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을 워낙 존경하다 보니,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당연한 일이죠. 기록을 보면 충무공은 전형적인 "바른생활의 사나이"로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냉혹한 면이 많았는데, 덕장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영화 "명량" 개봉을 앞두고,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몇 가지 배경을 시리즈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세미나에서도 설명했었고, 국내에 좋은 도서와 자료가 많아서 제가 다시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번에 역병이야기까지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겠군요. 군량 이야기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명량해전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 수군의 군량 이야기
임진왜란이 1592년 5월 23일(양력기준)에 일어나 전라도와 북한 일부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전국토가 전란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보통 원정전쟁을 벌일 때에는 상대의 전력규모도 중요하지만 개전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시기는 봄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초겨울부터 병력을 모아야 하고 오히려 사기가 떨어지기 쉽죠. 너무 늦으면 상대가 (좀 이르더라도) 추수를 해서 농성할 곡식을 쟁여놓을 수 있고 농성이 길어지면 원정군은 야지에서 겨울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에 원정에 나서는데... 임진왜란에서는 한양이 개전 20일 만에 함락되었고 평양은 개전 2개월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추수를 할 겨를이 없었고 추수를 하더라도 대부분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전라도 지방을 제외한 나머지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도 힘든 이듬해 봄(보리추수 전) 춘곤기일텐데 전쟁까지 휩쓸었으니 1953년 봄부터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왜군은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서 미처 처분하지 못한 식량을 고스란히 손에 넣어, 보급로가 조선수군에게 가로막혔어도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설상가상으로 명군원군의 군량, 그것도 군마를 위한 것까지 긁어모아야했습니다. 군사를 내주는 명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고 평양까지 내준 우리는 5만 명이 5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쌀과 좁쌀 5만 석과 콩 3만 3천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여송의 군마 2만 마리의 말을 위한 풀과 콩도 준비해야 했는데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죠.
한양을 비우고 달아났던 조정은 1592년이 끝나기 직전 12월 29일에 조도어사(중앙에서 파견한 특별관리)의 별사목과 호조의 납속사목을 내려 조명 연합군의 군량과 마초를 쥐어짜냈습니다.
아래는 경기와 황해도 조도어사의 명령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군량을 모으고 못모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1. 본도(本道) 부근 지계(地界)의 수일 정(程) 내의 군현(郡縣)에서 미속(米粟)과 태두(太豆)를 납부하는 자는 본도의 예에 의하여 보상하고, 운반하는 자 역시 본도의 예에 의하여 상을 준다.
1. 본관(本官)의 수령(守令)으로 힘을 합쳐 곡식을 모으고 운반한 것이 1백 석 이상인 자는 가자(加資)하고, 3백 석 이상인 자는 승서(陞敍)하고, 5백 석 이상인 자는 초서(超敍)하고, 7백 석 이상인 자는 2계(階)를 뛰어 승서한다. 자궁(資窮)된 자에게는 1백 석 이상은 대가(代加)하고, 3백 석 이상은 2자급을 대가하고, 5백 석 이상은 아들이나 사위 가운데서 참하직(參下職)을 제수한다.
1. 유향소(留鄕所)와 전함 인원(前銜人員) 및 믿을 만한 모든 품관(品官)들에게 힘을 다해 곡식을 모으고 운반하는 것을 담당하게 하여 1백 석 이상인 경우 전함이 있는 자는 2자급을 더하고 향소 이하는 6품 영직(六品影職)을 주며, 5백 석 이상인 자로 전함이 있는 자는 복직(復職)시키고 향소 이하는 4품 영직을 주고, 7백 석 이상인 자로 전함이 있는 자는 승서하고 향소 이하는 참하(參下) 실직(實職)을 제수한다.
1. 서얼(庶?)·향리(鄕吏)·공사천(公私賤) 등에게 힘을 다해 곡식을 모으고 운반하는 것을 담당하게 하여 1백 석 이상인 자는 5년을 기한으로, 3백 석 이상은 10년을 기한으로 면역(免役) 완호(完護)한다. 5백 석 이상인 경우 서얼은 허통하고 향리 및 유역인은 자신을 면역하고 공사천은 종량(從良)한다.
1. 호령의 봉행을 태만히 하는 자는 타도와 본도를 막론하고 통정(通政)인 자는 계문(啓聞)하여 치죄(治罪)하고, 통훈(通訓) 이하는 스스로 처단한다.
1. 향소(鄕所)의 감관(監官)·색리(色吏) 등 곡식을 모으고 운반을 담당한 모든 자들로서 태만한 자는 타도와 본도를 막론하고 논죄하여 죄가 무거운 자는 형신(刑訊)한다.
평양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 왜군 선봉)와 구로다 나가마사 3만 명이 주둔하다가 구로다 나가마사가 황해도로 빠져나가고, 이를 기회로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수복전투(8월 23일)를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조승훈은 바로 요동으로 돌아갔고 9월 6일에 조선 단독의 2만 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다시 패했습니다. 결국 평양성은 1593년 2월 6일에 벌어진 4차전에서야 수복할 수 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온전히 후퇴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전란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전라도 충무공의 수군은 자신도 충분하지 못한 군량을 올려보내야 했습니다. 1592년 9월 25일. 충무공께서 올린 장계의 일부 내용입니다.
연해변 각 고을의 관원들이 사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량을 규정된 수량 이외에 별도로 쌓아 둔 것이 있었습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지 벌써 6개월이 되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양식을 계속 지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하된 자의 아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별도로 쌓아둔 군량 등 물품을 각각 배에 싣고 자원해 들어온 사람에게 맡겨주어 올려보낼려고 하오나, 수령들오서는 전달할 길이 없으니 이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함께 장계하도록 공문을 보냅니다.
대기근이 시작된 1593년 후반기부터는 군량을 두고 육군뿐만 아니라 명군과도 우선권 다툼을 벌여야 했고 충무공의 간절한 장계가 이어집니다. 1593년 11월 17일의 장계입니다.
... 뿐만 아니라, 군량도 사변 초기부터 육군이 계속 실어 냈고, 또 명나라 군사들의 접대로 인하여 얼마간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어졌는데, 육전을 맡은 대소의 여러 진에서는 끊일 새 없이 실어가는 바, 연해안 일대의 백성들이 육상으로 또는 해상으로 끌려 다니는 일에 모두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좌ㆍ우도 각 다섯 고을의 군량을 각처에서 징발해 가는 형편입니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던 왜군의 군량사정도 악화되었고 인육을 먹는 왜병이 그려질 정도로 조명왜 모두의 사정이 심각해졌습니다.
이 그림을 두고 당시 일본은 인육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왜곡을 하는데... 당시 조선의 상황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지옥도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왜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던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의 기록입니다.
각 도의 인민이 떠돌아 살 곳을 정하지 못해 굶어죽은 송장이 잇달았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 느릅나무의 껍질과 줄기로 모두 없어졌다.
충무공도 1594년 3월 10일에는 처절한 장계를 올리게 됩니다.. 전문입니다.
삼가 상고하올 일을 아룁니다.
전라 좌ㆍ우도의 연해안의 19고을 중에서 10고을은 수군에 소속되어 있는바, 전란이 일어난 뒤로부터 육군 진영의 여러 곳에서 군량을 실어 나르기에 거의 휴일이 없어 이미 죄다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좌도의 4고을과 우도의 한 고을은 또 스스로 불질러 버린 화를 겪었기 때문에 더욱 탕진되었는데, 좌ㆍ우도의 원래 있던 수량과 더 만드는 전선 중에서 먼저 모일 것이 110척이며, 사후선이 110척으로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무려 17000명이나 됩니다.
한 사람마다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하루 먹는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며, 한 달이면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3400여 석이나 됩니다.
경상 우도는 탕패된 나머지 더욱 군량을 마련할 방도가 없으므로 역시 전라도의 10고을을 믿을 수 밖에 없는데, 10고을에 남아 있는 군량도 피란민 구제 양곡을 제외한 수군의 군량만을 계산하면 겨우 5월 15일 경까지 이어갈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전에 흉악한 무리들을 소탕하지 못하면 그 뒤의 군량을 전혀 조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니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조정에서 헤아려 생각하여 조처해 주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칠천량 전투 이전의 조선수군은 군량이 떨어져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음에는 조선수군의 손실(역병)과 충원 이야기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