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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프로젝트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5-08-05 20:09:04
추천수 40
조회수   2,698

제목

히틀러 프로젝트

글쓴이

곽영철 [가입일자 : 2001-05-31]
내용

히틀러 프로젝트


원문 : 웹스터 타플리The Hitler Project 

/skin/community/upload/file_attach/2024/04/27/1714150734_93537.pdf

or The Hitler Project

 

1942년 10월, 2차 대전 발발 10개월 후, 미국은 나치에 대한 첫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레스콧 부쉬(Prescot Bush)는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 은행(Brown Brothers Harriman & Co.)의 경영 파트너였다.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될 18살짜리 그의 아들 George H. W. Bush 는 해군 파일럿 훈련을 시작하고 있었다. 1942년 10월 20일, 미국 정부는 프레스콧 부쉬가 운영하던 뉴욕의 나치 은행에 대한 압수를 명령했다.  

적성국 교역법(U.S. Trading with the Enemy Act)에 의해 미국 정부는 프레스콧 부쉬가 중역으로 있던 뉴욕의 유니언 뱅킹 UBC (The Union Banking Corporation)를 압수했다. 외국인 자산 관리처는 프레스콧 부쉬, E. Roland Harriman, 그리고 나치 간부 3명 및 공모자 2명이 소유하고 있던 유니언 뱅킹 주식을 압류했다. 

몰수된 유니언 뱅킹의 주식 소유자들은;

E. Roland Harriman - 3991

유니언 뱅킹 UBC 회장프레스콧 부쉬에 의하면 하리만은 경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주식만 소유했다. 그러나 프레스콧은 하리만의 개인 투자를 관리했다

Cornelis Lievense - 4

유니언 뱅킹 행장. 뉴욕의 나치 은행

Harold D. Pennington - 1

유니언 뱅킹 경리부장.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의 부쉬가 임명한 사무 관리자

Ray Morris - 1

유니언 뱅킹 중역. 부쉬와 하리만 파트너

Prescot Bush - 1

유니언 뱅킹 중역. 유니언 뱅킹 설립자는 프레스콧 부쉬의 장인 조지 허버트 워커, E. 롤랜드 하리만, 애버렐 하리만

H.J. Kouwenhoven - 1

유니언 뱅킹 중역. 유니언 뱅킹을 독일의 프릿츠 티센과 미국의 조지 워커, 애버렐 하리만 사이의 연결점으로 조직. 나치 점령하의 유니언 뱅킹 네덜란드 지점장, 나치 독일 산업 관리, 독일 철강 조합 최고 재무 관리자

Johann G. Groeninger - 1

유니언 뱅킹과 네덜란드 지점 중역. 나치 독일 산업 관리

"모든 주식은 티센 가문의 소유이며... 적성국으로 지정된 나라의... "

1942년 10월 26일, 미군은 북아프리카로 향하고 있었다. 10월 28일, 미국 정부는 부쉬-하리만의 뉴욕 은행 유니언 뱅킹이 운영하는 나치의 두 위장 기업 Holland American Trading Corporation과 Seamless Steel Equipment Corporation의 압수를 명령했다. 

11월 8일, 미군은 알제리 근처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고, 11월 내내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1942년 11월 17일, 프레스콧 부쉬와 그의 장인 조지 허버트 워커(George Herbert Walker)가 관리하던 Silesian-American Corporation (SACO)의 나치 자산은 적성국 교역법에 의해 압류되었다. 비록 미국 정부는 나치 자산의 압류를 발표하기는 하였지만, 나치의 미국 파트너들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시 기간 동안 미국 정부가 취한 행동들은 비극적이게도 너무 적었고 또 너무 늦었다. 프레스콧 부쉬의 가족들이 이미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자금 지원, 그의 무장과 독일 정권 탈취, 유럽 정복과 미국과의 전쟁을 위한 나치의 군수 산업 증강에 대한 자금 지원, 나치의 인종주의 선동과 대학살 논리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난 후였다.

조지 H. W. 부쉬 대통령과 그가 대변하는 인류에 대한 위협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여기서 논의되는 사실들과 그 의미들은 대중들에게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부쉬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히틀러 프로젝트"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프로젝트에서 나중에 그를 CIA와 백악관에 올려 놓은 것은, 앵글로-아메리칸 가문들의 강력한 연합인 그의 아버지의 동료들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외국인 자산 관리처(Office of Alien Property Custodian)의 Leo T. Crowley는 적성국 교역법에 의거 프레스콧 부쉬의 자산을 압류하는 귀속 명령 248호에 서명했다. 불분명한 기록과 보도조차 되지 않은 이 명령은 이 자산들의 나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유니언 뱅킹이 티센 가문을 위해 운영되었다"라거나 "적성국으로 지정된 독일과 헝가리의.." 정도이다. 

유니언 뱅킹의 프레스콧 부쉬와 다른 간부들이 나치 앞잡이였다는 것을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더욱 중요한 역사적 문제를 피하고 있다. 프레스콧 부쉬가 실행 책임자였던 '뉴욕과 런던의 도당들'에 의해서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고용되고, 무장되고, 지시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하리만-부쉬의 '히틀러 프로젝트'를 검토해 봐야 한다.

프로젝트의 기원과 범위

예수회 몰타의 기사단 프리츠 티센(Fritz Thyssen)과 그의 사업 파트너들이 히틀러의 독일 정권 탈취에 가장 중요한 지원자였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티센 가문이 소유한 유니언 뱅킹의 자산 압류를 지시하는 행정 명령이 떨어진 그 시점에 이미 프리츠 티센은 그의 책 I paid Hitler에서 1923년 10월부터 히틀러와 나치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히틀러의 권력 탈취 초기 과정에 대한 티센의 역할은 1932년 베를린의 미국 외교관들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부쉬-티센 은행의 압수 명령은 흥미롭게도 너무 조용했고, 그들의 태도는 범인들의 정체에 대해서 너무 부드러웠다.

공식 명령이 떨어지기 2주 전, 정부 조사관들은 비밀히 보고했다. "1924년 이전에 W. Averell Harriman이 이미 유럽에 가 있었고, 독일 산업가 프리츠 티센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리만과 티센은 뉴욕에 은행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하리만의 일원들이 간부로 봉직할 것이다.. 하리만 회사와 회의를 가지기 위해 1924년 이전에.. 티센의 직원 H. J. Kouwenhoven 이 미국에 왔다.."

사실 1922년 하리만은 W.A. Harriman & Co.의 베를린 지사를 설립하고 조지 허버트 워커를 회장으로 앉히기 위해 베를린에 있었다. 1924년, 유니언 뱅킹은 티센이 소유한 네덜란드 은행 BHS (Bank voor Handel en Scheepvaart)와 연동하는 W.A. Harriman & Co.의 맨해튼 사무실로써 설립되었다. 조사관들은 이렇게 결론내렸다. "유니언 뱅킹은 그 시작부터 미국 투자에 대한 티센의 이해 관계에 따라 네덜란드 은행을 통해 공급되는 자금들을 다루어 왔다."

1922년, 애버렐 하리만과 프릿츠 티센의 개인 협상에 의해서 W.A. Harriman & Co.는 독일의 티센 자산과 뉴욕의 자금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40만 달러의 투자를 통해서 하리만은 독일 바깥에 있는 티센 은행의 공동 소유자, 공동 운영자가 되었다.

부쉬 대통령의 뉴욕 은행가 아버지가 일했던 나치 기업은 얼마나 중요할까?

1942년, 미국 정부의 조사 보고서는 프레스콧 부쉬의 나치 은행이 프리츠 티센과 그의 두 형제가 경영하는 Vereinigte Stahlwerke (United Steel Works, 합동제강, 후일 독일 철강 조합 German Steel Trust로 개명)와 서로 연동하는 관계였다고 보고한다. 종전후 미 의회 조사단은 티센의 사업과 유니언 뱅킹 및 기타 나치 관련 부문을 조사했다. 의회 조사에 의하면, 이 제철 기업은 전체 독일 생산에서 대략 하기 비율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의;

선철(무쇠) ----------- 50.8%

일반 강판 ------------ 41.4%

후판 ----------------- 36.0%

아연 도금 강판 ------ 38.5%

파이프, 튜브 --------- 45.5%

철선 ----------------- 22.1%

폭발물 --------------- 35.0%

1926년, 프레스콧 부쉬 W.A. Harriman & Co.의 부회장이 되었다그 해, 하리만의 한 친구와 프레스콧 부쉬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요 지원자인 그들의 고객 프리츠 티센을 위해서 새로운 거대 조직을 설립한다.

월 스트리트와 나치 

1926년, 월 스트리트 은행가 클라렌스 딜런(Clarence Dillon, 폴란드계 유대인, CFR, 원조 일루미나티 가문)에 의해 설립된 새로운 독일 철강 조합(German Steel Trust)이 독일의 최대 기업으로 떠올랐. 딜런은 1차 대전 당시 '죽음의 상인들' 사이에서 프레스콧 부쉬의 아버지 사무엘 부쉬(Samuel Bush)와 알고 지낸 오랜 동료였다. 창립금 7천만 달러에 대한 보답으로 최대 지분 보유자인 티센은 딜런 리드 은행(Dillon Read & Co. 록펠러 은행)에게 독일 철강 조합의 중역 자리 2개 이상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구분이 있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티센 자신의 기밀 계좌는 워커-부쉬 조직을 통해서 거래되고 있었고, 독일 철강 조합은 딜런 리드를 통해 거래했다. 워커-부쉬의 금융 작업들은 나치 독일의 목적과 우연히 일치한, 정치 중립적인 행동들이 아니었다. 모든 사업들은 반민주적 정치 세력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7년, 전체주의 지원에 대한 일각의 비난에 대해 조지 허버트 워커는 애버렐 하리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철수한다는 Bearsted 경과 관련한 그 가정들은 무언가 부적절한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선을 그었고, 여기에 따라야 한다."

애버렐 하리만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났다. 조지 허버트 워커에게 좋은 소식을 담은 전보가 전해졌다. "최근 며칠 동안.. 무솔리니는.. 6월 15일 우리의 계약을 승인했다."

1929-31년의 경제 대공황은 미국, 독일, 영국을 강타했고 모든 정부를 약화시켰다. 이것은 강한 압박을 받고 있던 프레스콧 부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야만 하도록 몰아갔다. 이 위기의 와중에 일단의 앵글로-아메리칸들이 독일에 히틀러를 심기로 결정한다.

W.A. Harriman & Co.와 투자 은행 Brown Bros. & Co.이 합쳐져 Brown Brothers Harriman & Co.이 되었다. 하리만 형제와 프레스콧 부쉬, 대처 M. 브라운이 수석 파트너였다. 브라운 가문의 런던 지사였던 브라운 쉬플리(Brown Shipley)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로버트 A. 러벳(Robert A. Lovett, 한국 전쟁 당시 미 국방장관, Skull & Bones, 현명한 사람들, 공화당) 역시 브라운 브러더스의 파트너가 되었다. E. H. 하리만의 변호사이자 철도청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프레스콧 부쉬의 아버지와 함께 전쟁 산업 위원회(War Industries Board) 위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역시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의 파트너였지만, 곧바로 아들이 그 뒤를 이었고, 애버렐 하리만이 소유한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 사장으로 부임했다.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은 인종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히틀러 프로젝트'에 매우 잘 맞는다! 미국의 우국 지사들은 남북 전쟁 당시에서 연유한 그 이름을 비난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 각각 사무실이 있던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은, 미국 남부에서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면화의 75%를 영국의 공장주들에게 실어 날랐다.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은 노예를 사기 위한 자금을 대출해 주던 은행이다.

1931년 당시, 세계 재정의 독재자라 할 만한 영국 은행 총재 몬타구 노르만(Montagu Norman)은 브라운 브러더스의 전직 파트너였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남북 전쟁 당시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 사장이었다. 몬타구 노르만은 영국의 지배 계급 사회에서 가장 열렬한 히틀러 지원자였으며,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과 그의 가까운 관계는 '히틀러 프로젝트' 관리에 근본적 역할을 하고 있다. 


크립토 유대인들 : 히틀러의 재무장관 얄마 샤크트, 영국 은행 총재 몬타구 노르만


1931년, 프레스콧 부쉬는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의 뉴욕 사무소를 운영했고, 부쉬의 파트너는 몬타구 노만의 절친 대처 브라운이었다. 영국 은행 총재 몬타구 노만은 뉴욕에 올 때면 늘상 대처 브라운의 집에서 묵었다. 프레스콧은 독일 사업에 집중했고, 항상 그의 멘토 몬타구 노만의 지도를 받았다.

1933년 1월 30일, 2년간의 집중적 투자 및 폭력적 로비와 선거 운동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의장이 되었고, 3월에는 절대적 독재자가 되었다. 부쉬-하리만의 두 조직이 이 범죄에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프릿츠 티센의 독일 철강 조합과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 HAPAG 그리고 몇몇 그 지도부들이다. 

부쉬 가문의 독일 파트너들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종전후 프릿츠 티센은 나치당에 대한 그의 재정적 지원에 대해서 연합 조사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0년 또는 1931년.. 루돌프 헤스에게 말했습니다... 로테르담의 BHS 은행(하리만-부쉬 지사)을 통해서 자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3년 뒤에 상환받는 것으로 했습니다.. 지원자를 분명히 하기 위해, 나치를 좀 더 손아귀에 쥐기 위해 독일 은행들보다는 네덜란드 은행을 택했습니다.."

"대출금은 일전에도 지원했었던 25-30만 마르크 정도였습니다. 상환은 네덜란드 은행으로 받았으며, 아직도 다 갚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자금이 부족했던 끔찍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대한 티센의 기부와 대출금은 백만 달러를 상회하며, 다른 기관들로부터도 자금을 모아주었다.

프리드리히 플릭(Friedrich Flick)이 프리츠 티센과 함께 독일 철강 조합의 공동 소유자였고, 티센의 오랜 협력자이자 때로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뉘렘베르크 전범 재판을 준비하던 미국 정부는 플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플릭은 1932년부터 나치당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한 주요 자본가이자 산업가이다.. 친위대에 큰 기부를 했던 하인리히 히믈러의 S.S. Circle of Friends 회원이기도 하다.."

플릭은 티센과 마찬가지로 나치당의 사병 조직 친위대와 돌격대를 지원했다. 플릭과 하리만의 협력은 프레스콧 부쉬와 그의 장인 조지 허버트 워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독일 철강 조합과 하리만-워커 유니언 뱅킹이 합작함으로써 최소한 1926년부터는 프리드리히 플릭과 독일에서의 그의 광범위한 작업에 대한 자금 지원 창구가 만들어졌다.

조지 허버트 워커가 회장이며 프레스콧 부쉬와 애러벨 하리만이 중역으로 있던 Harriaman Fifteen Corporation 1938년 1월 1일 브라운 브러더스와 병합할 당시 Silesian Holdings의 지배 주주였다. 이 지배권은 애버렐 하리만에게, 프리드리히 플릭이 2/3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과 폴란드의 철강, 석탄, 아연 생산의 1/3을 담당하던 미국 기업 Consolidated Silesian Steel Corporation의 회장직을 선사했다.

뉘렘베르크의 검사는 플릭을 이렇게 묘사한다. "석탄, 철강 플랜트의 거대 산업 소유자.. 1938년의 군수 산업 선구자..."

노예 노동을 이용한 석탄, 철강, 무기 생산 등 히틀러의 군사력 증강 지원에 대하여, 플릭은 누렘베르크 재판에서 7년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실제 감옥 생활은 3년뿐이었다. 뉴욕과 런던에는 그의 친구가 많았고, 1970년대까지 억만장자로 살다 죽었다.

납세 독촉자 살해 

1934년 3월 19일, 당시 독일 철강 조합의 유니언 뱅킹 간부였던 프레스콧 부쉬는 공석중이던 애버렐 하리만에게 플릭이 폴란드에서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보고한다. 프레스콧 부쉬는 당시 뉴욕 타임스의 한 쪽을 오려 하리만에게 보낸다. 폴란드 정부가 미국인들과 독일인들이 최대 주주였던 폴란드 최대 기업 Upper Silesian Coal and Steel Company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계속한다. "이 기업은 오랫 동안 경영 부실, 과다 채무, 허위 부기, 채권 투기등으로 비난받고 있었다. 탈세와 관련하여 몇몇 중역에게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들은 독일인들이었고, 모두 도피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로 대체되었다. 이것을 중역진 전체를 폴란드인들로 교체하려는 시도라고 간주한 Herr Flick은 신규 폴란드인 경영자들이 직원들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대출을 제한함으로써 철저히 보복했다."

"이 기업은 종업원 2만 5천명을 고용하고 있고, 폴란드 철강 생산의 45%와 석탄 생산의 12%를 담당하고 있다. 주식의 2/3는 독일 철강인 프리드리히 플릭이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다."

불황의 한 가운데에서도 폴란드 생산품의 상당 부분이 히틀러의 독일에게 수출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폴란드 정부는 프레스콧 부쉬, 하리만 그리고 그들의 나치 파트너들이 최소한 그들의 지분에 대한 세금만이라도 전부 납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과 나치 소유자들은 공장 폐쇄로 대응했다. 유럽의 대표들은 워싱턴의 하리만에게 서신을 보낸다. "런던과 베를린에서 새로운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부디 주미 폴란드 대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1935년, 조지 허버트 워커에게 보내는 Harriaman Fifteen Corporation의 메모는 그들의 Consolidated Silesian Steel Corporation 주식 8,000주를 매각하는 협의가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폴란드와의 이 분쟁이 플릭과 부쉬 가문의 계속적인 협력을 막지는 못했다.

1939년 9월, 2차 대전 개전을 알리는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면서 나치의 폭탄과 탱크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나치군은 플릭, 하리만, 워커, 부쉬가 폴란드에서 탈취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무기들로 무장되었다. 

소비에트가 역시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소련군 장비들은 하리만, 워커, 부쉬가 부활시킨 바쿠 유전에서 퍼올린 기름으로 굴러갔다는 아이러니를 알고 있던 사람은 당시에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었다
.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1년 정도가 되는 3년후, 미국 정부는 적성국 교역법에 의거 Silesian-American Corporation의 나치 지분 압류를 명령했다. 적성국 지분 소유자들은 일반주 49%와 우선주 41.67%를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 정부의 압류 명령은 이 기업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이 기업은 스위스 쥐리히의 위장 회사가 운영하는 기업이며, Bergwerks gesellschaft George von Giesche's Erben가 소유한 독일 기업이다..."

조지 허버트 워커가 1926년 독일 철강 조합과 동시에 설립한 이 기업의 사장은 아직도 그 자신이었다. 유니언 뱅킹과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에서 같이 근무한 프레스콧 부쉬의 파트너 레이 모리스 역시 중역이었다.

정부 단속 이전에 마련된 조사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업의 본질: 제목의 이 기업은 독일과 폴란드 지사를 거느린 미국의 지주 회사이다. 독일, 폴란드 지사는 실레시아, 폴란드, 독일에서 거대하고 가치있는 석탄과 아연 탄광을 소유하고 있다. 1939년 9월 이후로, 이 자산들은 독일 정부에 의해 소유되었고 또한 운영되었다. 이 기업이 독일의 전쟁에 상당한 기여를 한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보고서는 미국의 주주들이 종전후 유럽 자산들에 대한 재취득을 희망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나치 독일의 산업 관리자 월 스트리트

1920년, 조지 허버트 워커는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을 인수하기 위해 하리만에게 필요했던 대출을 관리했다. 워커는 함부르크 아메리카에 가진 영향력을 발휘하여 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를 W.A. Harriman & Co.의 한 부분으로 조직해냈다.

히틀러 프로젝트가 본격 궤도에 오른 후 하리만과 부쉬의 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지분은 프레스콧 부쉬와 조지 허버트 워커가 운영하는 Harriaman Fifteen Corporation이 가져갔다.

수석 매니지먼트 파트너, 비밀 투자 관리자, 애버렐 하리만 형제의 자문으로 있던 월 스트리트 59번가의 마천루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에서 G. H. Walker & Co.로도 알려진 월 스트리트 1번지 Harriaman Fifteen Corporation까지 걸어가거나, W.A. Harriman & Co.의 예전 사무실이자 당시 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와 유니언 뱅킹 사무실이 있던 브로드웨이 39번지까지 걸어가는 것은 잘 그을리고, 건장하고, 잘생긴 프레스콧 부쉬에게는 힘들지 않은 가벼운 산책이었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부쉬의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은 '히틀러 프로젝트'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애버렐 하리만과 조지 허버트 워커는 1920년 1차 대전 이후 이 회사의 사장이었던 빌헬름 쿠노(Wilhelm Cuno)와 그 지원자 막스 M. 워버그와의 협상을 통해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그 이후로 쿠노는 앵글로 아메리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앵글로-게르만 친목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쿠노는 1930-32년 히틀러 정권 추진 과정에서 나치당에 거금을 기부했다. 

당시 부쉬의 유니언 뱅킹 뉴욕 사무소를 지사로 거느린 티센-플릭의 독일 철강 조합 사장은 Albert Vogler 였. 알버트 뵈글러는 부쉬의 지사인 로테르담의 BHS 은행과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의 사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프레스콧 부쉬의 나치 작업에 있어서 쉬뢰더 은행가 가문도 핵심 인물들이며, 그들의 변호사 앨런 덜레스(CIA 설립자), 존 포스터 덜레스(후일 미 국무장관) 형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Kurt Baron von Schroder 남작이 프레스콧 부쉬의 뉴욕 은행 파트너였던 요한 그뢰닝거와 함께 티센-후앗트 주물공장의 공동 사장이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병 조직을 만들어 가던 재무 관리자였고, 프리드리히 플릭도 여기에 기부했다. 쿠르트 폰 슈뢰더와 몬타구 노르만의 제자 얄마 샤크트(Hjalmar Schacht)가 히틀러의 독일 정부 입성애 대한 마지막 조정을 이끌어냈다.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의 부회장은 루돌프 폰 쉬뢰더 남작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던 애버렐 하리만과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루돌프 폰 쉬뢰더는 1932년 12월 히틀러의 선거 승리 전날 저녁, 손자 요한 루돌프 남작을 뉴욕 프레스콧 부쉬의 브라운 브러더스 하리만으로 여행을 보냈다.

1932년 하리만-부쉬의 증기선 회사와 관련한 행동들은 이 세기 가장 중대한 반역으로 기록되어야만 한다.

친위대와 돌격대

베를린의 뉴욕 대사관은 워싱턴으로 보고한다. "막대한 선거 비용과 3~4십만의 사병 유지 비용은 나치의 자금 지원자들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독일 공화국의 헌법적 정부는 나치당의 사병 조직을 해산토록 명령함으로써 국가의 자유를 지키기로 하였다. 미 대사관은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이 히틀러의 사병 조직에 대한 마지막 순간의 정부 조치에 대항하는 선전 선동 공격을 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히틀러리즘에 대항하는 수천의 독일인들이 나치 사병 조직 돌격대에게 사살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상인들'의 사무엘 프라이어가 원래 유니언 뱅킹과 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의 설립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프라이어는 레밍턴 암스(Remington Arms)의 집행 위원장이자 세계 개인 화기 거래의 중심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부쉬 가문의 나치당 지원에 활용되었다.

미 상원 무기 거래 조사단은 나치 기업 I. G. Farben 과의 '폭발물에 대한 카르텔 협정'에 합류한 레밍턴 암스를 조사하였다. 히틀러의 권력 쟁취 과정을 조사한 상원 의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치당과 같은 독일 정치 조직들은 거의 대부분 미제 총기류로 무장되어 있었고... 온갖 종류의 무기가 미국에서 선적되어 스헬데 강으로 보내진다. 이 무기들은 바지선에 실려 다시 안트워프에 보내진다. 여기서부터는 경찰의 검문이나 간섭없이 네덜란드를 통과해 독일로 들어간다. 히틀러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필시 이 같은 방법으로 무기를 얻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보내지는 주요 무기는 톰슨 경기관총과 리볼버들이다. 그 숫자는 엄청나다."

히틀러 정권의 시작은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과 기타 배신자들에게 잔인한 변화를 가져왔다. 프레스콧 부쉬 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은 1933년 3월 7일 함부르크의 막스 워버그에게 그가 함부르크 아메리카의 공식 대표라고 통지했다.

1933년 3월 27일, 막스 워버그는 히틀러 정권이 독일에게 매우 좋다는 것을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답장을 보냈다.
"최근 몇 년 동안, 독일 산업은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좋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좋지 않은 반응이 있음을 느낀다. 여기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반독 선동을 겪고 있고, 그것들은 몇가지 불쾌한 환경에서 발생했다. 매우 극적으로 진행된 선거 캠페인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외국 언론들은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정부는 치안과 질서 유지를 다짐하고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어떠한 것이라도 경보가 될 법한 원인은 없다고 확신한다."

이 유명한 유대인에게서 오는 히틀러에 대한 승인 도장은 하리만과 부쉬가 바라던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나치 활동에 대한 미국내의 '경보'가 상당히 심각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리만에게 보내는 막스의 편지 이틀 후인 1933년 3월 29일, 막스의 아들 에리히 워버그는 하리만 철도 시스템 사장이었던 그의 사촌 프레데릭 M. 워버그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나치의 잔학한 행동들에 대한 언론 보도와 군중 집회들에서의 비우호적인 선전들을 포함한 모든 반나치 운동들을 막아줄 것을 부탁했다.

프레데릭은 에리히에게 답보를 보낸다. "독일 제품 보이코트 운동을 하는 단체는 아직 없다. 몇몇 개인들 뿐이다." 이틀 후 1933년 3월 31일, 워버그 가문에 의해 통제되는 아메리칸 유대인 위원회(American Jewish Committee)와 뉴욕 타임스 회장 슐츠버거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는 버네이 브리쓰(B'nai B'rith)는 두 단체의 합동 선언을 발표한다. "독일에 대한 어떠한 보이코트도 장려되지 않는다. 더 이상의 군중 집회나 비슷한 형태의 선동도 있어서는 안 된다."

ADL (Anti-Defamation League, 반시오니스트를 공격하는 시오니스트 유대인 단체, 오소독스 랍비 마빈 안텔만은 이 단체의 수장이 아돌프 히틀러의 후손이며, 이 단체가 네오 나치라고 주장한다)의 전신 버네이 브리쓰와 아메리칸 유대인 위원회는 유대인들과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의 저항을 둔화시키면서, 히틀러에 대한 공격 금지라는 이 같은 강경 기조를 1930년대 내내 유지했다. (나치 정권에서 유일하게 허용한 유대인 조직이 버네이 브리쓰이다. 이 프리메이슨 조직의 목적은 나치의 존재 목적과 같기 때문이며, 이 조직이 나치의 일부라는 것을 암시한다.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는 것이 이 단체의 목적이지만, 홀로코스트는 이들 때문에 일어났다).

아메리칸 유대인 위원회, 버네이 브리쓰, 뉴욕 타임스

따라서 하리만과 부쉬 기업의 궤도 안에서 발생한 이 결정적인 교환은 아마도 조지 부쉬와 미국의 유대인 및 시오니스트 지도부 간의 어떤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유대인들과 시오니스트 지도부는 나치의 드라마에서 분명 추한 어떤 역할을 했다. 이것이 '전문적 나치 사냥꾼'들이 부쉬 가문이 어떻게 부를 형성했는지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인가?

1933년 9월 5일, 나치 감독하에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와 북독일 로이드(Norddeutscher Lloyd)의 집행 간부 합동 회의 이후, 두 회사는 Hapag-Lloyd 로 병합되었다. 1933년 11월 4일, 프레스콧 부쉬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은 하리만의 오랜 수하였던 크리스틴 J. 벡을 신규 나치 선박 회사 Hapag-Lloyd 의 북아메리카 화물 운영 관리자로 임명했다.

1934년, 의회 조사에서 이 회사의 한 관리가 했던 증언에 의하면, 나치 노동부에서 온 감독관이 하리만-부쉬 라인의 모든 선박에 탑승했고, 이 회사의 뉴욕 사무소는 나치 노동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은 나치 선전을 위한 목적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예전에 히틀러 정권 이전 헌법적 독일 정부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친나치 언론들(뉴욕 타임스, 타임 등)을 지원했다.

1936년 중반, 프레스콧 부쉬American Ship and Commerce Corp.은 막스 워버그에게 다가오는 함부르크 아메리카 주주 총회에서 회사의 대지분을 대신 행사할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워버그 사무실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우리에게 예치된 3,509,600 골드 마르크의 Hapag 주식 의결권을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했습니다."

워버그는 Hapag-Lloyd 와 나치 독일의 스탠다드 오일 자회사의 겸임 사장이었던 에밀 헬프리히(하인리히 히믈러의 S.S. Circle of Friends 회원)로부터 받은 편지를 전송했다. "하리만 선생과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것과 똑같은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다채로운 제스처 속에서 Hapag의 나치 회장 헬퍼리히는 뉴욕의 조종자들과 협의하기 위해 대서양 건너 비행선을 띄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선 승객과 회의를 마친 후, 하리만-부쉬 사무소는 답변한다.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과 우리의 관계가 이전처럼 같은 토대위에서 계속된다는 헬프리히 선생의 말씀을 듣게 되어 기쁩니다."

프레스콧 부쉬의 유니언 뱅킹을 단속하기 두 달 전, 미국 정부는 적성국 교역법에 의해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과 북독일 로이드의 모든 자산의 압류를 명령했다조사관들은 보고서에서 크리스티안 J. 벡이 아직도 나치 회사를 대표해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1933년 5월, 히틀러 정권이 강화되자마자 나치와 미국의 통상 조정을 위한 협정이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 애버렐 하리만의 사촌 올리버가 이끄는 '하리만 인터내셔널'이 히틀러 독일의 모든 대미 수출을 관장하기 위해 조성된 150개 기업과 개인들의 조합을 이끌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협정은 막스 워버그와 쿠르트 폰 쉬뢰더의 조언 아래, 히틀러의 경제 장관 얄마 샤크트와 나치 기업들의 국제 변호사였던 존 포스터 덜레스 간의 베를린 협상에서 이루어졌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후일 미 국무장관이 되었고, 1950년대 공화당의 최대 실세였다. 존과 후일 CIA 국장이 된 그의 형제 앨런 덜레스는 프레스콧 부쉬의 코네티컷주 공화당 상원의원 당선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덜레스 형제 모두 부쉬 가문의 광대한 기업을 위해 일했던 변호사였다는 점은 '비밀 작전 정부'에서 조지 H. W. 부쉬의 도약에 있어서 측정 불가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1930년대 내내, 존 포스터 덜레스는 아돌프 히틀러가 공포한 일련의 법안에 따라 독일 기업들의 채무 구조 조정을 담당했다. 이 거래에서 덜레스는 투자자들과 탱크, 독가스 등을 생산해야 하는 나치 전쟁 기구들의 커져가는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나갔다.

1937년, 덜레스는 한 문제에 대해서 프레스콧 부쉬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치 독일과 미국간 유일한 통신 채널이었던 German-Atlantic Cable이 1920년대 워커-하리만 은행과 채무 관리 협정을 맺었다는 내용이었다. 신법규는 비나치 기업 관리에 맺어진 이 협정을 무효화할 것이었다. 덜레스는 애버렐 하리만을 위해 이러한 문제들을 관리하던 부쉬에게 나치 관리에게 제출할 문서에 변경을 동의하는 애버렐의 서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덜레스는 이렇게 썼다.

1937년 9월 22일

수신 : 프레스콧 부쉬, 뉴욕, 월 스트리트 59번가

친애하는 프레스,

애버렐 하리만에게 보내는 German-Atlantic Cable 관련 서신을 검토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권한은 오로지 은행가들에게만 있다고 보입니다. 채권자들이 관계되어 있으므로, 은행가 동의에 대한 변경을 묵인해 주신다면, 법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당신께.

존 포스터 덜레스

덜레스는 제안서 초안을 동봉했고, 부쉬는 하리만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리고 변경은 진행되었다. 이 조정에 의해서 German-Atlantic Cable은 소규모 미국인 채권자들에게 채무 변제 중지를 시도했다. 대신 이 자금은 히틀러 정부의 신규 법령에 의해서 나치의 무장에 사용될 것이었다.

부쉬와 덜레스의 바빴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뉴욕 법원은 이 특별한 히틀러 법이 은행가들과 나치 사이에는 유효하지만 소규모 채권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고, 소규모 채권자들은 모두 상환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속임수에서, 의도된 희생자들은 그들의 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치의 정치-재무 재조직은 그 비극적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히틀러의 혁명에 기여한 그의 역할에 대한 보답으로 프레스콧 부쉬는 한 행운을 얻었다. 그의 아들 조지 부쉬에게 남겨 준 업적이다. 

중요한 역사적 기술

하리만은 어떻게 히틀러를 고용했는가. 2차 대전에서 수백만이 살해당한 것은 파시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위기의 어느 특정 시점에서, 독일이 아닌 외부(런던과 뉴욕)에서 매우 중요한 친나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 결정들은 후일 앵글로 아메리칸 역사가들이 단순히 가볍게 마치 
'위로하는 듯이' 토론하는 내용보다는 훨씬 공격적인 것이었다.

3~4십만의 사병 부대가 히틀러의 집권에 대항하는 독일인들을 무수히 살해함으로써 나치의 집권을 도왔다. 1932년, 애버랠 하리만의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이 나치당을 분쇄하려는 독일 정부의 의도를 막았다.

1929-31년의 경제 붕괴는 월 스트리트가 지원하는 독일 철강 조합을 파산시켰다. 독일 정부가 조합의 지분을 인수했을 때, 콘라드 아데나우어와 반나치 카톨릭 중앙당(Catholic Center Party)은 지분 인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앵글로 아메리칸 몬타구 노르만과 하리만-부쉬 은행은 그들의 나치-꼭두각시 프리츠 티센이 조합의 지분을 되찾도록 만들었다그 후로 티센의 히틀러 지원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

1920년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부과된 전쟁 배상금과 변제 불가능한 채무가 독일을 부수었다. 독일은 런던과 뉴욕의 금융 시스템에 약탈당했다. 히틀러의 선동은 이 독일의 채무 부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하고 그의 독재가 시작되자 앵글로 아메리칸들은 채무 면제를 허용했고, 이것은 나치 무장에 사용될 자금을 자유롭게 했다.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과 병합한 북독일 로이드 증기선 라인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얄마 샤크트가 만든 '히틀러법'에 의거해 채무를 면제받은 바로 그 기업들 중의 하나이다.

쿤 뢰브 은행의 펠릭스 워버그가 뉴욕의 히틀러 지원 계획을 수행했다. 쿤 뢰브는 북독일 로이드의 채권자들이 히틀러 이전의 고이율 채권 대신 자신들이 발행한 새로운 저이율 채권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제이콥 쉬프의 쿤 뢰브는 볼셰비키의 자금 창구이다!)


반대자들

뉴욕 변호사 제이콥 차이트킨은 하리만, 부쉬, 워버그, 히틀러가 만든 이 속임수들을 거부하는 여러 채권자들의 소송을 맡았다. 뉴욕 법원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에 대항하던 차이트킨은 30달러의 증기선 회사 채권을 가진 한 여성을 대변하게 되었다. 차이트킨은 그의 고객이 30달러를 받을 때까지 3만톤급 대서양 횡단 여객선 유로파와 연계되어 있던 집행관의 서한을 받는 협박을 받았다.

미국 유대인 의회는 제이콥 차이트킨을 나치 독일 보이콧 운동의 법률 지도자로 고용했다. 미국 노동 연맹 또한 유대인 및 다른 여러 그룹들과 함께 독일 제품 불매 운동에 협조했다. 반면에 미국의 모든 나치와의 무역은 프레스콧 부쉬와 같은 하리만 이권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워버그는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반히틀러 운동을 선동하거나 보이콧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워버그의 결정에 따라 나치의 군사력이 점점 강력하게 성장하는 와중에, 미국 유대인 위원회와 버네이 브리쓰는 독일 제품 보이콧을 반대했다.

이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은폐는 매우 기밀해서 워버그에 대한 폭로는 언론인 존 L. 스피박의 친공산주의 간행물 〈New Masses〉 기고문 월 스트리트의 파시스트 음모가 거의 유일하다. 스피박은 쿤 뢰브 은행이 나치 선박 회사를 인수하고 있던 중에, 워버그가 미국 유대인 위원회를 조종하여 나치 보이코트를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스피박의 글을 공산주의 잡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스피박이 워버그를 모건 은행의 일당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애버렐 하리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리만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원한 영웅이다. (주 소련 미국 대사가 된 하리만은 스탈린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소련의 2차 대전을 지휘했다. 하리만은 러시아를 파괴하기 위해 심은 트로이 목마였다. 독일 정보부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는 하리만이 독일에 심은 첩자였으며,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 '바바로사' 중에 빌헬름 카나리스와 하리만은 스위스에서 매주 만나 독일군의 전체 작전 계획을 협의했다).

존 L. 스피박은 나중에 진기로운 전환을 한다. 그 자신이 은폐에 가담하는 것이다. 1967년, 그의 자서전 〈A Man in his Time에서 스피박은 미국 유대인 위원회를 칭송한다. 이 책에서 워버그의 파시즘은 발견할 수 없다.  '반군' 스피박은 이제 버네이 브리쓰까지도 예찬한다. 측은하게도, 그는 이 조직이 미국 대중에 대한 스파이 파일을 미국 정보 기관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호의적으로 논평한다. 

역사는 지워졌다. 이러한 결정들은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잊혀진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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