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보통 탱고를 꼽는다. 정열적이고 세련되며 장중한 이 매혹적 춤곡은 이제 세계인의 음악이 되었다. 본디 떠나온 고향에 대한 유럽 출신 백인 이민들의 향수를 담고 있기에 탱고는 세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기모노 입은 탱고’와 ‘서울 야곡’이 있는 걸 보면 이제 탱고는 모든 이들의 음악이 되어 국적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초원이 펼쳐진 팜파스도 있다. 그 드넓은 평원에서 말 달리던 목동 가우초도 음에 대한 내면의 욕구를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로 발전시켰다. 원주민 인디오나 혼혈 메스티소가 가우초의 대다수를 이루었기에 그들의 음악은 소외 계층의 정서를 반영한다. 더구나 인종의 차이는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기에 그 음악은 민중의 한을 표현한다.
아타우알파 유팡키는 그 음악을 대표하는 음유시인이다. ‘아타우알파’와 ‘유팡키’는 잉카 제국 왕들에서 따온 예명으로, 이름에서부터 그는 유럽과 절연된 그 산하 고유의 민속 음악을 만들고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어떤 틀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다. 그에게 음유시인은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사람이다. 그는 소리가 되지 못하는 민중의 절망과 아픔, 바람이 들려주는 시를 노래로 전한다. 그의 노래는 철학이요, 역사이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되지/ 동향인이여, 우리 대지의 역사가/ 책에서, 일부는 지워지면서/ 평원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소통의 단절로 고통스런 이 땅에도 그의 말은 유효하다. “쫓기는 음유시인은 내가 아니라 아르헨티나 국민이다. 민중은 평화롭게 자길 원한다.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나무처럼 나이 들고 싶다. 쫓기는 음유시인은 나 하나가 아니라 수천명이나 된다. 음유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쫓기는 자는 매우 힘이 든다.”
김장훈에게서 그 음유시인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