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 이면에 존재하던 사회적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조명한 소설가다. 아이들을 키우며 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다 되어 첫 소설을 산출한 그를 단지 불리한 여건에서 글을 썼기에 주목받는 아마추어 정도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메리 바튼>이 나온 뒤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그의 문재를 인정하여 13년간 자신이 주관하던 문예지에 연재 지면을 할애한 사실로 보건대 그런 시각은 편견에 의한 폄하임을 알 수 있다. <남과 북>은 그 잡지 연재의 산물로 디킨스가 제목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개스켈은 산업혁명 시대의 실상을 찾으려는 역사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디킨스나 칼라일보다 극빈층의 삶에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삶의 이야기’라는 <메리 바튼>의 부제는 새로운 산업화를 상징하던 도시 맨체스터에서 펼쳐지는 계급 간의 시각의 차이를 암시한다. 개스켈은 상층부의 안락함이나 하층부의 비참함을 과장하지 않는다. 어느 측으로도 기울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그려냈을 뿐이다.
주인공 메리의 아버지 존 바튼이 노동계급의 굴욕과 고독에 대해 늘어놓는 장광설은 경청할 만하다. “일할수록 우리는 그들의 노예지. 이마의 땀으로 우리가 그들의 재산을 쌓아놓잖아. 그러면서 우리는 디베스와 라자로처럼 건널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니까. 그렇지만 나중엔 우리 운명이 더 낫지.” ‘지금 그들이 좋은 것을 모두 가졌지만 내세엔 그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줄곧 해대는 존에게 화자로서 개스켈은 신랄한 목청을 높인다. “아직도 디베스와 라자로의 우화라니!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처럼 이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개스켈이 파악한 모든 사회악은 구성원 서로에 대한 무관심,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지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당연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