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해제를 쓴 책이 나왔는데 책 소개 글이 신문에 실렸길래 옮깁니다.
"'기억'과 역사는 끊임없이 멀어져간다. 할리우드 영화들 덕분에 미국이 베를린을 점령했다고 믿을 날도 멀지 않았다."('르몽드 20세기사' 서문 '자신만을 위한 역사' 중)
1943년 7~8월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동부전선에 최정예부대를 배치한 독일군을 소련군이 대파한 이 전투 덕분에 연합국은 서부전선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1944년 가을, 한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이 막 해방을 맞은 파리 시민들을 대상으로 '어떤 국가가 승전에 가장 많이 기여했는가'를 물었을 때 응답자의 61%가 소련, 29%가 미국이라 답했지만 60년 뒤 같은 기관에서 동일한 조사를 했을 때는 응답자의 58%가 미국, 20%가 소련이라고 답했다.
기억은 결국 승리한 자, 권력을 쥔 세력이 차지한다는 것. 역사는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성찰하게 하는 에피소드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는 언론관으로 유명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LE MONDE)'의 자매지이자 국제관계 전문 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이번에는 20세기, 과거로 시선을 돌렸다.
책 '르몽드 20세기사'는 기억과 역사가 괴리돼 온 지난 100년의 세계사를 돌아보고 그 괴리에 권력이 자리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20세기에서 벗어난 지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 100년의 역사는 오늘날 지구촌이 앓고 있는 문제점들의 맹아를 모두 담고 있기에 20세기를 돌아보며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이 책은 특정 사실들을 복원하고 잊힌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 재구성된 기억과의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책은 지난 20세기를 네 시기로 구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부터 1929년 대공황까지를 다룬 '광기의 시대',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45년까지를 다룬 '암흑의 시대', 1950년대 냉전과 제3세계 국가들의 해방을 다룬 '적색의 시대', 영국 광부들의 파업과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아시아에서의 금융 위기까지를 다룬 '회색의 시대'다.
각 시대별 주요한 기억의 재구성 뿐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를 다시금 불러 냈다. 20세기에 관한 텍스트 뿐 아니라 이를 수치화하고 도표화한 데이터들도 가득하다.
책에서는 한국 독자를 고려해 각 부마다 해제를 싣고 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교수가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한 해제를 통해 각 시대별 특징과 문제의식을 깊이 있게 해석하는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려운 역사 사건은 부록 '용어 해설'을 통해 독자의 심층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기억과의 전쟁'에 전면으로 나선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지난 20세기 역사가 어느 정도까지 도구화되고 지배자의 선전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지, 망각을 조작하고 새로운 지배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