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크 루소의 말년은 친교를 맺은 계몽철학자들과의 결별로 점철되어 있다. 볼테르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를 잘 이해하던 디드로와도 논쟁 끝에 헤어졌고, 모두에게 소외된 루소를 끝까지 옹호하며 영국으로 초청했던 흄마저도 마지막엔 그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님을 인정했다. 루소는 사람들이 자신을 겨냥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며 은둔 생활을 하다가 삶을 마쳤다.
피해망상에 의한 그의 신경쇠약에는 개인의 괴팍한 성벽이나 병력쯤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사회적 원인이 있었다. 루소는 <에밀>과 <사회계약론>에서 기독교의 요체인 원죄설과 계시 신앙을 부정하는 요인을 내포하는 ‘시민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받았으며, 많은 계몽철학자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구나 체포령이 내려진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돌아간 고향 제네바에서도 이단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책들을 소각당했다. 밤에 그의 집에 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사실 그의 시민종교관은 오늘날에는 전혀 문제 될 일이 없는 계몽된 견해였다. 루소에게 종교는 사회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의 다른 가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자신의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종교도 존중받아야 한다. <에밀>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부아 보좌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나 마호메트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시민의 덕성을 함양시키는 한 어느 종교라도 무방했다. 당시로선 구교와 신교 모두 받아들일 수 없던 이 종교관이 그가 받은 핍박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루소를 박해한 제네바에는 1864년 그의 동상이 들어섰고, 오늘날에는 제네바에서 배출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그를 내세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루소 사상의 중요성을 시민들이 인정한 결과다. 한편 이곳의 교회는 여전히 다른 종교와 사회 제도 위에 군림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