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부터 이청준 선생님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교원대에 와서 문학평론하는 권오룡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날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다음날 이청준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었죠.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청준 깊이 읽기"라는 책을 내는데 그 책의 총편집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청준 선생님의 광팬인줄 아느냐고 거의 떼를 쓰다싶이 하며 그 인터뷰 자리에 나도 가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처음엔 농담으로 받다가 제 진정성(?)을 알아챈 권선생이 허락하여 다음날 올림픽아파트 근처의 찻집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 자리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이윽고 인터뷰가 끝나고 술을 곁들인 저녁자리가 만들어졌는데, 그때부터 제가 조금씩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들 하나하나마다 제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말씀을 드렸죠. 심지어 신문에 발표했던 꽁트까지... 점차 대화의 주체가 선생님과 저로 바뀌었고, 2차에 가서도 대취하도록 마셨는데, 자리를 파한 뒤에도 선생님께서 제 손을 잡고 당신의 집으로 가서 한잔 더 하자시며...
그때 발렌타인 17년짜리 새병을 따서 물컵에 콸콸 소리가 나도록 따르시며 "조선생 드셔..."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선생님 댁에서 나와 고교 동창인 권선생의 집으로 가서 하루밤을 의탁했습니다. 다음날 권선생이 부러움을 토로하더군요. 지는 같이 문학하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만났는데도, 이선생님 댁엔 어제 처음 가본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그런 연유로 "이청준 깊이 읽기"에 제 팬레터와 비슷한 "그 참담했던 시절의 한 줄기 빛"이 실렸던 것이죠. 오래 전에 그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거기에 그런 사연이 담겨있었습니다. 이후 이청준 선생님께서 그 책에 글을 기고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저녁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거기에 갔었죠. 모두가 문학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는데, 저만 다른 분야에 있었죠. 2차로 맥주를 마시러간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제 옆에 다가와 말씀하시더군요. "옛날에도 조선생 같은 독자가 있었던 것을 알았더라면 더 치열하게 글을 썼을 텐데..." 저로서도 황공한 말씀이었죠.
그렇게 몇 차례 더 뵈었습니다. 그리고 투병생활을 하실 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초라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뜻이 커서 그랬겠지만, 그때 뵙지 못한 것이 종내 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책 읽는 경향"이라는 꼭지를 신문 1면에 계속하여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도 기회가 와서 저는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에 대해 쓰면서 "꼭 건강을 되찾게 되시길 바란다"고 마무리를 했는데, 그 꼭지가 실리기로 예정된 날 하루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마무리를 "극락왕생하소서"로 바꿨었죠.
그때 선생님을 뵙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번 답사지 중에 장흥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선생님과의 인연을 얘기했더니 답사예정지 중 한 곳을 포기하고 선생님의 생가과 문학비가 있는 묘소를 찾기로 모두가 동의해주었습니다. 고마울 뿐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한을 하나는 푼 뜻깊은 답사였습니다. 선생님 첫 작품집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열림원에서 새로 내며 그 책과 관련된 출판업계분들과 선생님의 글을 모은 책도 함께 냈었습니다. 거기에 "그 참담했던.." 그 글이 관련자가 아닌 사람의 글로는 유일하게 실리는 영광까지 누려봤습니다. 아직도 추모의 념과 감흥이 사라지지 않아 여독을 조금 풀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