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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주 기생의 교훈
내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준 분들이 여럿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여성으로서 진주의 기생이었다.
전쟁터는 군인 만능의 세계다. 장교라면, 제일 낮은 위관이든 영관이든 모두 마치 장군이라도 된 양 공연히 우쭐대는 것이 이 세계다. 나 또한 그때 겨우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전쟁터에서 권총을 차고 지프를 몰고 다니며 마치 장군이나 된 것 같은 착각으로 살았던 것도 거짓이 아니다. 그런 기분으로 마음이 들떠 있던 나에게 진주에서의 어느 날 밤의 일은 진정한 인간적 용기 앞에서 무기와 폭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지리산 '공비'와의 전투에서 우리 연대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부대의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대장이 연대 장교들을 위한 위로의 술좌석을 마련했다. 연대장의 계획인즉, 그 자리에 '말로만 듣던 진주 기생'들을 불러 모은다는 것이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진주시에는 변변한 술집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 중에서 권번을 나온 기생들이 몇 있다고 알려진 술집에서 판이 벌어졌다.
실제로 권번을 나온 기생은 고작 나이가 든 몇뿐이고, 나머지는 여기저기서 불러 모은 여성들이었다. 어떻든, 전쟁터를 누비고 살아온 20대의 혈기 넘치는 사나이들에게 이것은 예사로운 밤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별로 하지 않았다. 스스로 마시고 싶어 술을 찾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나였는데도 몇 순배 잔을 돌리고 받아 마시다 보니 거기에 와 있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 아름다운 논개의 후예들로 비쳤다.
값싼 분내에 취해 제법 사내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늉도 해 보였다. 그 중에서 연대장과 내 옆에는 진짜 권번 출신인 늙수그레한 기생이 앉았다. 계급적으로는 상급자인 몇몇 병과 장교를 제쳐놓고 내 옆에 '논개의 후예'가 자리잡은 까닭은 연대의 참모 장교들이 연대장 옆에 앉기를 꺼려 멀리 자리를 비킨 탓이었다. 흔히 술자리에서 통역장교는 계급과 관계 없이 지휘관 옆에 자리잡고는 했다. 통역장교는 '반 군인 반 민간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지휘관도 별 허물 없이 대해 주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옆에 자리잡은 권번 기생은 나보다 나이가 여러 살 위였지만 용모나 허우대가 마음을 끌었다. 노는 가락도 과연 어려서 권번에 들어가 기생 수업을 했다는 말대로 어딘지 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나는 매혹되었다. 흥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나는 술기운을 빌려 그에게 이 자리가 파한 뒤 '둘이 따로 자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나는 취해 있었다. 군인이 왕이던 전투지역에서 나의 요청은 차라리 '명령'일 수 있는 때였다. 이 '장군'의 소청에 '논개'는 몇 번이고 말을 흐리던 끝에 마침내 동의하였다. 적어도 '장군'에게는 그가 동의한 것으로 들렸다.
어느새 나는 취기가 돌아 잠들었었는지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고 다른 여자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약속을 믿고 기대가 부풀었던만큼 기어이 찾아내 약속을 이행시켜야겠다는 심술이 생겼다. 나는 그의 집을 여자들에게 물어 대충 머리 속에 약도를 그려 넣고는 밖으로 나와 지프를 몰았다.
그의 집은 시내를 조금 벗어나 남강 다리 왼편으로 한참 가서 강을 내려다보는 경사 급한 언덕 위에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서 막힌 골목에 차를 세운 나는 싸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은 함석으로 이은 초라한 흙벽집이었고, 마당에는 닳아서 번들번들해진 돌이 울퉁불퉁 깔려 있었다. 그 마당에서 상당히 높은 토방이 작은 방 두 개를 떠받들고 있는 듯한 구조였다. 유난히 밝은 달이 남강가 대밭 높이 싸늘한 하늘에 걸린 채 그 집을 정면에서 내리비춰 집과 마당은 연푸른 빛에 싸여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조용히 불렀다.
"여보세요. 집에 돌아왔어요? 아까 연대장과 함께 있던 이중위요."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술좌석에서 소개된 그의 예명을 불렀으리라 생각된다. 방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잠시 어리둥절해진 나는 다시 소리를 높여 불렀다.
"말도 없이 없어지다니 무슨 일이오? 약속한 대로 빨리 갑시다. 빨리 나오시오."
한참만에 인기척이 있더니 돌쩌귀 긁는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열렸다. 나는 빨리 나서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여자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툇마루에 나와 서더니 마당에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보름이 막 지난 밤의 밝다 못해 푸른 기운마저 감도는 교교한 달빛에 드러나 보이는 그의 자태는 조금 전까지 나에게 술잔을 권하던 기생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위엄에 싸여 있었다. 범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나를 압도해 오는 것 같았다.
그의 기상에 눌리기 시작한 것을 느낀 나는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나의 위치를 회복하려 했다. 느닷없이 권총 끝에서 섬광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마당 한 끝에서 불꽃과 함께 폭발 소리가 일었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총소리는 남강 위의 겨울 하늘에 공허한 메아리로 번져 나갔다. 순간적인 사태에 깜짝 놀란 운전병 조하사가 싸리문 밖에서 기관단총을 멘 채 뛰어들면서 나의 팔을 붙잡고 떨리는 소리로 "이중위님, 이중위님…"을 되풀이했다. 권총을 밀어넣은 나는 토방으로 다가서면서 소리쳤다.
"가! 약속했잖아! 누구를 놀리는 거야?"
나는 나를 묶고 있던 여자의 주술의 끈이 총소리에 흩날려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총소리에 기겁한 '논개의 후예'가 버선발로 허둥지둥 뛰어 내려와 돌마당에 무릎을 꿇고 '장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자는 높은 툇마루에서 자태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도도하게 나를 내려다볼 뿐 아닌가!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는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한참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흩어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 기생을 잘못 보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천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돌처럼 굳어지고 정수리에서 술기가 싹 가셔버린 내가 벼락을 맞은 듯 서서 움직일 줄 모르자 그는 다시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 주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여자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를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나는 그의 너무도 당당한 기품과 위엄에 눌려 대답할 용기를 잃고 있었다. 하찮게 보고 덤볐던 자신이 너무도 왜소해져 나의 존재가 내면에서부터 산산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맨손의 진정한 용자(勇者) 앞에서 가장 비겁한 존재가 되어버린 권총 찬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심으로 사죄한 다음, 깊은 절로 한 기생의 인격적 위대함에 대한 예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발을 돌려 싸리문을 제치고 나왔다.
※ '내가 사랑하는 수필'은 금아 피천득 선생의 '내가 사랑하는 詩'의 제목을 시에서 수필로 바꾸었고 차용했음을 밝혀 둡니다.
※ 출전: 리영희 저작집 6 - 역정(나의 청년 시대) 리영희 한길사 2006
※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만약에 저작권 문제시에는 자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