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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아편전쟁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4-10-28 21:25:02
추천수 52
조회수   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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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세영 [가입일자 : ]

제목

2차 아편전쟁
내용
 

국가가 어려움을 겪을 때면 늘 주화파(비둘기파)와 주전파(매파)가 의견충돌을 벌이고 어느 쪽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 1차 아편전쟁에서 청제국의 운명은 결정되었지만, 아직 청제국 내에는 주전파가 상당한 힘을 얻고 있었고 이들은 나름대로의 우국충절로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2차 아편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2차 아편전쟁  



 

애로우Arrow 호 전쟁이라고 부르는 2차 아편전쟁은 애로우가 1856 10월 광저우 주강에 정박하면서 시작되었다애로우는 홍콩에 사는 중국인 상인의 소유였지만 영국인 함장이 지휘하고 영국기가 달려 있었다.

중국 관리와 병사가 배에 올라 12명의 중국인 선원을 해적출신이라는 혐의로 체포했다.  





광저우 주재 영국영사는 석방과 사과를 요구했다. 광저우 최고위 중국관리는 모두 석방하는 대신에 두 명은 처벌해야 하니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사과는 하지 않았다. 홍콩총독은 마이클 세이무어 제독에게 광저우를 공격해서 버릇을 고쳐 놓으라고 명령했다.




아편전쟁 당시 연합군이 상륙하던 광저우 항구 풍경입니다. 

 

 

 

영국군은 주강 요새를 하나씩 점령해 나갔고 10월 27일에는 광저우 성벽에 구멍을 내고 관리숙소까지 진입했지만 광저우 총독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세이무어는 광저우를 점령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요새점령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시내에서는 시민들이 외국인 거주지구를 약탈했고 승객으로 가장한 병사가 광저우와 홍콩을 오가는 증기선 시슬에 난입해서 모든 외국인을 죽였다. 그렇지만 연말까지 본격적인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듬해 영국정부는 제임스 브루스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애로우 전쟁을 마무리 짓게 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이징 황실과 직접 조약을 체결하고 배상을 받자며 연합군을 제안하고 쟝 밥티스트 루이 후작을 프랑스측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이 홍콩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59 연대만 있었기 때문에 증원병력을 기다리기로 했다. 10월, 1,500명의 해병이 도착하면서 영국군 2,000명과 프랑스군 1,000명이 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광저우에 도착한 브루스는 청군에게 항복을 제안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두 번째 통첩도 무시당하자 12월 28일 새벽에 전함이 포격을 시작했다. 1시간의 포격 후에 병력이 상륙했고 24시간도 안되어서 성벽이 무너지고 광저우 북부는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연합군의 피해는 겨우 15명 전사, 113명 부상이 전부였다.

광저우 총독 예밍천(葉名琛)은 포로가 되어 인도로 끌려갔다가 1년 후에 병사했다(그림참조). 함대는 홍콩으로 갔다가 샹하이로 향했다.



 

 

 

샹하이에 도착한 연합군은 문제(9대 황제)에게 샹하이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광저우로 돌아가 예밍천의 후임과 협상하라고 대답했다.

 

연합군은 함대를 하이강(또는 바이강) 하구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황제는 두 명의 대리인을 보냈지만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브루스는 다시 하이강 요새를 공격했다. 해병과 육군은 간단하게 요새를 점령했다.

함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텐진을 손쉽게 점령했다. 황제는 두 명의 황족을 보내 서양 야만인과 협상을벌였다.



 

 

1858년 6월 26일,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베이징에도 외교관이 머물 수 있게 되었고 청제국에서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은 자국에 송환되어 자국법의 판단을 받게 되었다. 선교사를 포함한 모든 외국인은자유롭게 청제국 전역을 여행할 수 있고 11개의 새 항구를 개방해서 모두 16개의 항구를 교역에 이용할수 있었다. 중국은 130만 파운드를 영국에게, 66만 6천 파운드를 프랑스에게 원정비용으로 배상해야 했다. 


브루스와 루이는 1859년 3월에 귀국했고 후임으로 프레데릭 브루스(형제)와 알퐁스 드 부르불롱Bourboulon이 부임했다. 두 사람은 홍콩에서 1척의 영국 전함, 3척의 프리깃함과 14척의 전투함을 이끌고 베이징의 황제를 만나러 가던 중에 청군이 하이강 하구를 대나무, 철꼬챙이와 사슬로 막아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5만 명의 청군이 그들의 베이징 접근을 막으려고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6월 25일 이른 아침, 배가 통과하기 충분할 정도로 장애물을 제거한 후에 병력이 상륙했고 주변 요새에서는 대포로 대응했다.



중국의 지명이 생소하기 때문에 다시 지도를 인용합니다. 

 

강변은 깊은 진흙밭이라 상륙부대는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함대도 포격에 큰 피해를입었는데 한 전투함은 40명 중 31명의 선원을 잃었다. 함대 사령관도 중상을 입었다가 부근에 있던 미국선박의 구조를 받았다.

미국인 함장 조시아 태트널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 백인이 내 눈 앞에서 저렇게 죽어가는데 그냥 보고만있을 수 없다”라며 미국의 중립정책을 어기고 배를 대고 부상자를 구출했다.




중국의 목판화입니다. 아무래도 서양의 시각과는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는 청군이 마치 야만족 집단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패배했다. 4척의 전투함을 잃고 상륙했던 1,100명의 해병 중 절반이상이 사상당했다. 숫자가 얼마 안되었던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패전소식이 런던과 파리로 전해지자 브루스와 루이가 다시 투입되었다. 브루스는 텐진조약의 엄격한 실행, 하이강 사태에 대한 사과, 모든 원정비용 배상, 홍콩 건너의 주룽(구룡)반도 할양을 받아내라는 본국의 지시를 가지고 도착했다.

 

홍콩에는 영프 전함과 수송선 230척이 집결했다. 프랑스군은 6,000명, 영국군은 1개 기병여단과 포병부대를 포함한 10,000명이 투입되었다. 영국군 지휘관은 1839년 1차 아편전쟁에서 기병을 지휘했던 제임스 호프 그랜트 소령이었는데 “돌격” 외에는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1860년 4월, 연합군은 저우산을 점령하고 하이강 요새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영국군 1개 여단과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상륙했다. 이 지역도 깊은 진흙뻘이어서 부츠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걸어야 했고마른 땅 위에 올라왔을 때에는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상륙부대는 밤새 휴식을 취한 후에 페이뎬 요새로 향했다. 그렇지만 이미 요새는 비워진 상태였고 나머지병력도 전투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하이강 요새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비가 계속 내려 대포와 마차는 진흙뻘에 주저 앉았다. 요새에 도착하자 마자 프랑스군이 영국 대포의 지원을 받아 청군의 참호를 모두 점령하고 몇 km를 더 전진했다.

이튿날 프랑스군은 요새에서 3km 떨어진 청군 진지를 점령했고 영국군은 측면에서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선회했다. 대규모 몽골 기병이 돌격해왔지만 용기병 근위병과 시크 창기병이 반격해서 쫓았다.



 

영국군은 북쪽 2개 요새를, 프랑스군은 남쪽 요새로 접근했고 그랜트는 2개 중 동쪽 요새를 점령해서 나머지 2개도 자신의 손에 넣고 싶어 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압도적인 판세에 반대했지만 그랜트는 반대를 무시하고 대포와 로켓으로 북쪽 요새를 두들겼고 30분도 안되어서 요새의 대포는 더 이상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랜트는 44와 67연대에게 공격을 명령했고 두 부대는 맹렬한 사격을 받아가며 대포가 구멍 낸 성벽 안으로 진입했다. 전투 3시간 30분 만에 67연대가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연대기를 세웠다. 더 많은 병력이안으로 진입하자 청군은 항복했다.





 

 


함락당한 요새의 모습입니다. 

 

그랜트는 다시 나머지 요새를 공격해서 바로 점령했다. 동맹군은 17명 사망, 영국군 184명과 프랑스군141명 부상의 피해만 입었다. 청군 사령관은 도망쳤고 지방 총독이 하이강과 텐진 사이의 모든 지역의 항복을 약속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브루스는 베이징에서 온 사절을 만났지만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을 알고는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하겠다고 경고했다. 황제는 다시 조카 이를 보내 연합군 대표의 베이징 입성을 안내했다.

그렇지만 대표단은 함정에 빠졌고 달아나다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호위를 하던 몇 명의 용기병과 시크 기병만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돌아왔다.

 

청군의 전력을 알 수 없었던 그랜트는 증원군을 기다렸다가 2만 명 정도의 청군을 격파하고 양량운하의 2개 다리를 점령했다. 청군은 포로로 잡았던 연합군 대표단 중 2사람을 성벽 위에서 처형했다.

그랜트는 모든 병력이 모이자 10월 5일, 베이징으로 향했다. 수도에 가까워지자 포로가 풀려나고 있다는보고가 들어왔고 일단 행군을 멈췄다.

그렇지만 포로가 되었던 대표단과 호위병 중에 20명은 이미 고문이나 처형으로 죽은 상태였다. 그 중에는존 모예스 일병도 있었는데 그는 청군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다가 머리가 잘려 죽었다.

 

그랜트는 단독으로 베이징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프랑스군은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황제의 여름궁전을 약탈하러 갔는데 그곳을 지키던 20명의 무장근위병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버티다가 죽었다.



 


그랜트는 10월 12일 정오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포격을 시작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성벽을 향해 포신을 정렬하고 시계만 쳐다보던 오전 11시 55분, 몽골 병사가 성문을 열었고 베이징이 항복했다.

황제는 몽골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이듬해에 죽었다. 황제의 동생인 공충친왕이 브루스를 맞이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11월 1일에 남쪽으로 내려갔다. 브루스는 출발하기 전에 황제의 여름궁전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여름궁전은 200개의 건물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주택 등)이12km에 걸쳐 잔디밭, 정원, 호수와 어우러진 문화재의 보고였다. 브루스는 청제국의 저항에 대한 보복겸후임황제에 대한 경고의 표시로 10월 18일에 불을 질렀다.




파괴된 여름궁전인데 의외로 서양식 건물입니다. 

 

10월 24일, 브루스는 공충친왕을 만났는데 500명의 근위병이 ‘여왕폐하 만세’라는 천을 들고 있었다. 공충친왕이 베이징조약에 서명했고 이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사과를 했다.

영국은 이제 베이징 주재를 보장받았고 텐진조약의 실행에 따라 주룽 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리고 텐진도개항하고 베이징 원정비용도 배상받았다.

프랑스군도 나름대로의 협상안을 받아냈다. 어떤 황제도 외국인의 절 인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2차 아편전쟁 당시는 아니고 의화단 운동시절인 1898년의 신문 풍자화입니다. 중국의 분할을 풍주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신문이기 때문에 프랑스는 아리따운 여성으로 슬며시 뒤로 빠져서 염려하는 분위기입니다. 

 

아편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아편은 영-청 조약 중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샹하이에서 벌어진 후속협상에서 아편은 일반용품과 함께 수출입관세를 물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브루스는 인도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863년 11월에 사망했다. 영-프 연합군은 중국본토를 떠났다가1900년 의화단 운동 때에 다시 돌아왔다. 의화단 운동은 아편전쟁에서 당한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산둥성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혹시나 싶어서 2장의 그림을 덧붙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관련 동영상은 3편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당시 청제국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던 이연걸 주연의 명장입니다. 

전투신이 많이 잔인한데, 화승총과 대포를 사용하는 군대가 정부군이 아니라 지방군벌세력으로 기억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릴 때에 "북경에서의 55일"을 보며 점령군을 응원했었는데 실제로는 음악 외에는 건질 것이 없는 엉터리 영화였죠. 의화단 운동의 1900년도 베이징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제작한 아편전쟁 전편입니다. 신파조이기는 한데, 볼만한 내용입니다. 영어자막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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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s253@naver.com 2014-10-28 22:18:06
답글

아주 흥미있게 잘봤습니다...
눈에 쏙쏙 들어오네요,
영국을 왜 신사의나라 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마약이나 팔아 쳐먹으면서...

uesgi 2014-10-29 12:31:28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인간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각하면 아편정도는 봐줄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이 중남미를 정복한 후에 죽어간 원주민들, 영국이 미국에 들어선 후에 죽어간 원주민들 숫자는 몇 백만 명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런 역사를 거쳐 민족자결주의가 발아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에 지금은 신제국주의를 숨긴 신자유주의로, 한국재벌기업들이 내국인에게 군림하고 있죠.

김동하 2014-10-29 16:25:50
답글

잘 읽어보았습니다.1차 아편전쟁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백프로는 아니지만 대략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uesgi 2014-10-29 23:42:35

    당시 중국의 사정을 보려면 중국 내정도 설명이 필요하죠.

yhs253@naver.com 2014-10-29 19:57:08
답글

중국을 보는 다른나라들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
우리나라에서는 돈만 아는 짱께라고 비하하지만 ,,,중국인들은 한번 마음을 열면 죽을때까지 같이 간다는 그런얘기를 들은거 같은데 말입니다...
중국인들의 속성 그런게 궁금해 지네요,,,,

uesgi 2014-10-29 23:44:16

    예전에는 우리만큼이나 시선이 안좋았는데 지금은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중국인에 대해서는 몇 차례 이야기해본 것이 전부여서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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