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에 대한 자료는 상당히 많은데, 안타깝게도 제가 영어만 가능해서 러시아어로 된 좋은 자료를 인용하지 못합니다. 국내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관심도 적어 번역자료도 거의 없는 편이어서 러시아 역사에 대한 자료가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러시아에 대한 자료는 하나 하나가 참 귀중합니다.
중국 지명은 참 난감합니다. 우리가 흔히 배웠던 한자식 발음이 있는데, 그것에 맞는 중국식 발음을 찾기 힘들고 제대로 발음하기 힘들어서 혼용하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부는 오후에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일전쟁 최대의 전투, 봉천(센양)전투 (1부)
1905년 초, 러시아 신문사의 한 아일랜드 기자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의 선양부근에 주둔 중인 부대를 찾았다. 프란시스 맥컬러그McCullaghsms 참호, 철조망과 방호벽을 본 후에 러시아군의 방어막은 난공불락이라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그는 “만나는 병사 거의 모두가… 표정이 어두웠고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러시아군은 이전 해에 당한 당혹스러운 연패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도 방문했었던 맥컬러그는 “자기들끼리 부르는 노래조차도 우울했다. 그 중에 징집병이 고향을 떠난 노래가 가장슬펐는데 일본 징집병 막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쾌활한 분위기와 정반대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한 징집병의 기분을 달래주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거꾸로 그 병사는 이제 막 시작된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기자는 봉천전투의 초반전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천전투는 50만 명이 넘는 병사가 3주에 걸쳐서 160km의 전장에 투입되며 그 당시까지 단일 전투사상 최대규모로 확전되었다.
봉천전투는 복잡한 참호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전통방식에 야전전화, 철조망, 기관총, 고속포, 관측용 풍선등의 현대장비를 모두 사용한 새로운 전쟁이었다.
이 전투에서 사용된 최신장비는 9년 뒤의 1차대전에서는 기본장비가 되었다. 봉천전투는 신기술이 많이사용되었지만 승승패를 결정지는 것은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전통적인 전략전술이었다.
러시아군은 중국 만주로 확장하기 위해 10년은 일찍 전쟁을 서둘렀고 불행히도 일본도 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러시아는 힘이 빠진 중국과 조약을 맺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2년 뒤에 랴오둥(요동) 반도임차를 강제로 얻어냈고 반도 남쪽 끝의 뤼순Arthur 항을 러시아 함대의 부동항으로 만들었다.
1900년에 중국 의화단이 외국군을 상대로 봉기를 하자, 러시아는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러시아군의 진주는 일본을 자극했고 일본은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비밀리에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는 마치 거인을 상대로 생쥐가 덤비는 꼴로 보였다. 러시아는 대규모 산업시설을 바탕으로 1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유럽강대국이었고 일본은 천연자원과 중공업 기반이 부실했고 병력도 20만 명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그 정도로 일방적인 판세는 아니었다. 일본은 예비군을 동원한다면 60만명까지 늘릴 수 있었다. 만주는 일본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의 병참선이 훨씬 짧았고 그만큼 병력을전략거점으로 빠르게 전개할 수 있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심각한 병참선 문제가 있었다. 1904년 초반, 러시아는 극동에 겨우 8만 명의 병력만 주둔시켰는데 그나마도 정규군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유럽의 병력을 극동으로 전환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우랄지역의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서 동해의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까지8,000km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였다.
(국내에도 출간된 러일전쟁사 자료를 인용하면 1904년 당시 러시아 육군의 총 병력은 113만 5천 명, 예비군과 국민군이 350만 명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앞선 모신 7.62mm 탄창식 소총과 76mm 야전속사포가 일부 도입되고 있었지만 산악포, 유탄포와 중포의 대부분은 3~40년 전의 구형모델이었고 그나마도 1개 대대가 2.52문의 포를 장비해서 프랑스의 절반(4.22문) 정도의 전력이었습니다.
군수산업은 훨씬 더 심각해서, 기관총용 실탄은 연간 150만 개 생산이 고작이었고 러일전쟁 당시 2,800만 개의 탄환이 부족했습니다. 기관총 1정당 840발의 탄환보유가 규정이었지만 400발 보유에 그쳤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장교의 충원과 수준이었습니다. 1902년 기준으로 예비군과 국민군 동원 시에 4만 명의 장교가 필요했지만 1만 3천 명만 동원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실력보다는 출신배경에 따라 결정되어 세습귀족이 50%가 넘었습니다.
일본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00년대 직전에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했고 1894~1904년 동안에만 병력이 2.5배로 늘었습니다.
극동군만 비교하면 일본군의 전력은 러시아군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1월 1일 - 일본군 58,446명 (장교 2,746명) 러시아군 32,716명 (장교 1,118명)
1904년 1월 1일 - 일본군 142,663명 (장교 8,082명) 러시아군 94,586명 (장교 3,249명)
병력은 러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러시아가 계속 증강시켰고 일본군의 무기도 러시아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일방적인 수세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늘어진 병참선, 러시아 군대에 이미 퍼지기 시작한 공산혁명, 일본의 선제기습 등도 러시아의 패전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지만 한심스러운 수준의 양쪽 지휘관 중에 그래도 일본은 공격지향적이었고 주도권을 가져가는, 덤 앤드 더머 중 덤이라는 행운을 가져갔고 러시아 야전사령관은 더머인데다가 러시아 제정조차도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패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과거의 무사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는데도, 1900년 일본주재 러시아 무관은 일본군이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이며, 선진유럽의 군사교리를 배운다고 해도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은 걸릴 것이며, 유럽 최약소국과 교전해도 일본은 버거울 것이라고 폄하하는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육군대신은 이 보고를 받고 일본군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보일 필요가 없으며 보고내용을 확신한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쿠로파트킨은 직접 극동지역을 방문하고도 상황을 매우 긍정적으로 파악했고 차르에게 극동지역과 뤼순항에 대해 안심해도 좋다는 보고를 보냈습니다.
러일전쟁의 최대 분수령이 되는 뤼순항은 결국 전쟁이 터질 때까지, 계획된 보강공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특히 5년 후에 완공될 예정이었던 육지요새 공사는 매우 부실한 상태에서 일본 제3 군의 공격을 받았고 뤼순항을 내주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됩니다. 만약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조금 더 전쟁준비를 서둘렀다면 일본 제3 군은 뤼순항에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봉천전투에 참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역사의 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겠죠.)
러일전쟁은 일본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그림자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몹시 언짢지만... 어쨌든 뤼순항함락장면입니다.
일본은 러시아가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조기에 승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04년2월 8일, 일본해군은 뤼순 항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기습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만주 두 곳과 한국에 병력을 상륙시켰고 가장 서쪽에 진출한 마레스케 노기 휘하의 제3 군은 뤼순 항 북쪽 100km 지점에 상륙했다. 3군은 뤼순 항을 점령하고 다른 2개 군과 합류해서 랴오둥의 러시아보급기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받았다.
일본은 랴오둥에서 결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노기의 뤼순 항 공략이 오래 걸려서 성사되지 않았다. 다른 2개 군이 1904년 8월 말에 이미 랴오둥에 도착했는데도 3군은 여전히 뤼순 항을 공격 중이었다.
일본군은 병력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랴오둥 반도를 공격했다. 동쪽에 자리잡은 일본 제1 군의 절반정도가 강을 건너 러시아군의 배후를 끊는 도박을 벌였고 허를 찔린 러시아군은 진지를 비우고 65km 북쪽의 봉천으로 후퇴했다.
1904년 3월 말, 니콜라스 2세는 전쟁상 알렉세이 쿠로파트킨Kuropatkin을 러시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런던타임즈의 종군기자 존 머레이는 “그는 어느 러시아 장교보다 뛰어났으며 전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러시아의 안타까운 상황을 반전시킬 사람이 있다면 쿠로파트킨일 것이다”라고 썼다.
1848년 러시아 지방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쿠로파트킨은 적극적인 성격으로 출세했다. 그는 상사의 기분을 잘 달래주었고 19세기 후반 가장 존경받던 장군인 미하일 스코벨렙Skobelev과 천운의 인연을 맺었다.
쿠로파트킨은 18살에 사관생도로 입대했고 20세에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중대장이 되었다. 1876년, 그는 스코벨렙의 참모가 되었다.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던 스웨덴인 스벤 헤딘은 스코벨렙이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파라고 기록했다. 반대로 쿠로파트킨은 전쟁을 필요악이기 때문에 운이나 돌발변수의 여지가 없도록 철저하게 검토하고준비해야 하는 과학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쿠로파트킨을 비난한 사람은 봉천전투 당시 60세였던 그가마치 무용안무를 짜는 것처럼 작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쿠로파트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스코벨렙프는 참모장으로 온 쿠로파트킨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귀관은 보조적인 역할에 적절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언젠가 지휘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때 그 직책을 사양하기 바라오. 귀관은 우유부단하기 때문이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수립한다고 해도 그것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할 것이오.)
일본군 사령부는 처음 몇 개월 동안은 도쿄에서 3개 야전군을 직접 지휘했다가 1904년 6월부터는 전역 사령관에게 만주작전을 위임하기로 했다. 한 지휘관에게 모든 위험을 맡기지 않고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두 명의 공동지휘관을 임명했다.
62세의 이와오 오야마가 총사령관, 52세의 겐타로 코다마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코다마는 독립적인 작전수행권을 보장받았다.
체격이 좋은 오야마는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는데다가 자주 화를 터트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우유부단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보수적이었지만 의지가 강했고 신뢰할 만 했다. 반대로 코다마는 작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유머감각도 있었다. 코다마는 심사숙고 후에 모든 것을 운에 맞기는 모험을 즐겼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이었지만 궁합이 잘 맞았다.
러시아군은 병력과 보급품을 늘리며 1904년 가을을 보냈다. 뤼순 항은 1905년 1월 2일에 항복했고 일본 제3 군은 봉천 외곽의 다른 2군과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3군이 도착하기 전에, 쿠로파트킨은 일본군 서쪽 끝을 선제공격하는 산데푸 전투(흑구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군은 연달아 실수를 저지르며 공격에 실패했다.
산데푸 전투는 뤼순항과 봉천(Mukden) 중간 지점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제2 만주군 지휘관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Oskar Gripenberg와 쿠로파트킨과의 불화가 심각했는데, 제2 만주군은 산데푸가 아닌 다른 곳을 점령하는 실수를 한데다가 쿠로파트킨의 대기명령을 어기고 산데푸를 다시 공격했습니다. 비교적 사기도 높았고 병력도 일본 수비군보다 많았기 때문에 공격을 퍼부어 산데푸 작전을 성공일보 직전까지 다가섰습니다.
쿠로파트킨은 명령을 따르지 않은 그리펜베르크를 해임시키고 제2 만주군을 철수시키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면서 산데푸 전투는 러시아군의 손실이 더 큰 무승부로 끝납니다. 그리펜베르크는 귀국길에 쿠로파트킨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공산혁명주의자들은 정부를 공격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산데푸 전투 당시의 러시아군 참호입니다.
2월이 되자 양쪽은 모두 심한 압박을 받았다. 러시아군은 계속되는 참패를 반전시킬 승리가 필요했고 일본군은 전쟁비용, 군수품과 인력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대승으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가 1904년 10월에 만주 앞바다를 향해 먼 여정을 떠났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군을 밀어내지 않으면 배후를 끊길 수도 있었다.
다음 동영상은 일본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과 러시아 영화 해군제독을 편집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