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마투라나는 ‘인지생물학’이라는 분야를 확립시킨 칠레의 생물학자다. 쉽게 단순화시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새로운 영역의 출발점에는 ‘구성주의’라는 원리가 깔려 있다. 모든 생명은 세상을 인지하는 자신의 능력에 맞춰 세상을 구성한 뒤 그 틀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박쥐는 초음파로 세상을 본다. 한 세상에 살고 있어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구성하기에 그 둘은 각기 다른 세계에 산다.
이것은 모든 세계관이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치달을 수도 있는 원리이긴 하나, 마투라나는 여기에서 개인적 차원의 생존이 사회적 차원의 공존으로 이어진다는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생물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의미 깊은 통찰력을 제시한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모든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 세계, 즉 자신만의 ‘섬’에 갇혀 서로 간에 폐쇄적이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마투라나는 ‘관용’보다 ‘존중’이라고 답한다. 자신의 세계만을 옳다고 고집하면서 다른 세계에 베푸는 식의 ‘관용’보다는 상대방의 세계와 그 환경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획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렇게 세계는 함께 구성해가는 공간이 된다.
이 세계란 우리가 함께 구성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더 이상 우리는 모를 때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우리의 방식으로 구성‘함’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함께 얽혀 이 세상을 만들어가며, 그 ‘앎’은 또다시 ‘함’으로 연결된다. 이 행위와 경험의 순환 구조에서 이 세상을 선하게 구성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김부선을 응원한다. ‘앎’을 올바른 ‘함’으로 옮긴 김부선이 그것을 오도하고 왜곡시킨 매체에 비해 훨씬 윤리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