했습니다. 육상전에서는 봉천에서, 해상전에서는 대마도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자멸하고 말았죠.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고 만주를 확보한 상태에서 일본의 진출을 제어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러일전쟁 최대의 전투, 봉천(센양)전투 (2부)
봉천(지금은 센양)은 평원지대로 동쪽에만 언덕과 산이 연이어져 있다. 남쪽 몇 km 떨어진 곳에는 훈강이 흐르고 다시 15km 남쪽으로는 샤강이 흐르고 있다. 남만주철도는 봉천의 서쪽 외곽을 따라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지나갔다.
쿠로파트킨은 서-동으로 160km에 걸쳐 3개 군을 배치해서 얇은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1 만주군은 봉천 남동쪽 50km 지점의 고지에 자리잡아 좌익을 맡았고 제3 만주군은 봉천 남쪽 16km 지점의 중앙을 맡았고 샤강 남쪽 강변의 교두보를 포함해 전략요충지를 지켰다. 우익의 제2 만주군은 봉천의 남서쪽 32km지점에서 훈강의 남쪽 강변까지 방어했다.
쿠로파트킨의 275,000명은 러시아 역사상 단일 전투에 동원한 최대규모의 병력이었다.
2월 중순, 일본군은 러시아 진영의 반대편인 샤강 남쪽에 3개 군을 배치했다. 좌익에는 제2 군, 중앙에는 제4 군을, 제1 군은 우익에 배치했다. 양쪽의 참호는 보통 몇 km 밖에 있었지만 겨우 몇 백 미터 거리도 있었다.
2월 25일로 예정된 쿠로파트킨의 공격은 산데푸 전투의 재판이었다. 우익의 제2 만주군이 중심이 되어 산데푸의 일본군 좌측을 우회하면 중앙의 제3 만주군이 대포사거리까지만 전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좌익의 제1 만주군은 어떤 임무도 받지 못했다.
신속한 실행이 관건이었는데도 쿠로파트킨은 세밀한 작전을 다듬으며 몇 주를 흘려 보냈다. 쿠로파트킨은 부하들에게 작전안을 회람시키고 의견을 모으며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참모들이 세밀한 부분까지 협의를 마쳤는데도 여전히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반대로 오야마와 코다마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 보내지 않고 신병과 노쇠한 예비군까지 긁어 모으며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할 준비를 마쳤다. 러시아군에 비해 아직도 숫자가 모자라지만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쿠로파트킨과 몇 개월 동안 교전하면서, 러시아군은 관료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획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러시아군은 계획이 어긋나거나 예상하지 못한 위협을 만나면 어김없이 혼란 속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이 그린 쿠로파트킨입니다. 승리를 거둔 후에 적장을 과장되게 표현해서 자신의 승리를 더 빛나게 하는 기록이 많은데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는 다음 그림과 같은 표현이 더 맞겠죠.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약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새로 구성된 제5 군이 러시아군의 공격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인 2월 18일에 동쪽 끝의 협곡을 공격해서 일본군 전체가 마치 러시아 방어선을 우회하는 혼란을 주기로 했다. 오야마와 코다마는 쿠로파트킨이 당황해서 예비군을 동쪽에 모두 밀어 넣게 만들 생각이었다.
러시아 예비병력이 동쪽에 투입되면, 일본군은 서쪽에서 진짜 공격을 시작하는데, 제3 군이 러시아 우익을 크게 돌아서 남만주철도를 차단하기로 했다. 러시아 우익이 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물러서면, 일본군 전체가 앞으로 전진하며 러시아 방어선을 U자 형으로 축소시키고 포위망에 가둔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오야마는 명령문을 간단하게 작성했다. “전쟁의 향방을 정하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특정지점이나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 최대한 빨리, 멀리까지 적을 추격해야 한다.”
러시아군 우익은 주요 도로나 협곡을 내려다 보는 요새에 분산되어 있었다. 강추위로 경사면이 얇은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신속한 기동은 불가능했다. 일본군은 기세를 올리며 난관을 돌파해 우회하려고 했다.
베레스넵Beresnev 고지를 공격할 때에는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얹고 달려나갔다.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사격을 받으면 모래주머니를 자신의 뒤에 던져 뒤따라오는 동료의 엄폐물을 만들었다.
산악전투가 점점 치열해지는 동안 나머지 일본군은 기회를 기다리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후 며칠 동안, 쿠로파트킨의 사령부에는 동쪽 전선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전신음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쿠로파트킨은 이전에 노기의 제3 군에 속했던 일본 제11 사단이 동쪽 공격에 참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제3 군 전체가 동쪽에 투입되었다는 소리인가?
2월 24일 새벽, 만주 정보를 담당하던 우카치고로비치Ukhach-Ogorovich 장군은 일본군이 다음 날로 예정된 쿠로파트킨의 공격계획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정보를 손에 넣었다. 러시아의 전투계획 상당부분이 일본군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믿을만한 정보였다.
우카치고로비치는 직접 쿠로파트킨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쿠로파트킨은 “(제2 만주군 지휘관) 알렉산드르 카울바르스Kaulbasrs에게 가서 그 내용을 알리시오. 그에게 성공가능성을 가늠해보고 제2 군이 내일 일본군을 공격할 것인지에 대해 전신으로 즉시 알리라고 말하시오”라고 명령했다.
쿠로파트킨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울바르스에게 직접 전신을 보내야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우카치고로비치는 그날 오후 5시까지 제2 만주군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카울바르스는 계속 들어오는 나쁜 소식에 정신이 없었다. 정찰병이 산데푸 남서쪽 일대에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노기의 제3 군으로 러시아의 정보망을 교란시키기 위해 계속 기만기동을 하고 있었다. 카울바르스는 90,000명으로 적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새로운 보고에 따르면 자신의 병력이 열세였다.
카울바르스는 다른 지휘관들과 가진 회의에서 쿠로파트킨이 제 때에 예비병력을 지원해줄 수 있다면 예정대로 공격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울바르스는 회의를 중단하고 최고사령관과 장시간 전신회의를 했다. 카울바르스는 다시 회의를 소집하고 “단 한 명도 증원할 수 없다… (동쪽 협곡지역의) 알렉세옙이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최고사령관의 답변을 공유했다.
증원병력도 받지 못하는데다가 (나중에 오보로 알려진) 일본군이 이미 자신의 공격계획을 알고 있다는 보고까지 받은 카울바르스는 쿠로바트킨에게 다시 전신을 보내 공격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알렸다.
이 시점에서 이미 승패가 판가름나기 시작했다.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에게 주도권을 내주었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기만공격에 속아 예정된 공격을 중지시키고 병력을 빼내 동쪽을 지원했다. 만약 공격적인 지휘관이었다면 동쪽이 밀리고있어도 궤멸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을 고수하며 그대로 밀고 나갔을 것이다. 동쪽이 심각하게 밀린다고 해도 예정대로 서쪽 공격이 제대로 적중한다면 전선은 일진일퇴의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군의 작전을 미리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며칠 동안, 쿠로파트킨은 제2 만주군의 예비병력을 빼내 동쪽 전선에 투입했다. 그리고 집단군 전체의 예비군도 모두 빼냈다. 결국 1 시베리아 군단, 72사단, 6 동시베리아 보병사단의 2여단, 146연대를 모두 보냈다.
오야마와 코다마는 2월 27일에 함정을 펼쳤다. 제3 군의 4만 명과 대포 200문이 러시아 우익을 우회했다. 러시아 기병이 압도적이었는데도 우익에 배치된 코사크 기병대는 적의 기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일본군이 접근하고 있는데도 저녁식사를 할 정도였다.
오야마와 고다마는 중앙의 2와 4군이 러시아군 중앙에 집중포화를 퍼부어 꼼짝도 못하게 만들고 다른 지역을 응원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군은 뤼순항을 함락시킨 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1인치 곡사포 6문을 기차로 실어왔다. 일본군은 초대형 포를 러시아 요새 반대편의 콘크리트 받침대 위에 올렸다.
2월 28일 새벽, 일본군은 100문 이상의 중포의 포문을 열었고 러시아군도 비슷한 숫자로 응사했다. 하루 종일 계속된 포격음은 50km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맹렬했다. 러시아군은 1904년 4월 정도에 이미 참호건설을 마쳤기 때문에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푸틸롭과 원트리 고지에 주둔한 부대는1,000발의 포탄을 두들겨 맞고도 겨우 33명만 죽었다.
일본은 두 요새고지 주변의 어지러운 참호망에 11인치 곡사포를 조준했다. 근처 야전병원에 있던 베레사엡 의사는 250발의 포탄세례를 직접 경험했다. “눈에 안보이는 거리에서 날아든 강철괴물은 참호와 철조망을 강타했다. 탄착점에서 회색, 황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연기가 피어 올랐고 거대한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탄착점은 완전히 사라져서 안보였다.”
중앙의 대대적인 포격은 쿠로파트킨의 귀중한 24시간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갈피를 못 잡고 허둥지둥했다. 먼저 그는 코사크에게 서부 전선을 무력정찰하고 적의 우회기동 규모를 파악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일종의 안전장치로 보병 여단 하나를 빼내 봉천 북서쪽으로 보냈다.
이튿날, 일본군의 주공이 서쪽을 노린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쿠로파트킨은 2개 보병사단을 카올리툰으로 돌리고 2개 사단을 살린포로 돌려 4개 사단을 봉천 북서쪽으로 급히 전개했다. 제때에 도착하면 4개 사단은 러시아군은 총 72개 대대가 되어 일본군의 우회병력(42개 대대)의 2배가 되기 때문에 우회로를 충분히 차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4개 사단이 제대로 전개되려면 최소한 24시간이 필요했다.
3월 2일, 아침내내 폭설이 쏟아졌다. 동쪽 전선에서는 눈밭에서 일본군의 기동을 쉽게 구분할 수 있어 러시아군에게 유리했다. 오후에 있었던 일본군의 공격은 그대로 노출되어 집중사격을 받았다. 사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마치 눈보라가 다시 불어 닥친 것처럼 보였다. 한 여단은 20분 만에 128명을 잃었다.
일본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낸 동부전선은 안정을 되찾았다. 쿠로파트킨은 이제 동부전선으로 보낸 병력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며칠 동안 동쪽으로 달려가던 정예 제1 시베리아 군단은 뒤로 돌아 서쪽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0km의 거리를 오가며 정예군단은 탈진했을 뿐만 아니라 7일이라는 결정적인 시간을 허비했다.
일본 제3 군은 봉천 서쪽 16km 지점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았다.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켜서 반격할 시간을 벌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가 급하게 투입한 병력은 전장에 조금씩 도착한데다가 협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바램과는 달리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전쟁초기부터 러시아군을 괴롭혔던 문제가 결정적인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 기병지휘관은 무능력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최고사령관은 적의 전력과 위치에 대해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휘관의 협력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카울바르스는 쿠로파트킨을 계속 실망시켰다. 그는 자리를 잘 잡고 있던 2개 사단을 뒤로 빼내는 큰 오판을 했고 일본군은 그 기회를 잃지 않고 바로 빈 곳을 파고 들었다.
카울바르스는 3월 5일, 쿠로파트킨의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섰다. 3개 공격로 중 우측에 48개 대대를 집중시켜 일본 제3 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중앙에는 26사단, 좌측에는 32개 대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199문의 포가 화력을 지원했다.
압도적일 수도 있었던 공격은 지휘관의 무능력, 러시아군 전체에 만연한 패배주의와 관료주의로 힘을 잃었다. 성공의 열쇠를 쥔 우측 공격로는 너무 천천히 움직였다. 공격에 제대로 나서기도 전에 일본군이 좌측 공격로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카울바르스는 즉시 우측 공격로의 병력을 빼내 좌측 공격로를 지원했고 힘을 잃은 우측 공격로는 적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쿠로파트킨은 일방적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제1과 제3 만주군은 공격하라던가 아니면 반격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쿠로파트킨은 사령부에서 전황을 보고받던 중에 전과가 너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카울바르스가 이튿날 반격을 재개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카울바르스는 3월 6일에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섰고 전날보다도 훨씬 엉망인 상태가 되었다.
3월 7일, 일본 제3 군은 러시아 철로에서 7k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일본군의 우회공격 때문에 제2 만주군의 전선은 우측 안으로 굽어져서 한쪽은 남쪽을 다른 한쪽으로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이제 일본 제2 군도 남쪽에서 제2 만주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쿠로파트킨은 중앙에서 제대로 지휘하려면 전선을 축소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3월 7~8일 밤에, 그는 나머지 2개 군에게 북쪽 16km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요새화된 방어선을 버릴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고 뒤늦게야 추격에 나서면서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좋은 기회를 놓쳤다.
쿠로파트킨은 3월 9일에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운은 일본군 편이었다. 남서쪽에서 맹렬한 광풍이 불면서 반격에 나선 러시아 병사의 얼굴을 쳤다. 가시거리는 100m도 안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협조가 안되고 혼란스러운 러시아군은 잠시나마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정도의 성공만 거뒀다.
그날 밤, 쿠로파트킨은 봉천에서 북쪽으로 65km 지점에 있는 러시아 거점으로 총퇴각을 명령했다. 러시아군은 탄약창을 터트리고 보급창에 불을 질렀다. 제1과 제3 만주군이 먼저 후퇴하고 제2 만주군이 후위엄호를 맡았다.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지만 일본 제3 군이 철로에 접근해서 북쪽으로 향하는 러시아군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은 우두머리를 잃은 양떼처럼 고지로 달아났고 뒤에는 그들이 버린 온갖 잔해물이 길을 메웠다.
카울바르스는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도로 옆에서 쉬고 있었는데 한 장교가 다가와서는 7연대의 위치를 물었다. 그는 “7연대? 군 전체가 어디있는 지도 모르는 판에 7연대를 어떻게 알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군은 3월 10일에 봉천에 입성해 2만 명의 러시아군을 잡았다. 몇 주 동안의 행군과 전투에 지친 일본군은 패주하는 러시아군의 뒤를 추격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20,000명 전사, 49,000명 부상, 20,000명 포로의 피해를 입었지만 나머지는 무사히 후퇴했다. 그리고 피해는 바로 복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15,000명 전사, 60,000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는데 복구할 수 없는 손실 그 자체였다. 병력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봉천전투를 승리하고도 러시아군보다 훨씬 심각한 지경에 몰렸다.
며칠 후에 차르 니콜라스는 쿠로파트킨을 해임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리니에비치Petrovich Linievich(이전 제1 만주군 사령관)로 대체했다. 봉천전투 후 몇 개월 동안은 러시아군이 발트해 함대를 기다리면서 전선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2 태평양 함대로 이름을 바꾼 발트해 함대는 봄에 중국 해안에 접근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던 3월27일에 일본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고 쓰시마 해협전투에서 궤멸되었다. 12척의 전함 중 8척이 침몰했고 나머지 4척은 나포되었다.
다른 이야기로 정리할 예정인 발트해 함대의 지구 반바퀴 도는 경로입니다. 러시아의 주력함대는 북유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부동항까지 오는 방법은 지구 반바퀴를 도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치욕적인 마지막 패전은 반전세력뿐만 아니라 혁명세력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니콜라스는 국내의 압력을 받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05년 8월에 종전에 동의했다.
황당하게도 러시아는 육지에서 가장 유리할 때에 전쟁을 포기한 셈이 되었다. 1905년 가을이 되자, 만주의 병력을 일본의 3배 정도로 증원되었다. 리니에비치는 차르에게 유럽에서 이동시킨 정예군대를 이끌고 적을 분쇄시키겠다고 간청했지만 차르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었다. 차르는 만주를 포기하기로 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입니다.
봉천은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대군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보여주었고 기관총, 철조망과 속사포가 전투의 향방을 바꾼다는 것을 예언했다.
일본 지휘관은 전투 중에 적을 파악해서 상황에 따라 대응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정을 파고 훨씬 많은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봉천전투가 새시대의 도래를 알리기는 했지만 전쟁의 기본원리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일전에 소개해주신 로스뚜노프의 [러일전쟁사]를 보니 "(10월의) 제 3차 돌격이 시작될 당시 수비대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육류가 완전히 소비되어 9월서부터 병사들에게 말고기가 지급되었지만 그조차도 일주일에 2회뿐이었는데, 식량준비를 위한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고, 뤼순요새가 함략되기 직전에는 "조악한 급양으로 인해 병사들 중에서 티푸스, 괴혈병 및 야맹증 환자가 다수 발생했다."라고 한 부분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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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esgi
2014-11-18 15:09:48
전에도 설명드렸듯이 기원전부터 최근까지 어떤 전쟁이던 보급문제는 늘 선결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공격할 때에도 많은 병력을 끌고 가면 자멸하기 때문에 나누어서 동원하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포위군이든 수비군이든 보급과 위생문제로 수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이 늘 있던 일이고 당시 러시아의 보급상황은 정말로 좋은 편에 속했습니다.
예를 들어 2차대전만 해도 뤼순항과는 비교도 안되는 상태에서 2~3개월 더 버티는 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말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정도면 전사에서는 상당히 여유있는 편으로 분류됩니다. 콤에서 3개월을 버틴 독일군의 상황입니다.
1943년이 되자 이제 벨리키예 루키 지역은 성과 철도역, 2개의 방어점만 남게 된다. 성은 427명의 정비대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고, 철도역은 1,000명이 남아있었다. 이들에게 공수된 45개의 컨테이너 중에 7개만이 제대로 떨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 수중에 들어가버려 굶주리고 있었다. 300마리가 넘던 말도 모두 먹어 없앴고 매일 10명당 빵 한 덩어리만 주어졌고 20명이 고기 통조림 하나를 나눠먹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최소한의 위생시설도 없이, 온 몸은 이로 뒤덮인 채 굶주려가면서도 독일군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매일 그들에게는 3,000발 이상의 폭탄이 쏟아졌기 때문에 시체를 참호 밖으로 끌어내지도 못했다. 부상병은 가까스로 자리를 피해 상처를 스스로 묶어야만 했다. 식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진지 밖에서 길어와야 했는데 그나마도 파괴된 전차의 기름과 죽은 병사의 피가 섞인 물이었다.
뤼순항은 보급과 위생문제가 완벽했다고 해도 그 시간에 함락되었을 겁니다. 워낙 육지요새 건설이 부실했고, 그나마도 러시아군 지휘관이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고지를 너무 쉽게 내주었습니다. 보급과 위생문제는 오히려 일본군이 심각했습니다.
The Japanese army casualties were later officially listed as 57,780 casualties (killed, wounded and missing), of whom 14,000 were killed. In addition 33,769 became sick during the siege (including 21,023 with beribe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