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 먼 옛날부터 인류는 여가를 갖는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으로 나뉘었다. 사냥과 전쟁처럼 덜 노동집약적이고 덜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한 반면, 더 고되고 생산적인 농경이나 가사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지위가 낮았다. 지위가 높은 자들은 여가를 누리며 경제 활동에는 상징적으로만 참여했으며, 실질적인 경제 활동은 지위가 낮은 자들이 담당했다. 현대 사회에도 그러한 차별이 지속되어 생산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그 위에 기생하면서 자신의 부와 세를 과시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이것이 노르웨이계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사회 속의 인간을 구분한 방식으로, 유한계급은 자신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과시적 여가와 그것에서 비롯된 과시적 소비를 특징으로 한다. 본디 베블런은 책장을 전집류로 채워 넣으며 재산뿐 아니라 교양도 있음을 으스대던 신흥 졸부의 행태를 묘사했던 것인데, 그것이 어느 시대에도 적용되는 이론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결국 유한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권과 명성은 생산이 아닌 낭비적 소비 유형에 의해 결정된다. 문제는 하위 계층이 그들의 행태를 동경하고 모방하여 그 결과 시간과 노력과 재화가 낭비되는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 사회는 소비의 규모와 행태에 따라 한층 더 정교하게 계급이 구분되어 차별이 이루어진다. 더구나 재산을 형성한 과정은 도외시되고 단지 재산을 가졌다는 것만이 명예로운 것으로 부각되며,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한 재산보다는 물려받은 재산이 더 높이 평가된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생산력을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인으로 평가한 마르크스와 비교하면 베블런의 이론은 노동보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 관습에 바탕을 둔 미시적 통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선 그의 이론이 더욱 확실하게 적용되는 사례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유한계급에 의한 사회의 퇴보를 지켜보는 마음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