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당시 가장 유명한 여성 작가인 크리스틴 드 피잔Christine de Pizan (중세 유명한 궁정작가)은 잔다르크Joan of Arc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드 피잔의 Ditie de Jehanne d’Arc는 100년 전쟁의 판세를 반전시키고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의 즉위를 이끈 프랑스 지휘관에 바치는 축가였다. 그녀의 기록은 잔의 사명이 배교행위가 아니라 잔의 주장대로 신의 뜻을 받는 것이라는 당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잔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영국과 부르고뉴Burgundian에게 드 피잔은 그들이 듣기 두려워했던 질문을 던졌다.
오, 눈먼 사람들이여, 신의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모른다면 정말로 어리석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아가씨를 보내 당신들을 쓰러트렸겠는가? 감히 신을 상대로 싸우려드는가?
크리스틴 드 피잔은 이런 질문을 당당히 던져도 될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14세기 말 프랑스의 부활을 지켜보았고 1415년 이후 아르플레르Harfleur, 아쟁쿠르Agincourt, 캉Caen, 루앙Rouen 등에서 헨리 5세에게 당한 참혹한 패배도 지켜보았다.
결국 영국은 북부 프랑스의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녀는 부르고뉴 공 용맹공 장John the Fearless이 영국 왕의 파리입성을 돕고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캐서린Catherine of Valois과의 결혼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보았다.
(광인왕 샤를 6세는 정신병을 앓아서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지역을 중심으로 왕족의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세력에서 밀리게 된 부르고뉴는 영국을 불러들여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1419년 부르고뉴의 수장 장은 왕세자 샤를 7세 진영에게 살해되고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의 넓은 지역을 바탕으로 프랑스 왕을 자처합니다. 그렇지만 헨리도 1422년 마지막 원정에서 35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잔다르크의 대반격의 기회가 생깁니다.)
피잔은 장의 피살, 헨리 5세의 급사 그리고 영국군의 파리 남부진출도 지켜보았다. 잔다르크가 나타난1429년까지 영국은 프랑스의 2/3정도를 점령했고 영국-부르고뉴 동맹은 프랑스보다 훨씬 큰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군의 완승이었다. 약 6,000명의 영국군은 25,000명이 넘는 프랑스를 격파했다 (현대 역사학자 앤 커리는 7,000명 대 12,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군의 피해(절반 정도의 사상)는 막심했는데그 중에서도 핵심전력인 기사와 귀족의 피해가 치명적이었다.
프랑스는 병력보다 귀중한 의지를 잃었다. 아쟁쿠르 전투 이후에는 뚜렷한 전략도 없었다. 소심해진 프랑스군은 또 다른 참패를 피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시키지 않았고 모험도 시도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리더십, 모병, 군수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반면에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영국군은 헨리 5세의 뛰어난 리더십 덕분에 1415~1422년의 겨우 7년 동안 노르망디, 브르타뉴, 르망, 일드프랑스Il-de-France를 점령했다.
그리고 프랑스 내부분열에 힘입어 부르고뉴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그 여파로 많은 프랑스 도시가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영국과 부르고뉴에게 항복했다. 프랑스 왕정의 지원도 없는데다가 섣불리 저항하다가 받을 보복을 피하고 싶었다. 병력이 부족했던 영국은 항복한 도시에 주둔군을 남겨두지 않고 병력을 끌어 모아 프랑스군이나 위협지역에 집중시켰다.
북부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홀로 영국의 침공에 맞서 버티는 고립지역이 있었다. 몽셍미셀Mont-Saint-Michel, 투르네Tournai, 보쿨레흐Vaucouleurs와 오를레앙Orleans가 성공적으로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점령지의 프랑스인에게 영국이 무적이 아니라는 희망을 주었다.
많은 귀족과 지휘관이 영국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그 힘을 이끌어낼 지도력이 필요했다. 도팽Dauphin(왕세자)은 그런 힘을 주지 못했고 주변의 인물도 과감한 시도를 만류하고 있었다.
누구나 간절하게 바라던 도화선의 불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농촌여성이 붙였다. 잔이 붙인 불은 프랑스 지휘관들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력을 가져왔고 잔은 그렇게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잔의 전략전술은 단순했고 그런 점에서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잔은 전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지휘관처럼 뚜렷한 전략이나 전술기동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에게서 프랑스를 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었고 도팽을 설득해 프랑스군을 이끌었다(잔은 프랑스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지 않았고 야전 지휘관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만 다른 지휘관들이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동기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결정과 행동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고 믿음에 맞는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전사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진 프랑스군은 참담한 패전 이전의 사기를 되찾았다.
잔의 신념과 지도력은 오를레앙 구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성공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보쿨레흐에서 로베르 드 보드르코리Robert de Baudricourt를, 쉬농Chinon에서는 도팽과 고위 성직자를, 푸아티에Poitiers에서는 관료와 시실리 여왕(샤를의 장모)를 상대로 자신의 사명을 입증했다. 그리고 처음만나는 지휘관의 무시와 적대감을 모두 이겨내야 했다.
실제로 신이 보냈다고 해도 영국군이 포위한 오를레앙에 여린 농부 아가씨를 보낸다는 사실이 무장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잔은 그들의 자존심을 챙겨줄 정도의 여유나 인내심이 없었다. 영국군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429년 4월 29일에 있던 첫 번째 회의에서 이런 의견이 오갔다.
(당시 오를레앙 구원 총사령관이었던 장 드 뒤누아Jean de Dunois는 오를레앙의 서자Bastard of Orleans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잔을 지지하며 행동을 함께 하게 됩니다. 영국군 사령관은 탈보트가 맡고 있었습니다.)
잔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오를레앙의 서자인가요?” 그는 “그렇소. 당신의 합류를 기쁘게 생각하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당신이 여기로 와야 한다고 말했었나요? 탈보트Talbot와 영국군에게 바로 가면 안 된다고 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지역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잔은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이 더 확실하며 더 현명합니다. 당신은 나를 기만했다고 자신하겠지만 당신이 기만당한 것입니다. 어떤 구원군보다 위대한 신의 뜻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신은 오를레앙을 불쌍하게 여겨 적의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장 드 뒤누아는 면전에서 그런 모욕을 받고도 참을 리가 없었지만, 그는 실제로 영국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겨우 5,000명 밖에 안되는 영국군에게 오를레앙을 내주고 수비군을 빼낼 생각이었다.
잔은 그의 의도를 자신, 오를레앙 시민 그리고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후퇴할 이유도 없었다. 영국군은 오를레앙을 완전히 포위할 병력이 없어서 오를레앙으로 이르는 4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주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도 얼마 안되어서 잔과 프랑스 군대는 생루Saint-Loup 도로를 통과할 때에도 공격을 받지 않았고 나중에 이곳을 손쉽게 점령했다.
영국군은 루아르Loire 남쪽 강변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는데 대부분의 병력은 오를레앙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다리근처의 요새 레투렐Les Tourelles과 오구스틴Augustine 대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를레앙 수비군은 이미 다리를 끊었지만 영국군은 그곳을 봉쇄거점으로 잡았다.
프랑스군은 이 요새를 제거해야 오를레앙을 구원할 수 있었는데 오를레앙의 서자가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오구스틴 요새는 흙과 나무로 구축된 단순한 형태였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막강한 요새였다. 내부에 화약무기까지 있다면 어떤 군대도 막아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지휘관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요새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운 거리의 레투렐의 병력이 오구스틴을 즉시 지원할 수 있었고 유명한 존 패스토프John Fastolf가 이끄는 영국군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잔은 당연히 후퇴계획에 크게 반발했다. 오를레앙의 서자가 잔을 작전회의에서 배제시키자 그녀는 다시 반발하며 위협했다. 잔의 시종 장 돌롱Jean d’Aul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서자여, 서자여. 패스토프의 접근을 듣는 즉시 내게 알릴 것을 신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만약 알리지 않으면 맹세코 네 머리를 잘라낼 것이다.”
서자는 그녀에게 반드시 알리겠다고 대답했다.
잔은 이렇게 입지를 굳힌 후에 영국 지원군이 오기 전에 오를레앙을 구원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작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오구스틴 요새공격을 이끌겠다는 것이고 다른 지휘관도 동의했다. 작전이 성공하면 자신도 승리의 주역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잔에게 돌리면 되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잔의 계획은 무모했다. 잘 무장된 영국군이 강력한 진지 안에 틀어박혀 있는데 정면공격은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잔은 신이 함께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고 프랑스 병사도 잔의 충성심과 신앙심을 믿었다. 그리고 신의 가호로 전사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죽더라도 구원을 받는다고 굳게 믿었다.
1429년 5월 7일, 많은 병사가 그런 구원을 받았다. 아쟁쿠르 이후 가장 격렬한 오를레앙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
7일 토요일 아침 일찍, 프랑스군이 레토렐과 오구스틴을 공격했고 영국군은 요새를 보강하려고 애썼다.대단한 공격이 있었고 공격과 수비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영국군은 강력한 병사를 많이 보유했고 방어기술도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여러 곳에 사다리를 걸치고 요새 가장 높은 곳에서 공격을 했지만 영국군은 많은 곳에서 격퇴를 하고 대포와 개인병기를 동원해 반격했다. 그들은 많은 프랑스 병사를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잔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이끌었다. “신의 이름으로” 병사들이 물러서지 않게 응원했고 영국군은 조금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설득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으로 향하는 큰길에 깃발을 꽂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고함소리로 호응하며 다시 요새로 달려들었다.
레토렐은 곧 무너졌고 영국군은 달아났다. 잔은 오를레앙의 숙녀Maid of Oreleans라는 칭송과 함께 도시에 들어섰다. 그녀를 의심했던 병사들도 이제는 그녀를 따랐다.
영국군이 장악한 루아르 계곡의 도시도 연이어 탈환했다. 패스토프가 병력과 화기로 쟈흐고Jargeau를 보강하려고 했지만 6월 12일에 함락되었다. 영국군이 수비를 강화한 보정시Beaugency 성도 프랑스군의 맹렬한 포격에 항복했다.
15세기 수도승 장 카르티에는 “영국군의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날 밤, 영국군은 멍 슈흐 르와르Meung-sur-Loire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다.
영국군 지휘관은 이런 패배가 처음이었고 탈보트와 패스토프는 전세를 반전시키기로 했다. 1429년 6월18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파테Patay 외곽에서 모처럼 대회전을 벌였고 프랑스군이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뒀다. 탈보트를 포로로 잡았고 패스토프는 간신히 빠져나가 파리로 달아났다.
잔도 이 전투에 참전했지만 그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잔다르크는 한 달도 안되어서 오를레앙을 구원하고 쟈흐고, 보정시, 멍 슈흐 르와르를 탈환하고 파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달 후인 1429년 7월 17일, 도팽이 라임스Reims에서 샤를 7세로 즉위할 때에도 그 곁을 지켰다.
라임스로 열린 길의 모든 도시가 오를레앙의 숙녀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렇지만 파리는 여전히 영국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잔은 이전보다 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영국-부르고뉴 연합의 중심인 프랑스의 수도는 오를레앙과 비교도 안되는 요새였다.
잔은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녀는 영-부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스스로 물러가게 만들었고 곧바로 생 드니Saint-Denis를 공격해 탈환했다. 이곳은 프랑스 왕의 무덤이 있는 요충지였다. 프랑스군은 이 승리로 국토회복은 신이 인증하신 사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잔의 군대가 9월 8일에 파리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시 한 기록을 보면 “공격은 어려웠고 오래 걸렸다. 성벽에서 쏘아대는 대포와 소화기의 굉음과 강도가 경악할 정도였지만 잔이 있었기에 그리고 신의 은총으로 어떤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많은 프랑스군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잔도 석궁을 맞고 허벅지 부상을 입었다.
(일부 출판물에서는 당시의 대포가 마치 전장의 승패를 가를 정도의 혁신적인 무기로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적에게 공포를 주는 효과가 고작인 안전성과 화력이었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정리해두었던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30년 후에 오스만 제국의 초대형 대포가 제작되면서 대형화기가 성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고 잔다르크 당시의 서유럽은 아직 원시적인 상태였습니다.)
파리 탈환실패는 잔의 책임이 아니었고 기록에도 파리는 강력한 요새도시인데다가 적의 태세가 너무 강력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지만 샤를 7세의 궁정 분위기는 달랐다. 잔은 실패했고 그렇지 않아도 영국의 반격과 잔의 활약에 불안해하던 궁정은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많은 프랑스 지휘관이 항의를 했는데도, 샤를은 라 트헤말르La Tremoille과 샤르트르Chartres의 지나친 의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부르고뉴와의 직접적인 분쟁을 피하기 위해 속도조절을 조언했다. 심지어 잔이 탈환한 도시 중 일부를 영국에게 반환하자는 소리까지 했다.
그들은 샤를을 설득해서 친왕군을 해산하고 부상에서 회복한 잔을 남부 루아르 강 일대의 용병을 상대하는 하찮은 작전에 투입했다.
잔은 왕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생 피에르 르 무티에Saint-Pierre-le-Moutier를 탈환했다. 그렇지만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요새도시 공략은 실패했다.
왕의 장모를 포함한 궁정의 우호세력이 간청한 끝에, 잔은 이듬해 봄부터 보다 위급한 전장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곳곳에서 영국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전과 같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잔과 프랑스군은 승전이라고 주장했지만 영국군을 해당지역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잔의 집요한 공격덕분에 벨포드 공(영국군 총사령관)과 부르고뉴 공의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
1430년 4월, 영국의 재촉을 받은 부르고뉴군은 프랑스의 콩피에뉴Compiegne를 공격했고 잔은 급히 구원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잔은 여전히 인내심이나 방어전술을 몰랐다. 그녀는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맞아 출격했다. 1430년 5월23일, 도시를 벗어나 적을 요격하던 잔은 본대와 떨어져 나왔다가 그만 포로가 되었다. 부르고뉴군은 잔을 영국에게 팔아 넘겼는데, 일부 역사학자는 콩피에뉴 수비대장 기욤 드 플라뷔Guillaume de Flavy가 잔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재판심문에서는 잔의 실수로 기록되어 있다.
잔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의 시장에서 이교도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다.
잔이 처형당한 후에도 프랑스 지휘관은 그녀의 전술을 그대로 따랐다. 그녀의 유일한 전술인 정면공격은 큰 피해가 수반되었지만 백년전쟁에서만큼은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그리고 지휘관부터 일반 병사까지, 국토수복의 전투에서 전사하면 성년 잔다르크의 뒤를 따라 천국으로 간다고 믿었다.
잔다르크의 헌신덕분에 백년전쟁이 종식되고 영국이 프랑스 대부분 지역에서 철수했다면 아름다운 엔딩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은 그녀의 죽음 이후 23년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잔이 전쟁을 끝낸 것도 아닌데 6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전설을 되새기는 것일까? 적의 한복판에서 재판을 받고 불타 죽었기 때문일까? 정말로 신이 보냈다고 믿기 때문일까?
잔은 결정적인 순간에, 신념에 따라 조국을 구하고 역사를 바꿨다.
학벌이나 배경이 전혀 없는 프랑스 농촌, 경력이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16살, 전장에서 체격과 체력을 누른 여성, 사욕과 명예보상 대가가 없는 일방적인 헌신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 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녀는 프랑스를 구하고 성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무대를 불문하고 참 지도자의 덕목을 보여주었기에 앞으로도 600년 동안은 그 이름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잔다르크의 영화 중 아마도 가장 혼란스러우면서 격렬했던 1999년작 The Messenger입니다.
여주인공의 투박한 이미지도 좋았고 오를레앙 전투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평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혼란스럽습니다만.
잔이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오를레앙 탈환과 왕의 즉위까지였다고 하더군요. 거기까지는 성취된 게 사실이고, 그 이후의 잔의 참전은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살아서 정치에 이용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하는 유관순은 해방전까지는 국민 사이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북한의 김일성에 비해 항일 업적이 신통치 않았던 이승만이 집권 친일세력과 함께 발굴한 항일업적의 주인공이 유관순이었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본인의 권위에 금박을 입힌 것이지요. 물론 그녀의 독립운동의 업적과 정신은 진실로 위대하고 추앙하여 마땅하기는 합니다만, 교과서에서 누락되었다고 해서 좌파가 독립정신을 훼손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과장된 일입니다. 그녀는 혁혁한 독립투사입니다만 잔다르크와는 달리 죽은 후에 정치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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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esgi
2014-11-07 22:58:26
역사는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불완전한 사료를 다양한 시각으로 꿰맞추다보니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상세한,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적당힌 각색된 역사가 많습니다.
그러니만큼 제가 정리한 자료도 당연히 하나의 시각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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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동윤
2014-11-08 10:07:32
오세영님 귀한 글에 이의를 단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님의 전쟁사에 대해서 흥미진진하게 읽고 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의 취지는 전쟁사와는 무관하게 개인 차원에서 볼 때에 정치인이란 자들이 역사적 개인, 특히 일반 평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하고 희생시키는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유관순은 죽은 후에, 잔다르크는 심지어 아직 살았을 때에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던 것이지요.
글을 쓰다 보니 잔다르크가 왕의 즉위 후에 전쟁참여를 그만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 본인은 물론 화형당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녀의 성녀 이미지를 퇴색시키기 위해 세속화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또 백년전쟁을 다룬 역사에서 그녀의 이름은 지워졌거나 아니면 작은 일화 정도로 축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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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esgi
2014-11-08 14:11:55
고동윤님의 의견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역사이야기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러 의견을 환영한다는 뜻이었는데 설명이 부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