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法頂) 스님이 쓰던 낡은 나무 의자가
한동안 우리 삶에 잔잔한 화두(話頭)를 던진 바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법정의 無소유라 한다.
비움과 채움을 이야기 하기 전에
無소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왕 나온 말이니
법정 스님에게 평소 따져 묻고 싶었던
선문답 같은 횡수(橫手)를 하나 늘어놓고 가자.
까까 중의 무소유와 머리털 긴 내 무소유가 같은 無소유요?
가질 필요가 없는 자의 무소유와
가져야 할 자의 무소유가 어찌 같은 無소유가 될 수가 있겠는가?
어디 대답을 좀 해 보시구려!
세속의 無소유가 얼마나 큰 고행(苦行)이란 걸 잊으신 게군요! 허, 참!
세속의 번뇌를 거두어 씻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일진대
절간 뜨락에 묻어 놓을 번뇌를 세속에 던지고 가신 연유가 무엇이오이까?
스님! 이 화두에 무효를 선언하시고 거두어 가심은 어떨는지요?
요즈음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정보 창고가 있다.
한 번의 검색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비움과 채움"이 있다.
그림, 조각, 詩, 책, 건축,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미학이니, 수행이니, 철학이니 다양하게 표현들을 하고 있다.
그것들을 다 섭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체로 공통된 내용은 비우라는 것이다.
책 한 권 속을 시종일관(始終一貫) 비우라고 강요하는 책도 있다.
그 책들을 읽었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
어느 날, 그 비움에 어떤 저항적 기류가 내 몸속에서 일면서
나도 "비움"이라는 화두를 내다 걸었다.
잠을 자다가 신통력에 이끌려 벌떡 일어나 쓴 글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거듭해 왔다.
이 몇 줄의 "비움"에 관한 글을 완성하면서
나는 낄낄거리며 소리 내서 웃고 또 웃었다.
세상의 비움에 맞서는 비움을 얻었다기 보다
숨어 있던 내 비움을 찾았다는 비명이다.
비움과 채움은 저울과 같은가 하면 또 다른 관계에 있다.
어느 한쪽을 비우거나 채우게 되면 다른 쪽의 욕망을 부르게 되어있다.
비움과 채움은 조화로운 어울림의 다스림이다.
이것이 내가 비움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다스림의 시작이다.
비움도, 채움도 없는 사색(思索),
이 또한 사색을 위한 좋은 다스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