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 앰프계의 끝판왕 메리디언 앰프
지금은 많은 경험도 했고 금전적 여유도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탈을 하게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아기돼지 삼형제의 벽돌집(편견과 유아독존 상태)과 초가집(팔랑귀 상태)의 양 극단을 쉴새 없이 오가며 집을 부수고 다시 짓곤 했습니다. 하이파이 경력이 좀 되시는 분들은 누구는 겪는 구도의 길일 겁니다.
잡지에 종종 출연했었는데, 주공사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초가집 상태가 되면 잘 지었다고 소문난 벽돌집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주인장의 초대를 받아 성찬을 즐겼죠.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벽돌(매킨토시, 코드, 마크레빈슨, 네임 등)로 집을 지어놓은 상태라 주인장의 자존심을 긁어가며 은근히 못된 성질을 부리곤 했었는데, 폄하하던 제품의 성능에 크게 놀라고는 벽돌집을 짓지 않고 있습니다.
메리디언과 사이러스가 그 녀석들입니다. 메리디언(당시 메리디언 레퍼런스 CDP는 정평이 있었지만 제가 일부러 외면했었죠) 그리고 사이러스(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죠)를 처음 접하면서 제 벽돌집은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고가의 하이파이 제품, 특히 개당 3~40kg은 넘는 것이 보통인 거대한 몸집의 모노 블락 파워가 미덕이던 시절이라, 두 브랜드의 왜소한 크기와 볼품없는 사각형의 초라한 디자인만으로 제 편견이 옳다고 단언했던 때라 충격이 남달랐죠.
그런데… 마치 나폴레옹이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충격이라고 할까요? 아니 이선희씨를 처음 봤을 때가 더 정확하겠군요. 화장기 전혀 없는 왜소한 아가씨가 거대한 무대에 올라 내지를 때, 가슴은 전율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저 체격에 저런 성량이?’라는 의문을 영원히 가지게 만들었죠.
그렇게 메리디언과 사이러스는 제 기억에 깊은 각인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린 레코드의 재즈를 즐기는, 타의 반 해탈의 생활이라 다시는 하이엔드는 기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메리디언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되는군요.
와싸다에서 파격적인 할인으로 판매한다고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지른 메리디안 프라임 헤드폰 앰프입니다. 기존에 만족스러운 헤드폰 앰프를 사용하고 있었고 여유도 안되어서 못본 척 하려고 했었는데... 오래 전의 각인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붙어 살아나고 왓 하이파이What HiFi의 대단한 평가가 알아서 카드를 꺼내주더군요.
아마존에서 2,000달러, 그리고 우리나라 의미없는 소비자 가격이 290만원 정도인데 와싸다에서는 아마존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제 오래 전 기억과 또 다른 차원의 자아가 서슴없는 불장난을 저지르는 동안 검은 색 두 덩이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녀석들이 하도 채근을 하는 통에 2만원 내고 지하철 택배로 받았습니다.
그래도 작은 덩이라 다행입니다. 고질라급 리시버를 개봉할 때에는 제 체격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달콤하면서도 쓰디 쓴 고통의 노동이었습니다. 40kg이 넘는 코드 파워는 상자에서 꺼내는 것만 30분이 넘게 걸렸던 기억입니다.
원래 이런 사진을 안찍지만 블로그와 여러 사이트에 소개할 겸 찍어봤습니다. 국내 질소포장을 방불케하는 까고 까고 또 깐 후에 모습을 드러낸 헤드폰 앰프와 파워 서플라이입니다.
차를 새로 받아도 비닐 커버를 그 자리에서 벗기는 성격이라 앰프는 보호 비닐을 벗겼지만 파워 서플라이는 별 상관이 없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벽돌집을 모두 정리한 것이 다행입니다. 시스템 하나 바꾸려면 위치조정은 물론이고 연결과 배선정리만 몇 시간이 걸렸었죠. PC-FI로 바꾼 후에는 5분도 안되어서 노동 끝! 행복 시작! 입니다.
여유가 되는 분, 특히 메리디언의 제품을 사용하는 분이라면 파워 서플라이도 함께 구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세계 다양한 전원장치를 고려하다 보니 전원선이 좀 안타깝게 되어 있습니다. 앰프만 사용할 분은 약간 더 지출해서 AC 어댑터를 사실 것을 추천합니다.
전면 왼쪽의 1X(44/48kHZ), 2X (88/96kHZ), 4X(176/192kHZ)는 입력되는 소스의 샘플 비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볼륨 바로 옆의 ASP가 상당히 재미있는 기능을 하는데...
ASP(Analogue Spatial Processing)은 아날로그 공간처리(?) 기능을 합니다. 가장 위의 O를 선택하면 헤드폰 그대로를 즐길 수 있고 i/ii를 선택하면 방안에서 스피커를 듣는 공간감을 높여줍니다. 서라운드 효과가 아니라, 좌우 스피커에서 나오는 공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보컬이 앞뒤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재미있는 효과를 즐길 수 있습니다.
헤드폰 앰프로 스피커와 연결할 때에는 인티앰프를 사용하거나 액티브 스피커(이건 추천하지 않습니다)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기능을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사용시간이 짧아서 OFF와 i/ii간의 호불호를 선택하지 못하겠는데 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하나로 고정될 겁니다.
USB 드라이버는 메리디안 홈페이지에서 다운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오디오 앱의 재생옵션을 몇 가지 손본 후에
유이의 도쿄를 영광의 첫 번째 가수로 초빙했습니다. 아!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아닙니다.
새벽 눈내리는 길을 조심스레 걸으며 첫 사랑의 추억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신의 물방울"식 표현은 좋아하지도 않고 할 재주도 안되어서 그냥 느낀대로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 헤드폰이 이런 성능이었구나!"를 느낍니다.
그라도는 락과 재즈를 좋아하는 제 성향에도 딱 맞기 때문에 한 번도 다른 헤드폰에 밀려난 적이 없는 녀석입니다. 대단한 가격인데도 중국산 짝퉁을 방불케하는, 아니 훨씬 못한 포장과 만듦새여서 처음에는 사기당한 줄 알았었죠.
기존에 사용하던 헤드폰 앰프 제품도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저도 불만이 없이 잘 사용해왔었습니다만... "묘하게 달라졌다!"라는 느낌이 바로 옵니다.
뭐라고 할까요? 보컬과 악기가 살아난다고 할까요? 너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예전에는 그냥 듣고 흘리는 음악을 들었다면 이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저절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음악을 감상하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가격과 브랜드가 주는 플라시보 효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제가 무척 실망했던 녀석들을 꺼내보면 알 수 있죠.
남들은 칭찬하지만 저는 무척 실망했던 젠하이저 모멘텀을 꺼냈습니다. 레퍼런스 어쩌고 하는데 밀폐형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소심한 독백을 들려주어서 바로 봉인했던 제품입니다. 낭비 중의 낭비였죠.
"도대체 모멘텀을 왜 좋다고 하는거야?"에서 "모멘텀도 그럴 듯 하네"로 바뀌는 것을 보면 플라시보 효과만은 아닐 겁니다.
외신의 평가를 봐도 제 느낌과 비슷합니다. 단점에서 외국의 평가와 의견이 엇갈리는데, 외신은 공통적으로 메리디안 프라임 헤드폰 앰프의 상대적으로 부족한 디지털 입출력 옵션을 지적하지만, 저는 불필요한 추가지출을 단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아마 다들 공감하실텐데, 앰프를 바꾸게 되면 다음 바꿈질 대상은 누가 될까요? 스피커에 눈이 가기 시작하죠? "내 헤드폰이 이 정도 성능이었네?"라는 감탄은 얼마 안 있어서 "다른 헤드폰이면 어떨까"라는 벽돌집과 초가집의 갈등이 시작될 겁니다.
기존에 정착한 헤드폰이 하나 있고, 벽돌집이던 초가집이던 상관없이 주춧돌 하나는 확실하게 마련하고 싶은 경우에는 메리디안 프라임 헤드폰 앰프가 좋은 선택일 겁니다.
만약 저처럼 WOW와 같은 게임 음악을 더 많이 듣느다면 문제입니다만... 변명을 하자면 용이 날아가는 소리가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